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이름도 꽁꽁 감춘 묘비의 사연

'현대사의 그늘' 여순사건 찾아 떠난 답사 여행2

등록 2017.06.23 11:20수정 2017.06.2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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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 이순신의 그늘에 가려진 '반란의 고향' 여수

"뭐 볼 것이 남아있다고 험한 그곳엘 가려고 하니?"


지난 주말, 지인들과 함께 전남 여수, 구례 등지로 여순 사건 관련 답사를 간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리셨다. 어렸을지언정 참혹했던 광경을 직접 목격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그에 관해 철저히 입을 닫고 살아야 했던 모진 세월이 준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 험한 곳엘 왜 가니... 어머니의 만류

참고로, 전남 순천이 고향인 팔순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8.15 해방과 6.25 전쟁,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등을 모두 겪으신, 말 그대로 '움직이는 한국 현대사 교과서'다. 특히 극심한 좌우의 대립 속에 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여순 사건의 한복판에서 10대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당신의 꿈 많던 소녀 시절의 추억이라곤 오로지 한과 눈물뿐인 이유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서야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께는 큰형부가 되는 내 큰 이모부도 여순 사건의 와중에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그땐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며 가슴을 치셨다. 진압군을 피해 인근 지리산으로 몸을 숨겼다가 토벌 과정에서 숨졌거나, 6.25 전쟁 중에 월북했을 거라며, 여태 제사상 한 번 제대로 못 차렸다며 눈물을 훔치시곤 했다.

당신은 그런 사실을 자식들에게 지금껏 숨겨왔다. 그로부터 수십 년간 연좌제에 묶여 풍비박산이 난 이웃들을 숱하게 봐온 탓이다. 벙어리 냉가슴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온 당신에게 여순 사건은 지금까지도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공포의 기억이었던 것이다. 부러 현대사를 공부하겠다는 막내아들을 애써 말리신 것도, 여순 사건 답사 간다는 말에 깜짝 놀라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굳이 찾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지만, 외지인들이 여수나 순천, 구례 지역을 여행하며 여순 사건의 흔적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전국의 조그만 구멍가게조차 안내해주는 요즘 내비게이션도 여순 사건 관련 유적만큼은 단 한 곳도 검색할 수 없다. 기껏해야 '여순 사건 유족회 사무실' 정도를 알려줄 뿐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사건인데, 마치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듯 느껴지기까지 한다.

유족의 도움이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관련 시민단체의 안내 없이는 사실상 답사를 계획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하릴없이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여순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시나브로 멀어졌고, 도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유적들이 사라지거나 훼손되면서 기억에서 지워져 갔다. '빨갱이'로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낙인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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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팔마체육관 옆 여순사건 위령탑 여순사건 답사 참가자들이 위령탑 옆 소개글을 꼼꼼하게 읽고 있다. ⓒ 서부원


여수로 내려가는 도중 잠시 순천 팔마체육관에 들렀다. 지난 2006년 순천 유족회와 시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세운 여순 사건 위령탑이 실내체육관 옆 잔디밭에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진 지 무려 58년이나 지난 후인 데다 사건과 별 관련이 없는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진 것이라 해도, 그나마 번듯한 틀을 갖춘 위령탑 중에는 시기가 가장 앞선 것이다.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서 있지 않고, 주차된 자동차들이 입구를 막아서 위령탑이 언뜻 소외된 느낌이다. 더구나 체육관 옆에서 생뚱맞게 곁방살이를 하고 있어 무척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나 기웃거리는 운동복 차림 행인들의 모습에서 시민들 중 이곳에 여순 사건 위령탑이 세워져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심스러워졌다.

전남 동부의 시군 지역이 대개 그렇듯, 사실 순천 시내도 곳곳이 여순 사건의 유적지다. 여수를 순식간에 함락한 봉기군이 첫발을 내디딘 순천역과 전투가 벌어진 동천 주변, 진압군이 주둔했던 순천대학교와 인민재판과 학살이 자행된 시청 주변 등 꼽자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굳이 이 외진 곳까지 밀려난 이유는 뭘까.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데다 참혹했던 학살과 연좌제의 공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스멀거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희생자 이름까지 숨긴 묘비... 연좌제의 덫

3년 뒤인 2009년, 순천에 이어 여수의 만성리 해수욕장 근처에 조촐한 위령비가 세워졌다. 정면에 '여순 사건 희생자 위령비'라고 적힌 검은 빗돌 위에 기와지붕을 씌운 형태다. 워낙 크기가 작아 일행 중 한 명은 '비석이 아니라 차라리 숫돌'이라며 씁쓸해했다. 입구에 세워진 스테인리스로 된 안내판은 잡풀에 덮인 채 비스듬히 넘어져 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작아 볼품은 없지만, 여느 위령비와는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빗돌 뒷면 한가운데에 무심한 듯 음각된 점 6개가 눈에 띄는데, 교과서나 소설책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줄임표'다. 사건이 발생한 1948년 10월 19일부터 비가 세워진 2009년 10월 19일까지 61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채 아무 것도 밝혀진 바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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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만성리 형제묘 안내판 수백 명을 끌고 와 집단 학살한 만성리 학살터에 세워진 안내판들은 키 높이로 자란 잡풀에 덮여 반쯤 가려져 있다. 일행 중 한 명이 나서서 가지를 일부 쳐낸 모습이다. ⓒ 서부원


