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으로 독재자 머리통 내리쳐야"

[이 사람, 10만인] 조계종 승적 박탈당한 명진 스님 ③ 깨달음에 대하여

등록 2017.06.23 10:58수정 2017.06.2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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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종교·문화·학술·시민사회계 원로 40여 명은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명진 스님의 승적을 박탈한 조계종 총무원의 징계 조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명진 스님이 지나온 삶을 조명하는 5편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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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 별채 통유리 밖 풍경. ⓒ 김병기


휘파람새와 소쩍새가 울어댔다. 스마트폰을 켜니 새벽 3시 30분. 명진 스님(전 봉은사 주지)과의 야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 누운 지 3시간 지났다. 통유리로 된 창 밖은 캄캄했다. 눈을 감아도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벌써 일어났어요?"

두 평 남짓한 법당

새벽 4시 30분경, 창 밖이 어슴푸레해지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니 월악산 보광암 법당 앞에 앉아 있던 스님이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찬 새벽 기운이 가득한 월악산 자락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혼자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흙벽 안에서 잤다. 두 평 남짓한 법당에 부처님을 모셔뒀고, 그 앞 미닫이문을 닫으면 한 평 공간이 그의 잠자리였다.

보광암은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신륵사에서 산길을 올라 해발 500m에 있다. 뒤쪽은 월악산에서 가장 험한 공룡능선이 펼쳐 있다. 멸종위기동물 1종, 천연기념물 217호 산양의 서식처. 산양이 가끔 암자로 내려와 물을 먹고 갈 때 눈을 마주친단다. 날 밝으면 공룡능선 끝에 월악산 영봉이 불끈 솟겠다. 한두 달 지나면 '푸세식 화장실' 앞 커다란 먹배 나무에 흰 꽃이 흐드러지겠다.
  
새벽 산길을 걸었다. 기습적으로 얼굴을 덮치는 거미줄을 떼어냈다. 밤새워 쉬지 않고 작업을 했을 거미에게 미안했다. 암자로 돌아오니 별채에 차린 상 위에 살짝 데친 두릅과 고추장, 고추 장조림, 김이 올랐다. 명진 스님은 호박과 두부가 들어간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은 뒤, 물의 온도를 재면서 직접 커피를 우렸다.   
   
"이거 한 잔 먹고 시작하자고요."

법당 마당에 커다란 천막 4동을 세우고, 사람들이 앉아서 법문을 듣도록 은박 스티로폼 자리를 깔았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와 흙이 먼저 올라와 앉았다. 야외 법당 바닥을 비로 쓸고 물걸레로 두어 번 닦았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법당 앞쪽 나무 계단은 허물어져서 손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암자 마당에 햇살이 가득 찼다. 오전 9시가 되자 산길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마당을 채웠다. 체온도 돌았다. 명진 스님은 암자로 올라온 아이들부터 맞았다. 가슴으로 안다가 그것도 시원치 않은지 무릎에 올려놓고 눈을 맞췄다.


지난 5월 3일,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은 여느 절과 달랐다. 법당 규모도 그랬지만, 멀리서 교통이 불편한 곳을 찾는 얼굴부터 달랐다. 불교 신도만이 아니었다. 천주교 신부와 기독교 목사도 왔다. 다영, 창현, 민성, 민정이 아빠... 세월호와 용산참사 유가족도 왔다. 사회단체 인사와 언론인도 참석했다. 이들의 얼굴에서 명진 스님 삶의 궤적을 읽었다.   

부처님 우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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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 명진 스님. ⓒ 김병기


명진 스님은 신륵사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보광암에 오르던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거나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한마디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고 스님, 자승(조계종 총무원장)한테 쫓겨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조계종으로부터 제적당했는데, 중들은 전화를 하지 않네요. 대신 신부, 목사님들이 '축하한다'고 전화를 합디다. 정상적인 조직이 아니라 엉망진창인 조직에서 징계를 받았으니 훌륭한 분이라는 겁니다. 안 믿어지나요? 이건 거의 진실에 가까운 이야깁니다. 하-하-하-."

산골짝 암자 야외 법당에 150여명이 모였다. 명진 스님의 법문은 다른 법당처럼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수시로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시작부터 달랐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라 부처님 우신 날입니다. 서울에서 연등 축제가 벌어졌죠. 종로통을 막고 각양각색 등을 밝히며 축하했는데... 연등축제의 연자는 연꽃 연, 등불 등이 아니라 태울 연, 등불 등입니다. 내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거죠. 등은 인간이 가진 욕망과 집착, 그 속에서 용솟음치는 번뇌를 태우는 겁니다.(중략)

그런데 우리는 불나방처럼 욕망의 불빛이 자기 날개와 몸을 태우는 줄 모르고 권력과 돈을 향해 덤비고 있죠. 대통령 될 욕심을 채우려던 '503번 박근혜', 펑펑 쓰고도 남을 돈을 가지고 더 욕심을 부리다 패가망신한 최순실... 지금도 503번은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엮여서 감옥에 왔다고 땅을 치고 있을 겁니다.(웃음) 우리 안에도 그들이 앉아 있죠. 그래서 부처님이 우시는 것이고, 어둠을 밝히려면 종로통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등을 켜야 합니다."

