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과 사이비 역사학, 무엇이 문제인가

[주장]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역사관 논란에 부쳐

등록 2017.06.15 18:24수정 2017.06.1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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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하는 도종환 후보자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유성호


근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도종환 의원이 지명되자 그의 '사이비 역사학'('재야사학'·'유사 역사학'이라고도 한다)과의 친연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2013년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아래 동북아특위)에 의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 폐기의 책임소재를 제기하며 정면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당시 도종환 의원은 동북아 특위 위원이었다. 이에 대해 6월 13일, 한국고대사학회는 학회 차원의 입장문을 냈다.

지난 2013년∼2014년, 박근혜 정권과 구여권은 청와대와 국회차원에서 사이비 역사학을 지원했고, 수십억대의 예산을 지원했다. 당시 국회에서는 김세연 새누리당(현 바른정당) 의원이 기존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몰아붙이는 공세를 주도했는데, 이때 야당 의원 일부도 이에 동조했던 것이다. 심지어 2013년 광복절 대통령 축사에 '가짜 사서'인 <환단고기>의 한 구절이 버젓이 인용되자 역사학자들은 경악했다. 또 2013년 연말 당시 여권과 보수진영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직후 박근혜 정권의 사이비 역사학 지원은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 흐름과 결부되기 시작했다. 2014년 1월 교육부가 상고사 연구 지원 강화와 국정 역사교과서 부활 논의를 함께 시작한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기실 사이비 역사학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였다. 재야사학계의 경전인 환단고기 등의 가짜 사서가 출현한 것도 이때였다. 당시 군부 내 극우 민족주의 세력들은 '웅대한 민족사'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에 공명한 민간 재야사학자들은 기성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이라 공격하며 권력을 등에 업고 이 문제를 국회라는 정치의 장으로 끌고 갔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당시 역사 교과서 제도가 국정이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문제는, 진보적 인사들 중에도 '기성 역사학계=식민사학'이라는 사이비 역사학의 프레임에 공명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점에 있다. 2013년 당시 도종환 의원을 비롯한 야당의원들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첫째, '기성 역사학계=식민사학'이라는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의 주장이 기성 역사학계라는 '주류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진보적 인사들에게까지 쉽게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둘째, 미디어의 책임이다. 사실 조금만 공부해보면 사이비 역사학 측의 주장이 엉터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음에도, 그동안 기자들은 공부는 하지 않은 채 마치 학술적 논쟁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도했다. 또 미디어의 정략적 보도 행태 역시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조선일보>의 경우 박근혜 정권 시기 뉴라이트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 역사교과서에 찬동하며 '권력의 역사농단'을 환영했다가, 돌연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에 대해 역사학계 일각에서 비판을 제기하자 이를 이슈화했다. 끝으로 역사를 공부하지 않은 대중들이나 진보적 인사들이 식민주의 역사학, 식민사학, 식민사관을 정확하게 모른 채 막연히 '한사군(漢四郡) 한반도 존재설'만을 식민사관으로 여기거나 '웅장한 민족사'를 구상해야 한다는 '당위'에 젖어있는 경향 역시 지적해볼 수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과연 식민주의 역사학·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리고자 한다. 우선 그에 앞서 낙랑군이 만주지역에 위치했다는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살펴보자. 왜냐면 박근혜 정권시기부터 그들은 기성 고대사학계를 식민사학이라 공격하는 핵심 근거로 줄곧 이를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낙랑군 초원 4년 호구부'가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


한사군(漢四郡)은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고조선(위만조선)을 병탄한 뒤 설치한 군현으로 낙랑·현도·진번·임둔군을 말한다. 단, 이중 현도군은 위만조선 멸망 1년 후인 기원전 107년, 현재의 압록강 중류와 동해안 지역에 걸쳐 설치되었다. 하지만 진번군과 임둔군은 설치된 지 20여년 만에 폐지되어 제대로 운영조차 되지 않았고, 현도군 역시 토착 주민집단의 반격으로 인해 기원전 75년 요동방면으로 철수했다. 오직 낙랑군만이 서기 313년 고구려에 흡수될 때까지 존속했다. 그런 탓에 한사군 중에서도 낙랑군의 위치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그렇지만 일찍이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에 비정한바 있었고, 이후 일제 관학자(官學者)들은 평양 일대의 한계(漢系) 유적을 근거로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에 비정했다. 물론 일제 관학자들은 이를 두고 조선사의 타율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강조했다. 이에 맞서 민족주의 역사가들이나 해방 이후 북에서는 낙랑군을 요하 방면에 비정한 반면, 남쪽학계에서는 평양 일대의 고고학적 정황을 중시하여 낙랑군을 평양에 비정하는 대신, 그것이 현대의 식민지배와는 역사적 성격을 달리 하는 것임을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유물이 세간에 알려졌다. 바로 평양 정백동 364호 나무곽무덤(귀틀무덤)에서 출토된 '낙랑군 초원 4년 현별 호구부(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簿)'라는 목독(木牘)이다. 여기서 '초원'은 한나라 시기의 연호(年號)로 기원전 45년을 가리킨다. 따라서 말 그대로 기원전 45년 무렵 낙랑군 소속 25현의 개별 호구 증감 수치와 낙랑군 전체의 호구수를 집계하여 기록하고 있는 이 목독은, 본래 1990년대 초 평양시 낙랑구역 통일거리 공사과정에서 발굴되었지만, 2007년에야 북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손영종의 논문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어 2010년 관련 연구결과가 국내학계에 의해 단행본으로 나왔다.

