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 떨리고 악 받쳐 오르는 산, 맞는 말이네요

[미국남자 한국여자의 불량한 도보여행 21] 횡성 학곡리에서 원주 황골까지

등록 2017.06.21 21:17수정 2018.01.0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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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가 떨리고 악에 받쳐서 치악산이라지 ⓒ 이수지


잠시 두 발을 멈추고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꽤 높이, 멀리 왔다. 더스틴의 찌푸린 미간 사이로 땀이 두 줄 곧게 흘러내렸다. (관련 기사: 치악산은... 너무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아저씨가 말한 그 '반', 어디서부터 반이라는 거지?"
"세렴폭포에서 비로봉까지 절반 아냐? …. 설마, 구룡사에서부터 절반을 왔다는 말이었나?"

모르지. 우리는 계속 걸었다. 이 길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다는 것을 강하게 믿으면서. 산행 안내판이 보였다.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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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 온걸까?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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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까지는 2.2km가 남아있다. 구조해달라고 할까. ⓒ 이수지


나는 내 눈을 믿지 못하고 더스틴을 쳐다봤다. 마치 그가 안내판의 숫자를 바로 고쳐주기라도 할 것처럼. 더스틴이 선뜻 지우개를 들고 앞으로 나서지 않아 할 수 없이 다시 안내판을 쳐다봤다. 안내판에 따르면 우리는 세렴폭포에서 고작 500m를 걸었다. 우려한 바와 같이, 아저씨가 말한 '반'의 의미는 구룡사에서부터의 절반이었다. 구룡사에서 세렴폭포까지 4km를 걸었을 때보다 다섯 배는 더 힘들여 걸었는데 그 거리가 고작, 500m다. 비로봉까지 2.2km 남았다.

"…."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더스틴을 봤다. 그의 짙은 두 눈썹이 꿈틀댔다. 양 볼은 시뻘겋다. 볼 어딘가가 금방이라도 펑, 타오를 것 같다.

"이제 어쩔 거야?"


내가 따지듯 물었다. 포기를 종용하는 질문이었다. 철원에서 걸음을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그만두거나 포기해본 적이 없다. 춘천에서 위기가 있었지만 여행을 이어나갔고, 짧은 구간 차를 타고 가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굶고 다치고 잠잘 데를 구하지 못해 힘들었지만, 어쨌거나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여행을 이어왔다. 늘 그만두고 포기해버리는 나에게, 지금까지 이 여행은 어떤 승리의 경험이었다. 이제 아니다. 바로 지금이 포기를 감행해야 할 그 순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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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지쳐 쓰러져있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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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받쳐 남은 600m를 올랐다. 오후 2시다. ⓒ 이수지


"몰라. 잠깐 쉬게 나 좀 내버려 둬."
"네가 산에 오자고 한 거니까 네가 결정해. 계속 가 말아?"
"내 말 못 들었어? 잠깐 내버려 두라고 나 좀."
"…. 이제 500m 올라왔어. 앞으로 2.2km를 더 올라가야 하는데 어쩔 거냐고? 게다가 지금까지 온 길은 '험한' 구간이었고 앞으로 갈 길은 '매우 험한' 구간이야."
"예상 못 하고 온 것도 아니잖아. 험하다는 거 알고 온 산 아니야? 고생하려고 온 산인데, 진짜 고생을 하니까 이제 싫어?"
"그럼 넌 좋으냐!"
"좋든 싫든 난 나대로 감당할 테니까 좀 내버려 둬!"

저 인간은 투정을 받아줄 줄을 모른다. 나는 더스틴 대신 애꿎은 오르막길을 노려봤다.

"조금 더 가보자."

더스틴이 말했다. '싫어! 안가! 난 내려갈 거야!'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망할 미련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억울하다. 끈기는 없지만 오기로 버티는 나다. 나는 대답 대신 배낭을 주섬주섬 챙겨 어깨에 걸었다. 그래. 가보자. 까짓 치악산 따위, 힘들면 얼마나 힘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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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이 왜 치악산인 줄 알아? 치가 떨리고 악에 받쳐 올라간다고 치악산이래."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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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에는 나무들도 근육질이다 ⓒ 이수지


힘들어도 너무 힘들다

힘들어도 너무 힘들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피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이미 오른 산, 앞으로의 길이 험하다고 다시 내려갈 순 없다. 이미 떠나온 여행, 이미 없애버린 기반, 인제 와서 여행 중간에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다.

"치악산이 왜 치악산인 줄 알아? 치가 떨리고 악에 받쳐 올라간다고 치악산이래."

