"받아쓰기, 필요 없습니다"
'박근혜 적자생존' 없애겠다는 대통령

"청와대 회의는 대통령 지시사항 전달 자리 아니다", 논의 구조 '변화' 예고

등록 2017.05.25 13:55수정 2017.05.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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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하며 직접 차를 따르고 있다. ⓒ 연합뉴스


"받아쓰기, 이제 필요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말에 25일 오전 대통령 주재 첫 수석비서관 회의(아래 대수비) 참석자들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이어 "회의 자료, 여기서 오갔던 내용들이 (각 부서로) 돌아가서 전파할 필요가 있는데 자료들은 정리해서 배포해드릴 테니 여기서 열심히 적어갈 필요가 없다. 논의에만 집중해달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또 "문재인 정부답게 수석보좌관회의는 대통령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이 회의를 하나의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이 회의는 소통하고 공유하고 결정하는 회의"라며 "대변인이 발표할 때도 대통령 지시사항과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구분해서 발표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참석자들의 질문이 계속 나왔다.

임종석 비서실장 : "대통령님 지시사항에 이견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문 대통령 : "그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격의 없이 토론이 이뤄지지 않으면 다시는 그렇게 못하게 되거든요. 잘못된 방향에 대해서 한번은 바로 잡을 수 있는 최초의 계기가 여기인데, 다들 입을 닫아버리면 잘못된 지시가 나가버리고 나중에 바로 잡더라도 (어렵다). 대통령 지시에 대해서 이견을 제기하는 것은 해도 되느냐가 아니라 해야 할 의무입니다."

전병헌 정무수석 : "소수 의견을 (얘기)해도 됩니까?" (웃음)
문 대통령 : "반대의견 있었다는 것도 함께 나가도 좋습니다. 격의 없는 토론이 필요한데 미리 정해진 결론은 없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의결권은 수석비서관들에게 있지만, 이 자리에 배석한 비서관들도 사안에 대해서 언제든지 발언할 수 있다. 대통령의 참모가 아니라 국민의 참모라는 생각으로 자유롭게 말씀해달라. '대통령은 정보가 많을 것'이라는 식의 선입견도 가지면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라크파병, 한미FTA 예시하며 '논의 칸막이 없애달라' 당부

한편으로는, 중요한 안건일수록 청와대 내부 '칸막이'를 없애고 초기 단계부터 전 부서가 함께 논의하는 '열린 토론'을 지향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안보 관련 사안들은 안보라인 쪽에서만 논의되고, 정책 사안은 정책에서만 논의 되는 등 우리 내부에서 칸막이들이 많이 쳐진다"며 2003년 이라크 파병이 안보라인에서, 2006년의 한미FTA 논의는 정책실 내부에서 각각 집중된 사례를 들었다. 두 사안 모두 국내의 여론 지형을 크게 흔들 정도로 중요한 사건들이었는데, 여론동향을 살펴야 할 정무라인이 논의 초기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적이다.

문 대통령은 "나중에 국무회의도 마찬가지다. 국무회의도 처음에 활발하다가 가면 갈수록 담당부처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구경만 하게 되는데, 국무회의에서 똑같은 기조로 해야 한다는 거 다들 전파시켜 주시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대통령의 말에 전병헌 수석은 "황당한 얘기까지 허락한다고 하신다니까 상당히 안심이 된다"고 화답했다. 임종석 비서실장은 "저희도 회의 준비는 잘하되, 말씀하신 취지를 살리려면 사전에 너무 조율하려고 애쓰진 않겠다"며 "토론이 필요한 경우 미리 준비하면 토론을 저해할 수 있을 거 같으니 그렇게 준비하겠다"고 정리했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프로젝트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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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또한 문 대통령은 "오늘은 페이퍼(종이) 회의를 하게 되는데 노트북(컴퓨터) 회의 시스템이 다 갖춰져 있으니 앞으로는 노트북 회의를 해야 될 거다. 가급적 종이문서는 사용하지 않고 노트북으로 하고, 우리가 이지원 업무 시스템을 조금 더 업그레이드하게 되면 모든 논의 내용들이 이지원 업무체계 속에 다 담겨서 전자문서로 자동으로 저장되고 보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말은 자신이 주재하는 회의가 아무런 토론 없이 오로지 '대통령 말씀 받아쓰기 경연장'으로 전락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

자신의 말을 묵묵히 이행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박 전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에 그가 주재하는 회의는 별다른 토론 없이 참석자들이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말없이 받아 적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2015년에는 '적자생존'(대통령 말씀을 잘 받아 적는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이라는 웃지 못할 말이 정치권을 떠돌았고, 심지어 대통령의 말을 부지런히 적어놓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업무용 수첩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로 채택되기까지 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만 해도 '봉숭아 학당' 소리는 들을지언정 대통령과 참모들이 허심탄회한 얘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남아있었는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국정의 소소한 부분까지 직접 챙기려는 '만기친람' 때문에 정부 부처의 자율성은 크게 위축되어 버렸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월요일 회의 일찍 하면 실무진은 일요일 특별 근무... 감안해달라"

문 대통령은 통상 매주 월요일 오전에 하던 대수비 일정도 청와대 직원들의 '주말 있는 삶' 보장을 위해 조정할 뜻을 내비쳤다.

문 대통령은 "월요일 회의를 일찍 하게 되면 실무진은 일요일에 특별 근무를 하게 될 거니까 그것까지 감안해서 시간을 정해달라"며 "나는 오늘처럼 금요일 회의는 10시30분 경에 하고 월요일은 아예 오후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그것은 (실무진들이) 적절히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여민1과 3층 소회의실에서 열린 문 대통령의 첫 대수비에는 모두가 '노타이' 차림으로 참석했다. 임종석 비서실장과 장하성 정책실장 등 '3실장'과 임명장을 받은 모든 수석비서관들이 왔다.

회의장에 입장한 대통령은 수석들과 악수를 나눈 뒤 손수 따른 커피를 들고 '여름철 노타이'를 주제로 가벼운 대화를 시작했다. 취임 다음날(11일) 청와대 경내에서 수석비서관들과 '커피 타임'을 가졌던 자유로운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전병헌 #임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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