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하고 오싹한 이곳, 죽어간 매춘 여성을 기리다

[영국여행①] 런던의 숨겨진 슬픈 여성 잔혹사-크로스본 가든

등록 2017.06.15 17:39수정 2017.06.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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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오베리 성당의 은총으로 나는 서더크의 거위로 태어났지
그곳의 주교님은 나에게 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 주셨지
뱅크사이드의 매음굴과 주점에서 나의 우아한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네
내가 숨겨진 문의 자물쇠를 따면 그 비밀스런 역사가 드러나지
난 당신을 강물에 빠트리고 나의 미스테리를 알려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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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p of Liberty' 옆엔 이런 슬픈 시가 씌여져 있다. ⓒ 최성희


신비스러우면서도 뭔가 슬프고 오싹한 느낌이 드는 이 시를 몇 번을 읽으면서도 처음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 4월 런던 시내를 유람하던 어느 날 오후 계획했던 관광지 몇 곳을 둘러보고 난 후, 시간이 남은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여행은 평소 가고 싶었던 곳을 방문하는 기쁨이 크지만 뜻밖의 사람 또는 장소와의 우연한 조우에서 느끼는 감흥도 크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길 건너편에 시선을 끄는 독특한 한 곳을 발견하고는 호기심 어린 맘으로 잠시 기웃거리다 발을 들여놓았다. 시내 중심가에서 그것도 첨단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주변 지역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로 혼자 고집스럽게 자리한 이 미스테리한 작은 공간, 그리고 안을 메운 기묘하고 오싹한 것들... 작은 쉼터 같기도 하고 어떤 주술적인 목적의 서양식 '사당' 같기도 한 이곳에서 난 내내 어슬렁거리며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입구엔 관련된 서적, 책자들이 놓여 있었지만 솔직히 좀, 지치고 피곤해서 그것들을 자세히 읽어볼 여력이 없었기에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하지만 귀국한 뒤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에 대한 궁금증이 지속되어 늦게마나 이곳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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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의 날개(The Goose Wing)를 상징하는 입구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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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들어서서 바라본 공터의 모습 ⓒ 최성희


사실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곳이라 처음엔 정확한 위치조차 몰랐는데, 알고보니 서더크 대성당(SouthWalk Cathedral)과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Shakespeare's Globe Theatre ) 근처 어디쯤이었다.

지도 : https://goo.gl/maps/KsUCvmfwUS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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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묻힌 영혼들을 위한 제단(The Shrine) ⓒ 최성희


암튼 이 기묘하고 오싹한 곳은 중세 시대에 이름 없이 죽어간 매춘 여성들의 넋을 기리고 그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기 위한 취지로 조성된 추모공원이었다.

'크로스 본(Cross bones)'이라 불리는 이곳은 원래 오랜 옛날부터 런던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슬럼가의 천민들이 묻히는 곳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윈체스터의 거위(Winchester Geese)'로 불린 이 지역 매춘 여성들의 비밀의 매장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들이 이렇게 불린 이유는 이 지역의 영주였던 '윈체스터 주교'와 긴밀한 거래가 있었기 때문인데, 원래 윤락업은 불법이지만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성당으로부터 암묵적인 승인을 받아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이런 거래는 무려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 오백 년 동안 지속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각종 병에 걸려 죽으면 그 시체들은 이곳에 아무 절차 없이 그대로 버려져 묻혔는데, 이는 그녀들의 존재가 세상에 들어날 것을 염려한 성당 측의 조치였다고 한다.

1853년 이곳이 폐쇄될 때까지 무려 15,000여 구의 시신이 묻혔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그 중 1990년 초 런던 지하철 쥬빌리 라인 확장공사 과정에서 148구의 유골이 발굴돼 일부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14,000여 구가 넘는 이름없는 주검들이 묻혀 있는 이 터가 재개발 될 처지가 되자, 이곳을 하나의 공식적인 추모공원으로 보존하려는 이들이 힘을 모아 꾸준히 서명운동이나 캠페인, 모금활동 등을 펼쳐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슬픈 이야기를 주제로 한 각종 퍼포먼스나 연극 등이 꾸준히 공연되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 방식의 '씻김굿'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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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rine at the Red Gates ⓒ 최성희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나라든지 가장 약자인 여성이나 어린아이들의 희생이 가장 크다. 우리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수백 년 전에 떠난 '낮은 자'들의 영혼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노력도 감동스럽다.

솔직히 한국 같으면 이런 터에 건물을 짓는 자체가 께름칙할 텐데 서구인들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튼 이들의 노력이 완전히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랜 세월이 흘러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영혼들이 이제는 모두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추후 제 개인 블로그 http://arinalife.tistory.com/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런던 #크로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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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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