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6월, '대전 중앙로'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

[역사 현장 답사] '6월 항쟁의 현장에서 통일의 길을 묻다'

등록 2017.06.07 12:02수정 2017.06.0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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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민주항쟁 30년 기념사업 대전추진위원회'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 30년기념사업 대전추진위원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함성과 발자취가 스며 있는 30년 전 대전 6월 항쟁의 거리를 되짚어 걷는 행사가 마련됐다.

'6.10민주항쟁 30년 기념사업 대전추진위원회'와 대전충남평화통일을여는사람들(아래 대전충남평통사)은 이 달 세 차례(10일, 17일, 24일)에 걸쳐 항쟁의 그 날을 되짚어 걷는다.

오전 10시부터 매회 20여명을 대상으로 '6월 항쟁의 현장에서 통일의 길을 묻다' 제목으로 항쟁이 일어났던 주된 장소를 해설을 들으며 함께 걷는 프로그램이다.  

탐방 구간은 목척교∼중교∼ 국민운동충남본부(옛 빈들감리교회)∼대흥동 성당∼민정당충남도당∼구 동백사거리∼은행동 파출소(현 중앙로 치안센터)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대전에서도 이 기간 동안 연인원 50만 명이 참여했다.

첫 도화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대전 목척교'

대전추진위는 항쟁의 첫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부터 발자취를 더듬는다. 출발지는 대전 목척교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에 연행됐다.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대전에서는 이튿날인 15일부터 분향소를 설치하고 항의 서명운동을 벌였다. 가두시위(1월 27일, 2월 2일)도 벌였다. 특히 49재인 3월 3일에는 대전역 행사장을 봉쇄한 경찰에 맞서 목척교 옆 신도극장 등에서 수천여 명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목척교를 중심으로 이후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 부근은 주요 항쟁지였다.

4.13호헌 철폐 운동 확산 시킨 '대전제일감리교회-괴정동 성당'

목척교를 출발한 이들은 중교다리로 향한다. 중간에 지나는 중앙시장 먹자골목은 시위대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주된 간식이자 주식이었다.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인 후 놓친 끼니를 먹자골목 튀김과 막걸리 등으로 해결했다.
  
먹자골목을 지나면 구 대전백화점이다. 구 대전백화점은 당시 전두환의 부인인 이순자씨 소유로 알려져 당시 시위대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중교다리 인근에는 구 대전감리교회가 있던 곳이다. 구 대전감리교회는 괴정동 성당과 함께 4.13호헌조치에 대한 대전 항쟁의 거점 역할을 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뒤 간선에 의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야당과 재야세력은 체육관에서 뽑힌 대통령은 정통성이 없다며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직선제 개헌 요구가 확산되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그해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가 4·13호헌 조치다. 간선제인 헌법을 고수하고, 1988년 2월, 간선에 의해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게 요지다.

5월 4일 천주교정의구현 대전교구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괴정동 성당에서 호헌철폐를 요구하며 단식기도를 시작했다. 7일에는 목회자 32명이 제일 감리교회에서 단식에 돌입했다. 10일에는 신도 150여명이 제일감리교회에서 목회자 단식 지지 기도회를 개최했다. 15일에는 제일감리교회에서 기독자대회가 개최됐다.

종교인들의 움직임은 지역 내 각 대학으로 확산됐다. 5.18 광주 추모일에 맞춰 대전지역 각 대학에서 추모식 및 호헌 철폐 시위를 벌였다. 제일 감리교회와 괴정동 성당을 중심으로 한 종교인들이 항쟁의 불씨 역할을 했다. 이 교회는 2001년 둔산동 새 예배당을 신축해 자리를 옮겼다.

항쟁의 사령탑 대전충남국민운동본부 사무실 (옛 대전빈들감리교회)

다음 행선지는 대전충남국민운동본부 옛터다. 6월 항쟁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국민운동본부는 5월 28일 발족했다. 사무실은 대전 중구 대흥동 대전빈들감리교회(현 선화동)였다. 교회 지하 공간을 이미 사무실로 사용한 것이다. 참여단체는 20여 곳으로 대전충남 최대조직연합이었다. 지금은 옛 건물조차 사라져 당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에 힘입어 학생들은 6월 8일 충남대에서 6개 대학 학생들이 모여 '호헌철폐 장기집권 저지 충남애국학생연합투쟁위원회(충남 야학투)를 결성했다.