우리 뒤를 따르던 중년 남자가 함께 걷던 여자에게 농을 쳤다. 그것참 맞는 말이네요. 치가 떨린다. 악에 받친다. 악에 받칠 대로 바쳐 고통의 세 시간을 오르자 사다리병창길이 등장했다. '매우 어려운' 구간의 시작이었다. 빌어먹을 배낭은 산 공기에 취해 낮잠이라도 자는지 내 등짝에 꼬옥 안겨 미동도 없다. 사다리병창길은 밧줄 없이는 오르지 못하는 가파른 길이었다. 무게 중심을 조금만 잘못 잡았다가는 고꾸라져 벼랑길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기에 십상이다. 더스틴이 배낭을 내려둔 채 먼저 올라갔다. 바위 두 개 올랐을 뿐인데 제 키만큼 더 커져 있다. 더스틴에게 우라질 배낭 네 개를 하나씩 차례로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밧줄을 붙잡고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더스틴, 이게 네가 말한 그 고달픔이냐. 고달픔이란 단어 한 번 온몸으로 이해해보는 하루구나. 이제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없다. 저 벼랑길을 다시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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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하나 겨우 들어갈 계단. 배낭을 들고 오르다가는 고꾸라져 벼랑길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십상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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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두 개 올랐을 뿐인데 더스틴은 한참 높이 올라 서 있다. 나는 더스틴에게 우라질 배낭 네 개를 차례차례 넘겨줬다. ⓒ 이수지


산세가 험해질수록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긴 머리를 조여 맨 외국인 더스틴이 눈길을 끈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험한' 사다리병창길을 배낭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매달고 오르는 미련한 모습이 이목을 집중시켰을 게다. 구룡사에서 산행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리에게 어떤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준 등산객들. 바로 그들이 이제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비로봉까지 600m 남은 지점. 산을 내리던 두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물 좀 줄까요?"
"…아니 괜찮아요."
"우리는 이제 내려가니까. 줄게, 받아요."
"아뇨, 괜찮아요."
"아직 한참 가야 하는데."
"괜찮아요."

'거, 물 귀한 줄을 모르네.' 아주머니 두 분이 중얼대며 구룡사 방향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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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병창길의 '병창'은 절벽이란 뜻이란다. 사다리 모양의 절벽길....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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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에 따르면 우리는 세렴폭포에서 고작 500m를 걸었다. ⓒ 이수지


"…. 받을 걸 그랬나?"
"왜 안 받았어? 아주머니들이 감정 상하는 말했어?"
"아니. 전혀. 몰라 그냥. 몰라. 나 돌았나 봐."
"우리, 물 딱 두 모금 남았어.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야?"

괜찮기는커녕 비상사태다. 상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남은 물 두 모금에 의지해 비로봉에 올라야 하고, 비로봉에서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10km 거리의 성남리까지 가야 한다. 악에 받쳐 남은 600m를 올랐다. 오후 2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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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가 험해질수록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매우 어려운' 사다리병창길을 앞뒤 배낭을 매달고 오르는 미련한 모습이 이목을 집중시켰을 게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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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오르막길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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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에 깔린 수천개의 계단 중 하나 ⓒ 이수지


비석 앞에 주저앉았다. 비석에는 '치악산 비로봉 1,288m'라고 쓰여 있다. 문득, 강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허기다. 가방을 뒤졌다. 에너지바 한 개가 나왔다. 더스틴도 가방을 뒤졌다. 초코파이가 나왔다. 우리는 에너지바 한 개를 나눠 먹고 두 모금 남은 물을 반씩 나눠 마셨다. 초코파이는 먹지 못했다. 물을 언제 다시 마실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초코파이를 먹었다간 빵가루에 목이 켁, 하고 막혀버릴 테니.

"가방이 왜 이렇게 많아요?"

건너편 바위에 앉은 네 명의 여자 중 한 명이 물었다. 국토종단 중이라서요. 와! 대단하다! 따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휴. 그런 건 왜 해? 힘들게? 왜?"

게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저기요, 다 들리거든요. 우리도 알아요. 우리가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행군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당신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드는 짓이라는 걸.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쓸데없고 진 빠지는. 도저히 정상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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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비로봉 1288m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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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바라던 비로봉에 왔건만 하산길 걱정에 정상에 닿았다는 기쁨 따위는 다 짓눌려버렸다. ⓒ 이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고 큰 벌레떼가 얼굴 앞을 알짱거렸다. 알짱거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얼굴이고 팔이고 다리를 콕콕 물어댄다. 목적지인 성남리까지 10km 남았다. 그토록 바라던 비로봉에 왔건만 하산길 걱정에 정상에 닿았다는 기쁨 따위는 다 짓눌려버렸다. 조금이라도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벌레 때문에 그만 엉덩이를 털고 가봐야겠다.

