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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는 '여성혁명가'? 이하늬가 만들어낸 새로운 장녹수

[인터뷰] '국악인 배우' 이하늬의 도전 "<역적>은 선물같은 작품"

17.06.10 20:58최종업데이트17.06.10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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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장녹수를 연기한 배우 이하늬가 26일 오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사람 일이라는 게 정말 재밌는 것 같아요. 몇 달 동안 <판스틸러>에 매달렸어요. <역적> 감독님과 처음 미팅했을 때도, 12월까지는 <판스틸러>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랬더니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아무것도 할 것 없어. 그렇게 계속 예인으로 살고 있으면 돼'. 결국 <판스틸러>로 쌓은 음악적 자산은 '예인 장녹수'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 됐죠. (웃음)"

지난 1월, <역적> 제작발표회에서 이하늬는 장녹수를 "아꼈던 역할"이라고 말했다. 인간문화재의 딸에, 본인 역시 서울대에서 국악을 전공한 가야금 연주자다. 그런 그가, 춤과 노래로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관기 장녹수를 연기한다니. 시작도 전에 대중의 기대가 높았고, 꼭 그만큼 부담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하늬는 초반 승무부터, 장구춤, 판소리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예인'으로서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최고의 장녹수를 표현해냈다. 마치 500년 전 장녹수가 2017년 브라운관에서 환생이라도 한 것처럼.

드라마 종영 후 만난 이하늬는 "모든 연기가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내게 선물처럼 남은 장면들도 있다"면서 "드라마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며 웃었다.

'예인' 이하늬의 모든 것, 장녹수에 담았다

'국악인' 이하늬가, 춤과 노래로 왕을 사로잡은 장녹수를 연기한다니. 시작부터 대중의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 이정민


- '선물'처럼 남은 장면은 어떤 장면인가.
"연산 앞에서 승무 추던 장면. 오래 준비했고 고민했다. 앞으로 내가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 힘들 정도로. 또, 그 한 장면을 위해 무려 다섯 시간이나 촬영했는데, 우리 드라마 제작 여건상 그렇게 다시 찍을 수도 없을 거다. 편집도 완벽했고. 많이 아끼던 승무를 <역적>에서 공개할 수 있어 감사했다."

- 승무 장면을 특히 치열하게 준비한 이유가 있나. 
"연산과 처음으로 예인으로서 통하는 장면 아닌가. 연산에게 장녹수는 그저 여인이 아니라, 예인으로서 반한 거라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연산 역시 시 쓰고, 그림 그리던 아티스트였고, 녹수와 서로를 알아본 거지. 작가님은 대본에 '춤을 춘다'고만 써주시고, 어떤 춤인지는 안 써주셨다. 이런 중요한 장면을, 온전히 믿고 내게 맡겨주신 것 아닌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 장녹수가 죽기 전 부른 '꿈이로다. 모두가 꿈이로다' 라던 가사의 노래도 인상 깊었다.
"첫 미팅 때 감독님과 장녹수의 이런저런 인생사를 이야기했는데, 그때 녹수가 마지막에 돌 맞아 죽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침 '한타령'에 심취해있던 때라, '이 노래가 생각나요' 하면서 불렀다. 그때 느낌이 오신 것 같더라."

- 이하늬가 장녹수를 연기한 덕에, 예인 장녹수가 더 풍부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하늬' 하면 떠오르는 건 사실 가야금인데, 가야금 타는 모습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기악보다는 소리나 무용이 녹수를 보여주는 데 더 효과적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 장구춤 장면에서도 소리가 내가 생각한 사운드가 아닌 거다. 감독님께 들으니, 소리 송출에 한계치가 있다더라. 그래서 소리가 납작하게 나가게 된다고. 감독님은 벌금을 감수하고라도 원래 사운드를 고집하셨는데 결국 안 됐다고 들었다. 그렇게까지 음악의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았다."  

공화와 장녹수, 그리고 이하늬

장녹수의 마지막 '한타령'은 이하늬의 추천곡이었다. 장녹수의 마지막에 대해 듣고 떠오른 곡이라고. ⓒ 이정민


- 장녹수의 사랑도 '예인'의 관점에서 읽혔다. 녹수를 처음 '예인'이라 불러준 길동, 녹수의 예술적 능력을 사랑했던 연산. 
"길동이는 공화에게 '예인'이라는 자각을 시켜준 인물이다. 양반들에게 희롱당할 때, 길동이가 막아주고 그렇게 불러주지 않나. 공화는 '기생이 춤추고 노래하는 거지 무슨 예인이냐'며 자조하지만, 자신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주는 사람과 진짜 사랑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동안 공화 주변에는 어떻게 한 번 몸 섞어볼까만 생각하는 남자들뿐이었는데,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얼마나 고마웠겠나.