6월 첫 도민대회 열린 '대흥동 성당'

다음 행선지는 대흥동성당이다. 사령탑인 대전충남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도민대회'를 대흥동 성당 옆 대흥동 가톨릭문화회관에서 갖기로 결정했다.

전날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부상하자 대전지역 7개 대학 학생회는 한남대에서 출정식을 갖고 대회장으로 모여 들었다. 경찰은 이곳을 원천봉쇄했다. 학생들은 이날 성심당 제과-대전극장-동양백화점 사거리 주변에서 각각 모여 대흥동 성당으로 향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다. 이때부터 가두투쟁이 본격 시작됐다. 이날 시위대가 중앙로로 진출하자 시민들이 가세해 한때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민들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63명이 연행되고 2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대흥동성당은 대전 지역의 반독재 시위 때마다 집결해 마지막 마무리집회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탄핵 촛불항쟁때는 대규모 시국미사가 열렸다. 현재 대전시 등록문화재 제643호로 지정돼 있다.

대전 6월 항쟁 '명장면' 뽑자면?

대전 6월 항쟁의 명장면을 연출한 날은 6월 15일이다. 충남대학생 7000여명이 장장 10km를 걸어 중앙로에 도착했다. 서대전 사거리에서는 목원대, 침신대, 배재대 학생들과 합류했다. 밤 9시 30분경에는 동백 4거리에서 한남대생과 합류했다. 이날 시위대는 대전역에 모여 밤 늦게까지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또 다른 명장면은 다음 날인 16일 나왔다. 중앙로 곳곳에서 산발적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가 순식간에 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시위대는 대전역 앞에서 구 충남도청에 이르는 1.5km 중앙로(왕복 8차선) 구간을 처음으로 완전 장악했다. 고무된 시위대는 이날 구 충남도청에서 동백사거리에 1만 여명이 집결한 가운데 도청 점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답사단은 대흥동 성당을 거쳐 구 동백 사거리를 향해 걸으며 중앙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그 날의 함성을 떠올리게 된다. 30년 대전추진위는 오는 28일 구 동백 사거리 부근에 항쟁을 기념하는 '표지석'을 세울 예정이다.

시위대는 왜 화염병을 들었나

답사단의 마지막 행선지는 구 은행동 파출소(현 중앙로 치안센터)다. 당시 파출소를 답사 코스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은 연일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난사했다. 백골단은 거칠게 진압봉을 휘둘렸다. 6월 16일 경찰의 폭력에 화가 난 시위군중이 은행동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졌다. 중앙데파트와 역전 교통신고센터도 부서졌다. 역전파출소, 중구청, 중동파출소, 대흥동파출소, 삼성파출소, 민정당 도지부도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6월 17일과 18일에도 시위대는 당시 민정당 충남도지부, KBS목동 방송국을 비롯해 수십여곳의 파출소를 공격했다.

6월 19일 밤 11시, 한 시민이 경찰이 무차별 최루탄 발사에 흥분, 경찰버스를 빼앗아 경찰 저지선을 뚫다 전경 상경을 들이받았다. 3명이 부상을 당하고 1명이 숨졌다. 경찰은 보복으로 주변 시민을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시위대는 이날 신안동, 자양동 파출소를 공격했다.

6월 26일, 이날 하루 연인원 5만여 명이 참가했다. 시위군중이 늘어나자 경찰은 다시 폭력을 행사했다. 유월 한 달 동안 대전 지역에서 150명이 부상을 당했고 경찰 한 명이 숨졌다. 모두 23개 파출소가 파괴됐다.

6월 항쟁 30년, 지금의 과제는?

해설을 맡은 대전충남평통사 관계자는 "연인원 50만 명이 참여한 대전의 6월은 항쟁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로 시작된 민주화요구를 이후 사회 경제적 이슈와 통일, 민족문제에 확산시키는 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6월 항쟁의 현장에서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답사 프로그램 참여(10일, 17일, 24일 각 오전 10시부터 약 2시간)를 희망하는 시민은 '6.10민주항쟁 30년 기념사업 대전추진위원회'나 대전충남평통사'에 신청하면 된다. 이 행사는 <오마이뉴스 대전충청>이 후원한다.

[특별페이지] 6.10민주항쟁 30주년 기념, 1987 우리들의 이야기'
덧붙이는 글 문의: 6월 항쟁 30년 기념사업 대전추진위원회 042-485-8615/ 대전충남평통사 010-3297-0568
#6월 항쟁 #대전 #중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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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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