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천국, 제 7회 서울 레코드 페어를 가다

등록 2017.06.22 11:11수정 2017.06.2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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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레코냥' ⓒ 이현파


음반을 파는 가게가 사라지고 있다. 서울 도심에 가도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이 아니면 음반을 살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전세계적으로도 음반 산업이 크게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 나라는 더욱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시대의 변화를 생각하면 당연한 상황이다. 그래도 새로 산 음반의 포장을 뜯는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섭할 뿐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LP 열풍'이 불고 있다. CD에게 주도권을 내 주었던 LP는 복고 열풍을 타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국 음반 산업 협회(RIAA)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미국의 LP 판매량은 1988년 이후 최고의 수치를 기록했다. 세계적인 팝스타들이 잇달아 자신의 음반을 LP 버전으로 발매했고, 뒤이어 빅뱅이나 아이유 같은 국내 가수들도 LP 앨범을 내놓았다. 트렌드에 밝은 현대카드도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 & Plastic)이라는 레코드 전문점을 열었다(그리고 문화예술계에서 골목상권을 침해한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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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레코드 페어 ⓒ 이현파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에서 열린 제 7회 서울 레코드 페어에 다녀왔다. 이 행사는 2012년부터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레코드 행사다. 행사가 개최된 서울혁신파크에 다다르자, 여기저기서 록 밴드 티셔츠가 그려진 옷들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음원의 시대에 '음반'을 사러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왠지 모를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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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언니네 이발관', 역시 '박재범' ⓒ 이현파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이 행사의 마스코트 '레코냥', 그리고 서울 레코드페어 한정반과 최초공개반 LP를 판매하는 부스였다. 두번째 달의 데뷔 앨범, 그리고 요즘 인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해경의 미니 앨범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살짝 늦은 점심을 먹고 햇빛이 쨍쨍한 낮 시간에 도착했는데, 언니네 이발관 1집과 박재범 & 기린의 <City Breeze>는 이미 품절이었다.

20년 전에 발매된 앨범이든, 작년에 나온 앨범이든 LP 버전으로 발매되는 것은 요즈음의 트렌드다. 중학교 때 즐겨 들었던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1,2집도 LP 버전으로 재발매되었다. 이미 CD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소장용으로 같은 앨범의 LP를 구입했다. 심지어 점점 잊히고 있었던 카세트테이프까지 만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시대 역행의 장(?)이라고 할 만했다.

필자가 군인 시절에도 휴가 때마다 방문했던 김밥 레코즈를 비롯, 드림 레코드, 서울 레코드, LP25, 제팬 레코드 등 다양한 레코드점들이 LP와 CD를 팔고 있었다. 영미권 인디 록 음반을 중심으로 내세우는 가게도 있었고, 클래식과 재즈 음반을 주로 판매하는 가게도 있었다. 똑같이 '레코드'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가게마다 판이하게 다른 주인장의 음악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주인장들은 손님들에게 풍부한 음악적 식견을 뽐내기도 했다. 음반의 시대였던 8,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풍경들을 매일 볼 수 있었을 것만 같다.

필자 : 우와! 라스트 쉐도우 퍼펫츠(The Last Shadow Puppets) 앨범도 있네요? 우리 나라에서 보기 힘든건데...
주인장 : 네~ 이 밴드는 작년에 2집도 나왔죠.


필자는 매닉 스트리트 프리쳐스의 명반 <The Holy Bible>과 맥스웰의 <Maxwell`s Urban Hang Suite>, 스미스의 데뷔 앨범 <The Smiths>를 구매했다. 예전부터 사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작품들을 이렇게 싸게 살 줄이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음반들을 뒤져 보다가 좋아하는 음반을 찾는 일은 소소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필자와 함께 한 지인은 얼마 전 타계한 레너드 코헨의 명반 <I'm Your Man>을 단돈 오천 원에 구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LP를 고르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 루프탑에서는 스위트피(델리스파이스 김민규)와 신해경의 공연이 이어졌다. 공간의 한계 상 사운드가 온전히 구현되기 힘들었고, 햇빛이 너무 강해 눈을 뜨고 있기 힘든 상황이었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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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쇼핑 ⓒ 이현파


당신에게 스마트폰이 있다면, 스트리밍 애플리케이션이 있다면 원하는 음악은 무엇이든지 들을 수 있다. CD나 LP 같은 저장 매체는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이에 비할 것이 되지 못한다. 부피도 나름 커서, 적지 않은 공간을 차지한다.

그 모든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음반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편리한 시대에 음반이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아이돌 팬덤의 역할도 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음반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음악을 내 손에 붙들어 놓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뜬금없는 LP 열풍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적어도 서울 레코드 페어에 모인 사람들은 소장의 가치에 공감한다. '나를 설레게 하는 음반'이라면 합당한 가치를 주고 살 준비가 되어 있다. '왜 돈 주고 그걸 사냐'라는 말을 듣더라도, 결코 굴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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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아이즈, 박효신, 정은지, 이소라, 딥플로우의 LP ⓒ 이현파


레코드 페어에는 별다른 입장료가 없었다. 누구나 입장할 수 있었다. 다만, 이 행사에 만족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넣을 수 있는 모금함이 준비되어 있었다. 앨범 가격을 고객의 선택에 맡긴 라디오헤드의 앨범이 생각나기도 했다. 넌지시 고개를 들고 모금함 속을 훑어 보았다. 5천 원권, 만 원권이 꽤 쌓여 있었다.

가수 이승환은 3년 전 <라디오 스타>에서 '음악이 이동 통신사의 하위 카테고리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다'며 하소연했다. 그의 말처럼 음악은 누군가에게 단지 액세서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음악은 간절한 구원이 되기도 한다. '구원'이라는 낱말이 너무 거창하고 촌스럽다면, 무더위를 뚫고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되지 않을까. 필자가 지난 주말 서울 레코드 페어로 달려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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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는 우리 마음에 달렸다. ⓒ 이현파


#서울레코드페어 #레코드 #음반 #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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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과 공연,영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스물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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