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옹알이, 저는 손으로 했어요"

[인터뷰] 아름다운 언어를 전하는 세상에서 수어통역사 고인경씨

등록 2017.06.05 15:45수정 2017.06.0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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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는 손과 표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다. ⓒ 강영균


'3초 이후의 정적.'

통역사들이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이 아닐까. 통역사는 외국 연사의 발언이 끝나면 3초 안에 연사의 말을 전부 통역해야 한다. 통역사가 연사의 말을 놓쳐서 3초 뒤 밀려올 끔찍한 정적은 상상할 수도 없다.

수어 방송통역사에게는 3초도 길다. TV 화면 왼쪽 아래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공간이 그들의 통역 부스다. 거기서 그들은 연사의 말을 곧바로 수어로 통역한다. 때로는 혼자서 여러 연사의 말을 통역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손의 움직임이 2배로 빨라진다. 이정도면 기술보다는 예술에 가깝다.

수어 통역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지난 5월 15일, 수어와 농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잠실새내역 근처 카페에서 나사렛대학교 수어 통역학과 고인경(34) 교수를 만났다.

그녀는 청각장애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밑에서 수어를 한국어보다 먼저 접했다. 그녀에겐 수어가 모어인 셈이다.

"다른 아이들이 한국어로 엄마, 아빠라고 옹알이할 때 저는 손으로 그 단어들을 표현했어요. 어릴 때는 손 근육이 발달을 안 해서 손 모양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지만, 손의 위치나 움직임으로 옹알이를 한 것 같아요."

6살 때까지 수어는 그녀의 언어 세계의 전부였다.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만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줄 알았다.


"유치원에 들어가서 한국어를 배웠어요. 그 전까지는 주로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수어로 이야기했거든요. 부모님께서도 저에게 따로 한국어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어요. 가르쳐 주고 싶어도 가르쳐 주실 수 없었던 거죠."

청각장애인 복지에 대한 마음이 있었던 그녀는 대학 졸업 후 한국 농아인 협회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평생 걸어가야 할 길과 마주한다.

20대 중반, 수어 통역사의 길로

"농아인 협회에서 근무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변승일 회장님의 수행 통역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는 제대로 된 통역이라기보다는 부모님과 같이 소통하면서 익혔던 것들 조금 응용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수어 통역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는데, 변 회장님께서 저에게 수행 통역을 맡기셔서 깜짝 놀랐죠."

수어 통역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수어 통역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옷처럼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일도 즐거웠다. 하지만 즐거움 뒤에는 말 못 할 어려움도 있었다.

"회장님께서 보통 만나는 사람이 기업의 회장이나 단체장, 국회의원들이었어요. 그 당시 저는 20대 중반이었는데, 그분들이 하는 대화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됐어요. 쓰는 단어들도 어려웠고요. 평소 일상생활에서 쓰는 단어와 전혀 다르더라고요. 한번은 회장님께서 지인들과 골프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가 골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통역을 거의 못한 적도 있어요. 회장님 볼 낯이 없더라고요."

고민 끝에 그녀는 농아인 협회장 수행 통역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나사렛 대학원 국제수화통역학과에 진학했다.

"그때 회장님 수행 통역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통역하다가는 앞으로 점점 지식의 밑바닥이 다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통역 일을 하기엔 제가 가진 배경지식이나 경험이 많이 부족했고, 기술적인 부분도 많이 모자랐거든요. 그 부족한 부분들을 대학원에서 많이 채웠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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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수어 통역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옷처럼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 강영균


수어에 대한 오해

대학원 졸업 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전문 수어 통역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그녀는 한국 수어뿐만 아니라 미국 수어, 국제수어까지 구사하며 수어 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전 세계에 수어가 한 종류만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수어만 배우면 전 세계 농인들과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미국에는 영어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어가 있듯이 수어에도 미국 수어, 중국 수어 다 따로 존재해요. 서로 손 모양도 크게 달라서 미국 수어는 영어 배우듯이 처음부터 배운다고 보시면 돼요."

수어도 언어다. 모든 언어에 발음이 존재하듯 표정과 손동작으로 이루어지는 수어에도 발음이 존재한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농인들 사이에서는 어릴 때부터 수어를 배웠는지, 아니면 커서 수어를 배웠는지 딱 보면 보여요. 음성 언어에 발음과 억양이 존재하듯 수어에도 그것들이 존재하거든요. 보통 손의 빠르기, 위치, 분위기, 표정 등을 보고 느낄 수 있어요."

