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 이겨낸 임진택, 광대로 살아 판을 흔들다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 신명난 2시간30분 완판 은평문화예술회관 공연

등록 2017.06.10 08:51수정 2017.06.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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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에서 판을 벌인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 포스터. ⓒ 은평문화예술회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개혁사상이 적폐청산의 신명난 이야기로 되살아났다. 다산을 창작판소리로 되살린 주인공은 민중 마당극의 창시자이자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의 '비가비'(非甲, 학식 있는 소리꾼) 임진택(67) 명창이다.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이 8일 저녁 7시30분부터 10시까지 2시간30분간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에서 4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신명나게 한 판 벌였다. 은평문화예술회관과 은평역사박물관 주관으로 벌인 '다산 정약용'은 지난 2월 경기도 남양주시 실학박물관에서 첫 번째 공연을 한데 이어 두 번째 공연이다.


이날 공연에는 김도현 창작판소리12바탕 추진위원장(전 문화관광부 차관)과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김영호 전 유한대 총장(전 산자부 장관),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송태호 전 문화부장관, 민청학련 사형수 이철 전 국회의원과 박재동 화백 그리고, 공연을 주관한 김시업 은평역사한옥박물관장 등의 인사가 관람했다.

'소리내력'과 '똥바다', 민중 광대의 사설에 관중들 박장대소에 손뼉

지난해 위암 수술을 이겨내고 다시 광대로 돌아온 명창 임진택. ⓒ 조호진


임진택 명창이 '아니리'(판소리 이야기꾼) 광대를 맡은 가운데 진행된 '다산 정약용'에서 1부 판소리와 고수는 명창 송재영과 조영제, 2부 판소리와 고수는 명창 이재영과 이규호가 각각 맡았다. 1부 '풍운 속으로'에서는 다산의 출생부터 유배, 2부 '유배지에서'는 해배(解配)된 다산의 사상을 바탕으로 진보 개혁의 바른 길을 찾아보자는 시대의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임진택 명창은 지난해 위암 수술로 몸무게가 12kg나 빠졌다. 하지만 광대의 역량은 손색이 전혀 없이 그대로였다. 임 광대는 첫 사설에서 "올해는 다산 선생이 유배지 강진에서 <경세유표>을 저술한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고 내년은 <목민심서>를 저술한지 200주년 되는 해"라면서 "2012년 유네스코가 정약용을 '평등사상에 입각해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학자'로 인정해 세계 문화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산과 함께 선정된 인물이 사상가 '장자크 루소', 작가 '헤르만 헤세', 작곡가 '드뷔시'였다"면서 "그런데 우리 교육 현장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가르치면서도 정작 다산의 <경세유표>는 가르치지 않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산 정약용' 판소리가 다산의 개혁사상과 인본정신을 누구에게나 쉽게 알리는 이 시대의 '아학'(兒學)' 판소리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부탁했다.


'소리내력', '똥바다', '오월광주' 등의 민중 광대이자 정권진 명창에게 사사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인 임진택 선생의 걸진 입담은 '판소리는 고루하고 재미없다'라는 상업문화가 대중에게 심어놓은 프레임을 순식간에 깨트렸다. 원형으로 된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에 둘러앉은 남녀노소들은 좌중을 휘어잡는 임진택 광대의 사설에 따라 뒷소리로 추임새 넣으며 박장대소했다.

"아따, 잘한다!"
"옳지, 그렇지!"
"소리, 죽인다!"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 원형극장에 둘러앉은 400명의 관객 앞에서 사설을 하고 있는 임진택 명창 ⓒ 은평문화예술회관


1부의 절정은 '암행어사 시절'과 '곡산부사 시절' 정약용의 활약 대목이다. 1794년 정조가 다산에게 경기도 암행어사 특명을 내리고 다산은 경기도 북부지방 양주, 적성, 마전, 삭녕 등 4개 고을을 돈다. 연천 현감 김양직은 술독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뒷돈을 요구하고, 삭녕 군수 강명길은 관청 업무는 미루고 뇌물이라면 환장한 자이고,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는 토지를 강탈하고 관곡을 비싸게 강매해서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는데 암행어사 정약용이 암행하여 탐관오리들을 고발하자 이들의 악행에 분노하던 관중들이 박수친다.