연산을 보는 감정은 복잡했던 것 같다. 연산은 공화가 출세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남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사랑해주는, 스스로도 예인이었던 남자다. 분명 연산도 사랑했을 거다. 모성애도 느꼈을 거고. '나는 엄마의 마음이 없다'고 이야기하던 여자가, 연산에게는 엄마의 마음이 일었던 것 같다. 연민일 수도 있겠지. 뭔가 복합적인 감정인데, 한 살 한 살 나이 들면서 같은 순간에도 여러 감정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연산과 있을 때 길동이 잡혀 오지 않나. 그때도 그런 감정이었다. 반가운데 마냥 반갑지는 않고, 슬픈데 기쁘기도 하고.

- 공화와 장녹수는 같은 사람이지만 차이가 명확했다.  
"감독님, 작가님과 대화를 많이 했는데, 특히 공화가 녹수로 변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김진만 감독님은 장녹수에게 '여성 혁명가'라는 거창한 설명을 붙여주셨다. 어린 날 엄마 손을 잡고 사또의 수청을 든 분노가 있었지만, 사대부 여인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조선 시대에, 관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 하지만 공화는 사또가 눈을 찔러 피 흘리는 다른 기생을 보고 각성한다. 이렇게 죽느니 한 번 해보자. 하는 데까지 해보자... 공화는 그렇게 궐에 들어가 장녹수가 됐다."

- '여성 혁명가' 로서의 장녹수는 새로운 해석인 것 같다.
"아티스트 성향이 강하고, 진취적인 녹수가 조선에 산다는 건 형벌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현대 여성들도 사회에서는 약자인데, 조선 시대에 낮은 신분의 여성이니 얼마나 갑갑했겠나. 나 역시 한 명의 예인으로서, 여자로서, 그런 녹수와의 접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시청자분들이 공감해주신 것 같아 뿌듯하다."

- 사실 장녹수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여러 번 다뤄졌다. 20년 전 박지영이 연기한 KBS 2TV 사극 <장녹수>도 있었고, 강성연이 연기한 영화 <왕의 남자>의 장녹수도 있었고. 하지만 여러 면에서 <역적>의 장녹수는 새로웠다.
"역사에 장녹수와 연산군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진위를 판단하긴 어렵지만, 그들이 예인이었던 건 맞는 것 같다. 작가님과 감독님이 예인적 요소를 보여주길 원하시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알려드렸다. 작가님은 내가 가진 노래와 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주셨고, 감독님은 이야기에 녹아들도록 너무 잘 표현해주셨다.

거기다 황진영 작가님은 역사과를 나오시고, 김진만 감독님도 부전공이 사학이시라더라.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지만, 역사적 기반이 탄탄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한 번은 좋은 시조를 추천해 달라고 하시더라. 선비와 기생이 화답하는 내용의 시조였는데, 감독님이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도 계속 고민하시더라. 조선 후기 사람이 쓴 시조라 연대가 맞지 않는다고. 결국 쓰지 않았다. 역사를 재해석하고 마이너한 관점에서 보는 거지, 왜곡은 하지 않는다는 기준이 명확하셨다. 결국 연산과 장녹수의 '예인'으로서의 모습도, 정사를 기반에 둔 상상과 재해석이었기 때문에 시청자분들도 좋아해 주셨던 것 같다."

사회활동, 받은 사랑 흘려보내는 건강한 작업

30부작 드라마를 마친 뒤, 이하늬가 향한 곳은 전남 구례였다. 가난 극복 기부 프로젝트 '옥스팜 트레일워커' 참여를 위해서였다. ⓒ 이정민


- 이하늬에게 <역적>은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될까.
"<역적>은 그야말로 '민중의 승리'를 담은 드라마다. 이름 모를 단역 배우를 엔딩으로 채웠던 장면에 <역적>의 메시지가 명확하게 담겨있었다. 내가 엔딩을 차지하건 안 하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 뭉클하고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현장도 그랬다. 조명팀 막내부터 포커스 잡는 스태프, 현장 매니저, 감독님... 너나 할 것 없이 드라마를 빛내줬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우리가 다 만들어줄게. 어서 해봐' 하는데, 배우들이 어떻게 허투루 연기하겠나. 무엇보다 시청률이 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거, 이렇게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거. 이걸 알게 해준 작품이다."

- 30부작 드라마라 체력 소모가 컸을 텐데, 드라마를 마치자마자 '옥스팜 트레일워커'(가난 극복 기부 프로젝트) 행사 참여를 위해 전남 구례까지 다녀왔더라. 꾸준히 유기견 봉사활동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사회활동을 지속하는 이유가 있나. 
"여러 활동에서 좋은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는다. 나눔과 기부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도 흘러야 한다. 배우는 사랑받는 직업이지 않나. 받는 사랑을 가지고만 있으면 반드시 썩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배우병, 스타병이 걸릴 수도 있어서 스스로를 다잡아줘야 한다. (웃음) 사회활동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건강한 작업이라 놓칠 수 없다."

이하늬에게 <역적>은 어떤 드라마로 기억될까? ⓒ 이정민



이하늬 역적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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