수어 통역의 발전을 위한 첫걸음

그녀는 한국 수어와 미국 수어를 구사하는 국내 몇 안 되는 비장애인 수어 통역사다. 10년 넘게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수어 통역을 진행하고 있는 그녀는 한국 사회에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한국은 수어 통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조금 낮은 것 같아요. 외국어 통역이 아닌 수어 통역이라 쉽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고, 농인들 대상으로 하는 통역이라 가볍게 보시는 분들도 있어요. 여전히 많은 수어 통역사들이 기본 시급 받고 통역을 하는 경우도 많고요. 겉으로 보이기에는 현장에서 1~2시간 통역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전부터 관련 지식을 찾아 공부하고 준비해요. 미국 같은 경우는 통역현장에 이동하는 시간까지 통역비용에 포함해줘요. 수어 통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느 정도 높아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내년이면 수어 교원 인증제도가 생긴다. 그 자격증을 취득하면 누구든 수어 교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체계적인 수어 교재가 없다는 것이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같은 경우 서점에 다양한 문법책이 나와 있는데, 수어는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교재가 없어요. 농인들도 어떻게 수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고요. 안다고 해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에요. 여전히 많은 통역사가 복잡한 말이 나오면 정확하지 않은 수어로 통역하는 경우가 많아요. 전문적인 수어 통역사들도 모르는 표현이 있으면 동료 통역사를 찾아 물어보거든요. 그만큼 수어 교육에 대한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이 미흡해요. 그래서 거기에 책임 의식을 느끼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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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의 대선후보 초청토론 방송. 배치된 수어 통역사 수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KBS


모두를 위한 방송

얼마 전 대선 토론 방송에서 다섯 후보자의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당시 후보자들의 말이 동시에 겹치자 당황하는 수어 통역사의 모습이 그대로 방송에 전해지기도 했다.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수어 통역사 한 명이 다섯 명의 말을 통역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보는 농인들도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대부분 청인은 방송을 통해 쉽게 정보를 얻는데, 농인들은 그렇지가 못해요. 농인들도 정보에 접근할 권리, 알 권리가 있는데 말이죠. 제일 좋은 방법은 연사 한 명당 통역사 한 명을 배치하는 거지만, 힘들다면 한 명이라도 더 배치했으면 해요."

그녀는 나사렛대학교 수어 통역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방송의 영감을 얻기도 한다.

"가끔 학생들에게 조별 과제로 수어방송 통역 영상물을 제작해서 오라고 과제를 내줘요. 그럼 학생들 대부분이 CF나 만화, 드라마를 만들어 와요. 참신한 결과물도 있죠. 수어 통역사를 오른쪽 아래에 위치시키지 않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말하는 대상 머리 위에 잠깐 나와서 통역하고 사라지고 통역하고 사라지는 식으로 (영상물을) 만들었는데 눈에도 잘 들어오고, 이해도 바로바로 되더라고요. 언젠간 한국에서 이런 방송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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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된다면 세계 농아인 연맹(WFD) 행사에서 국제 수어 통역사로서 서보고 싶어요. ⓒ 강영균


새로운 도전

그녀는 통역현장에서 수어 통역사의 삶, 학교에서는 수어 교육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또다시 배움을 위해 학생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저는 작은 목표가 있어요.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해서 영어통역을 배우고 싶어요. 영어통역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한국 최고의 언어 교육기관에서 제2외국어를 어떻게 훈련하는지 여러 언어교육 시스템을 배우고 싶어요. 직접 몸으로 배우고 익혀서 수어 교육에도 적용해 보고 싶어요. 또 기회가 된다면 세계 농아인 연맹(WFD) 행사에서 국제 수어 통역사로서 서보고 싶어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웃음)"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에서 주인공 영찬은 보이지 않는 눈과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달팽이처럼 촉각에 의지해서 산다. 그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있는 거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하여 잠시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수어 통역을 배우고 싶다면

전국에 230여 개의 한국 농아인 협회 교육센터가 있다. 그곳에서 농인들을 직접 만날 수도 있고 수어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또 다른 한곳은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서울 수화전문교육원이다. 서울 충정로역에 있고 저렴한 수강료와 다양한 수화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한국 농아인 협회 www.deafkorea.com
서울 수화전문교육원 www.sdeafsign.or.kr

- 얼마나 배워야 하나?

배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하루 2시간씩 주 5회 1년 동안 배우면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간단한 자기소개는 3개월 정도면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자기 생각이나, 시사 이야기를 하려면 최소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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