"엄마, 비로봉이 이렇게 좋은 덴지 몰랐어!"

엄마랑 산을 오른 열 살 남짓의 남자애가 외쳤다.

"엄마! 성남리까지 10km래. 가볼까?"
"안돼. 거긴 너무 멀어. 이제 내려가야 해."

엄마가 꼬마를 말렸다. 우리도 좀 말려주세요. 우리에게 성남리란, '가볼까'가 아니라 가야만 하는 길이다. 산길 10km를 해지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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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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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 의미 있는 일이란 단 하나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이 산에서 내려가는 것. 몸을 뉠 방을 구하는 것. 물을 마시는 것. 결정을 마친 우리는 황골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 이수지


1km를 뛰듯이 내려 표지판을 확인했다. 어찌 된 일인지 거리가 늘어나 있다. 안내문에 표시된 트레킹 예상 시간을 합쳐봤다. 현재 위치부터 성남공원지킴터까지 8시간이 걸린다. 밤 11시에 도착한다는 소리다. 우리는 성남리를 포기하고 원주 황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2시간 반이 걸리는 길이다. 산을 넘으면 충청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에 꼬여 올라온 산이지만, 할 수 없다. 인제 와서 충청도 따위가 무슨 의미야? 지금 우리에 의미 있는 일이란 단 하나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이 산에서 내려가는 것. 몸을 뉠 방을 구하는 것. 물을 마시는 것. 결정을 마친 우리는 황골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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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해준 입석사 약수터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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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해준 치악산 입석사의 약수터. ⓒ 이수지


두 시간을 뛰어내려 입석사에 닿았다. 입석사 약수터에서 물을 실컷 마셨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황골로 내려가 방 하나를 구했다. 침대 없는 방이었다. 우리는 라면을 하나 끓여 나눠 먹고 딱딱한 방바닥에 요 하나 없이 누워 잠을 청했다. 텐트 바닥에서 자는데 익숙해진 몸은 조금의 안락함에도 쉽게 만족했다. 깊은 잠은 아침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꿈을 꿨다. 우리는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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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산행으로 너덜너덜해진 몸, 비틀거리는 발걸음. 원주 황골에 거의 다 왔다. ⓒ 이수지


횡성 학곡리에서 원주 황골까지 걷기

경로: 치악산 (횡성 학곡리 - 원주 황골)
거리: 약 18.1km
소요시간: 약 10시간 50분
난이도: 강
추천: ★★☆☆☆ (고달픔에 대해 큰 각오를 하고 걸을 것.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경로 소개

학곡리 - 구룡사
차 없는 산도로와 나무데크를 따라 걷는 4km 남짓의 숲속 산책길이다. 구룡사 입구 쪽으로 가면 식당이 몇 개 있다. 산으로 들어가면 식당이 없으니 여기서 꼭 밥을 먹고 가자.

구룡사 - 세렴폭포
구룡사 매표소에는 입장료가 있다(인당 2,500원). 키 큰 소나무가 선 잘 닦인 산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흰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를 구룡사까지 안내해줬는데, 지인에게 말하니 본인도 몇 년 전 치악산에 갔을 때 그 개를 봤단다. 지금도 있을지도. 사납지 않고 착한 개다.

세렴폭포 - 사다리병창길
숲속 나들이 정도를 생각하고 치악산에 왔다면 세렴폭포에서 구룡사로 다시 돌아가자. 그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확인해 보고 싶다거나 고달픔이란 단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새겨 이해하고 싶다는 사람이라면 사다리병창길로 향하자. 계단에 계단을 따라 영원히 올라가는 그 길로….

사다리병창길 - 비로봉
사다리병창길은 험하다. 트레킹 안내도에 나온 대로 '매우 어렵다'. 암벽등반까지는 아니지만, 밧줄을 잡고 커다란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올라야 한다. 비로봉에 오르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나는 뭐하자고 힘들게 산을 오르고 있나.

비로봉 - 원주 황골
비로봉에서 성남리까지 가는 길은 8시간이 걸리는 트레킹이다. 과연 구룡사에서 시작해서 성남리로 하루 만에 내려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워낙 느리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테다. 원주 황골까지는 2시간 반이 걸린다. 내려가는 길도 수월하진 않은 바윗길이다. 무릎 다치지 않게 천천히 가자. 입석사에서 물을 마실 수 있다. 황골에는 민박이 여럿 있다.


#치악산 #치악산 국립공원 #국토종단 #도보여행 #부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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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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