위령비가 세워진 곳도 수백 명이 끌려와 집단 학살된 곳이지만, 걸어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바로 옆 골짜기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행을 증언하는 현장이다. '형제묘'라고 이름 붙여진 곳으로,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유족들의 뜻을 담고 있다. 장작 위에 학살당한 시신을 겹겹이 쌓아 기름을 끼얹어 태웠던 자리로, 당시 시체 타는 냄새가 몇날며칠 이어졌다고 한다.

이곳 묘비에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곳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사연을 실명으로 비석 뒷면에 새겼지만, 알려지면 유족들이 피해를 당할까 두려워 스스로 덧씌워 버렸다는 것이다. '빨갱이'라는 낙인과 연좌제의 공포가 지금까지도 억울하다는 하소연조차 못하게 막고 있는 셈이다. 진실규명이 되는 날이라야 비로소 묘비가 원래의 제 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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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리 학살터에서 내려다 본 풍경 학살터 앞 옛 전라선 철길을 활용한 레일바이크는 여수의 대표적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 서부원


최근까지도 주민들이 통행을 꺼려하던 이곳 주변은 현재 여수의 내로라는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옛 전라선 철길을 활용한 레일바이크가 성업 중인데, 주말이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왕복 2차선의 접근 도로가 주차장이 될 정도다. 바로 곁이 민간인 학살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안 철길을 따라가며 남녘바다의 풍광을 만끽하는 관광객들의 얼굴은 마냥 밝기만 하다.

위령비가 세워진 주변은 시내 외곽의 후미진 곳이라 흔적이라도 남았지만, 시내의 경우엔 여순 사건을 떠올릴 만한 곳은 아예 사라지고 없다. 당시 상황을 증언할 어르신들이 다 떠나시고 나면 지금껏 유예된 진실규명조차 힘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은데, 사람들의 관심은 하루가 다르게 옅어져가고 있다. 늘 그렇듯 시간은 망각의 편이다.

당시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미명 아래 주민들을 집결시켜놓고 즉결 처분을 한 현 중앙초등학교와 서초등학교 운동장은 평화롭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하다. 교문 한쪽에 수줍은 듯 서 있는 안내판마저 없다면 이곳에서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하다. 봉기군이 여수 전 지역을 장악한 후 첫 인민재판이 열렸던 중앙동 로터리 부근의 안내판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흡사 버스 정류장 표지판으로 착각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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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유적지 안내 팻말 여순사건에 천착해온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유적지에 세운 안내팻말. 부역자 색출을 위해 주민들을 모아 즉결처분했던 옛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 교문 옆에 세워진 것이다. ⓒ 서부원


아이들의 배움터인 학교와 모든 대중교통이 거쳐 가는 도심의 로터리야 그렇다 쳐도, 여순 사건이 처음 발화된 14연대 주변은 의도적인 훼손이라 의심될 만큼 개발이 기억을 덮어버린 모양새다. 14연대가 있던 자리는 지금 굴지의 방위산업체가 들어서 있어 내비게이션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데면데면하게 서 있는 안내판만이 이곳이 역사의 현장임을 알려준다.

잘려나간 인공 활주로... 여순사건 유적지의 현실

본디 14연대 터는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을 대비해 만든 일본의 군 시설과 비행기 격납고가 있던 자리다. 바다를 향해 뻗은 콘크리트 활주로의 흔적이 그를 증명한다. 일제가 물러난 후 그곳에 14연대가 터를 잡았고, 제주 4.3 항쟁이 한창이던 그해 10월 19일 이승만 정부의 제주 무장대 토벌의 위한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반란의 태자리'인 셈이다.

언뜻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평평한 땅처럼 보이는 인공 활주로의 흔적은, 문외한의 눈으로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라는 내러티브에다 여순 사건까지 덧붙여졌으니 보존될 만도 한데, 어찌된 일인지 활주로는 4차선 아스팔트 도로에 덮인 채 목이 잘려나갔다. 여순 사건 유적지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수는 68주기인 지난 해에 와서야 여순 사건 추모행사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건이 최초 발화된 곳이면서도, 순천 등 다른 지역과는 달리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조례'조차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유족들과 관련 시민단체의 줄기찬 요구에도 시의회는 상위법 제정의 필요성 운운하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흔적을 없앤다고 기억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다. 한과 눈물의 트라우마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이제 지리산의 너른 품에 안긴 전남 구례를 찾아간다. 당시 오지 중의 오지였던 그곳도 여순 사건의 광풍을 피하진 못했다. 마을 자체가 불타 사라진 골짜기 마을엔 지금도 죽어간 이들의 피눈물이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
#여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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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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