황해도 곡산 부사로 부임한 정약용이 탐관오리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난리를 일으킨 주동자 이계심을 판결하면서 그의 읍소를 듣고 "자네의 행동은 백성의 고통에서 나온지라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야할 터, 내 이를 헤아려 자네의 죄를 묻지 않겠다"면서 방면한다. 임진택은 사설에서 "다산의 판결은 국민저항권과 조세저항권을 인정한 명 판결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다산은 200년 전에 알고 실행에 옮긴 목민관"이라고 덧붙여 설명한다.

그러면서 임진택 광대는 "판소리가 살아나려면 현실을 담아내야 한다"고 일러준다. 그렇다. 오늘의 이 판은 200년 전 옛날이 아니라 지금의 촛불광장이다. 민중의 반란이 아니라 성난 촛불 민심의 현장이다. 다산의 개혁사상과 애민정신은 문재인 정부의 시대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마당이 펼쳐진다. 이 시대의 과제인 적폐청산은 막판 자진모리로 울려퍼지며 새로운 나라, 개혁 국정을 향해 나아간다.

"국가의 틀을 새롭게 짜니 이것이 바로 경세유표
정치경제 제도를 바꿔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구나
목민관의 지침을 만드니 이것이 바로 목민심서
부정부패 가렴주구를 공렴(公廉)으로 막아낸다
법률집행의 원칙이 서니 이것이 바로 흠흠심서"

이날 판은 옛날 소리가 아니라 오늘의 함성이다. 관중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추임새와 뒷소리로 참여하는 마당의 주역이다. 케케묵은 역사가 아니라 노래로 배우는 살아 있는 역사는 흥미진진해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 함께 애를 태우고 분노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죽은 역사가 아니라 산 역사의 힘이다. 지루할 틈 없이 흘러온 장장 2시30분짜리 완판공연 '다산 정약용'이 마지막 엇중모리로 신명을 모으니 마지막 소리는 이렇다.

"200년 전 다산선생 부패한 세상을 바꾸고자 
온갖 방책을 강구하는 귀한 저술을 남겼더라.
다산선생 고전을 바탕으로 개혁사상 캐냈듯이,
오늘 우리도 다산사상 바탕해서 
진보 개혁의 바른 길을 찾아보세.
오늘날의 경세유표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오늘날의 목민심서 우리 자신이 써내보세.
다산선생 억울한 삶 기막힌 세월을 살면서도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백성 속으로 들어갔던
실사구시 정신을 제대로 배워보세.
너무 임금님 찾는 것만 좀 빼고,
아들들에 잔소리도 그만 좀 줄이고
오늘의 현실을 헤쳐 나가자면
우리 다산으로 돌아가세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람 사는 세상 만나보세."

박석무 이사장 "황금 같은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 높이 평가

명창 송재영과 고수 조영제가 '다산 정약용' 1부 '풍운 속으로'를 열창하고 있다. ⓒ 은평문화예술회관


다산 정약용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창작판소리로 다산을 다시 살리는 동시에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는 임진택 명창의 광대 판을 높이 평가했다.

박 이사장은 9일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국민들이 워낙 책을 읽지 않는데다 책을 읽는 사람들마저 우리의 훌륭한 선조와 사상가는 외면한 채 외국 인물과 역사에 치우쳐서 다산과 율곡 등 훌륭한 인물을 알리는 일이 매우 어렵다"면서 "이런 어려운 지경에 임진택 명창이 창작판소리로 다산의 생애와 사상을 보급하는 것은 황금처럼 귀한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박 이사장은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은 구성지고 신명난 판소리로 문재인 정부의 개혁과제와 적폐청산을 대중들에게 전하는 문화상품이다. 청와대와 문체부를 비롯해 지방정부들이 앞장서 널리 보급했으면 좋겠다"면서 "황금처럼 귀한 일을 하는 광대들이 신나게 판을 벌일 수 있도록 관객들이 모여들면 좋겠다"고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김시업 은평역사한옥박물관 관장은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을 알리는데 앞장섰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실학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부터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 제작에 공감했다. 은평한옥박물관장으로 부임한 후인 지난 5월 21일 박석무 이사장과 임진택 명창을 초청해 다산의 이야기와 창작판소리 마당을 진행한데 이어서 8일 공연도 주관했다.

김시업 관장은 9일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세계의 음악인들은 우리의 판소리를 경이롭고 충격적인 소리로 인정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오히려 평가 절하하는 측면이 있어서 안타깝다"면서 "역사의 인물들을 오늘의 열린 양식으로 재현하는 임진택 명창의 판소리를 듣는 일은 행복하고 중요하다"면서 다른 지방정부에서도 주민들에게 문화선물로 나눠줄 것을 권했다.
#임진택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 #명창 #적폐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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