현재 이 호구부는 낙랑군의 지배체제·주민구성 이해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 호구부가 평양에서 출토됨으로써 평양 일대의 수천 기에 달하는 중국계 고분, 유물들은 낙랑군 유적임이 사실상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낙랑군 위치 논쟁은 이제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이 '낙랑군 호구부'의 발굴 사실과 내용을 정말 알지 못했을까라는 점이다. 이미 관련 연구결과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큼 이들 역시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만일 낙랑군 호구부의 존재를 알고도 지난 2013년부터 박근혜 정권에 영합하여 국회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한 것이라면, 이는 이들이 학술 연구의 기본 요건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식민주의를 재생산하며 보수적 지배담론에 기여하는 사이비 역사학

이와 함께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의 오류 중 하나는, 역사학계가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그 자체를 두고 '식민사학'이라 규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학은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있었다. 또 흔히 일제 식민사학을 두고 정체성론·타율성론·지리적 결정론을 거론하지만, 이는 일제 식민사학의 형식논리였을 뿐, 그것의 근본적 문제는 다음 두 가지에 있었다.

하나는, '문명 간의 우열(優劣)'을 상정하는 식민주의적 세계관이다. 가령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 연구를 통해 조선사가 외부의 '선진문명'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타율성론을 펼치는 한편, 낙랑 유적에서 나타난 한(漢)나라 문화를 전 세계에 알려 '동양 문명'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활용하려 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 이를 통해 동양 고대문명과 서구 근대문명을 대등한 반열에 올려놓고, 그러한 동양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동양의 대표 주자'로서 '일본의 위상'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일본의 열등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오영찬의<낙랑군 연구> 참고)

결국 고대 한나라의 문화를 '서구 근대문명'에 빗댄 이러한 발상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이자, 문명을 '설정'하고, 문명 간 '우열(優劣)'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를 '우열'의 관점에서 규정하고 이에 기초해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상이야말로 전형적인 '식민주의'에 해당한다. 따라서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면 궁극적으로 식민주의 혹은 그것의 또 다른 표상인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아울러 식민주의는 최근 '근대(近代)'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점에서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대안 역시 함께 제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흔히 말하는 일제 식민사학의 근원적 극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낙랑군 만주위치설에만 집착하는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의 주장은, 오히려 일제 식민사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를 외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행태야말로 '식민주의 재생산'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들이 식민사관의 본질이자 핵심인 식민주의는 외면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근대화·산업화·성장·시장·선진화를 '문명'으로 여기게 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이주 노동자와 같은 특정 사회구성원에 대한 배제와 차별, 억압을 내면화한 동시에, 재벌과 같은 소수 독점집단의 비대화와 특권 장악이 장기간 지속되어왔다. 작금의 비정규직은 '우리 내부의 식민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와 함께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의 또 다른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국가권력에 예속된 역사학이었고, 국가권력을 위해 복무한 역사학이었다는 점이다. 기실 일제 식민사학은 당시 일본 제국의 예산을 받아 일본의 대외 침략구상에 충실했던 어용 역사학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을 두고 때로 '일제 관학자(官學者)'라 지칭하는 것이다.

사실 이점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보면 박근혜 정권 시기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의 태도야말로 일제 식민사학과 유사했다. 예컨대 2013년 12월과 2014년 7월 국회 동북아특위에 진술인으로 출석해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와 같은 대학 정치외교학과 남창희 교수는, 일제 식민사관인 '한사군 한반도 존재설'이 장래 중국에 의한 안보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한미일 안보협력체계 강화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중국의 역사팽창주의는 지역패권주의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이에 맞서 한일 간 전략적 협력을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그야말로 일제 식민사관 청산을 일본과의 협력, 구체적으로는 한미일 안보협력체계 강화로 수행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당시 국회회의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동북아특위 위원들 앞에서 끊임없이 중국경계론을 설파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런 기괴한 주장을 펼치고, 이들에게 발언 기회를 준 당시 새누리당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종래의 '냉전 질서'를 온존시켜 보수세력의 지배에 활용할 수 있는 역사 담론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국민통합'의 명목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전파하려는 데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환단고기류의 고대사 인식이 중국을 최대의 적으로 설정한 친일적 민족주의론에 입각해 있다는 지적을(박광용,'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역사비평>1990년 가을호 참조)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당시 동북아특위의 목표 중 하나는 "여야 정치권을 넘어 모든 국민들이 합의할 수 있는 주체적 사관에 기초한 역사서, 일명 국민역사책을 발간할 수 있는 활동"이었고, 2014년 연말에는 남경필 동북아특위 위원장이 그동안 특위에서 논의된 상고사 문제를 주축으로 국민통합을 목표로 한 한국사 발간에 착수해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통합 역사관"을 담을 것이라 밝혔다.

일찍이 항일해방투자이자 아나키스트 역사가였던 신채호가 "소위 정치는 강자(强者)의 행복을 증진하여 망한 나라의 약소 민중이 다시는 고개 들지 못하게 하는 그물이며, 소위 역사는 성공한자를 군주로 만들고 패배한 자는 도적으로 만들어 옳고 그름을 삼은 구렁"이라며('위학문(僞學問)의 폐해(弊害)', <단재 신채호 전집 7> 637쪽. 원문은 현대어에 맞게 글쓴이가 고침) 역사를 통렬히 회의한 것은, 역사가 강자의 지배에 동원되거나 정치권력과 결합하는 현실을 향해 날린 통렬한 질타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이라 공격하며 신채호를 동원하는 사이비 역사연구자들이야말로 신채호를 통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저는 개인적으로 도종환 의원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지명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역사관은 다양할 수 있으며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다만 사이비 역사학과 식민주의 역사학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향후 관련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사이비 역사학 #식민사학 #낙랑군 #도종환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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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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