쇠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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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 흙집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는 명진 스님. ⓒ 김병기


그날, 산나물이 가득한 비빔밥을 먹고 명진 스님 차에 오르기 전에 트렁크 속을 보니 등산화와 1인용 텐트, 코펠... 언제든 산에 오르거나 노숙할 장비로 가득 찼다.

- 아니, 무슨 짐을 이렇게 싣고 다니십니까?
"걸망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지요? 이건 내 쇠걸망입니다. 하-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란 불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는 서울로 향하는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노트북을 켠 뒤 독수리 타법으로 인터뷰 모드에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명진 스님의 근황이었고, 다음부터는 스님의 이야기 1-2편에 이어지는 글이다.

[깨달음에 대하여 1] 독일에 간 '갱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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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일정을 마치고 유럽여행을 다니는 명진스님. ⓒ 명진스님


"개운사 신도들은 저를 '갱이 스님'으로 불렀어요. 민망하니까 앞 글자 '빨'을 뺐죠. 제가 주지로 올 때 '운동권 스님이 왔다'면서 주지 교체 항의 시위를 벌였어요. 주지를 그만둘 때에도 개운사 앞마당을 돌며 시위했죠. 사퇴를 말리는 데모였습니다. 그놈의 인기란... 하-하."

개운사에서 나온 그는 88년 4월 초에 대승불교승가회를 발족시켰다. 87년 대선 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분열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거기서 얻은 뼈저린 교훈 때문이었다.

"조영래 변호사가 연세대에서 열린 후보 단일화 촉구 집회 때 마이크를 잡으라고 요청했어요. 저는 김영삼은 죽어도 양보를 안 할 것 같고 민족 문제나 한반도 분단 현실 등에 대한 고뇌를 더 깊이 한 DJ가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봤습니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많았습니다. 가택연금이 해제됐을 때 첫 강연을 개운사에서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마이크를 잡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지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연설을 했단다.

"어린 아이를 놓고 싸우는 두 여인을 보고 솔로몬왕은 서로 잡아당겨서 이기는 여자를 친엄마로 인정하겠다고 했죠. 둘이 잡아끌다가 아이가 아파하니까 한 여인이 손을 놓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여인을 친엄마로 인정했습니다. 민주화라는 아이가 탄생하는 즈음에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 중 한 명이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부처님처럼 존경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보 두 명이 모두 선거에 나오면서 우리 사회가 반세기 정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면서 "그 뒤 운동권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비판적 지지 세력과 후보단일화 세력으로 양분됐고 불교 운동판도 갈라졌다"고 말했다.

당시 비판적 지지 세력과 함께하는 불교단체로 정토구현전국승가회가 있었다. 명진 스님은 사회과학이 아니라 불교적 관점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대승불교승가회를 출범시켰고,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단체를 띄우자마자 그해 4월 말에 문학평론가 염무웅씨의 제안으로 그는 독일에 갔다.
 
"아니, 명진 스님 아녀요?"

싼 비행기를 이용한다고 태국 에어포트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뒤 타이항공으로 갈아타는 데 소설가 황석영씨를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독일 공항에 내렸는데, 염 선생이 부탁한 명진 스님 길잡이(재독민주화운동연합회 인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차를 계산하지 못해서 뒤늦게 나오는 바람에 길이 어긋났단다. 

"스님, 그냥 우리랑 다니시죠."

황 작가가 제안했고 명진 스님은 동행했다. 재유럽 교민들이 진행하는 5.18 기념 행사장에도 따라갔다.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간 교민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의 무명 승복과 밀짚모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단다. 고향에서 부모님 손잡고 절에 갔던 기억이 향수를 자극한 것이다.

"그때 사회자가 갑자기 마이크를 주면서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법당에서만 치는 목탁이 아니라 독재자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목탁으로 바꿔야 합니다'라고 말했더니 참석자들이 자지러지더군요. 하-하-. '전국 투어'를 해달랍디다. 그 뒤부터 교민들이 저를 택배처럼 배달했습니다. 보쿰,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열차를 태워서 보내면 2~3일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만났다. '운동권 스님'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적인 고뇌가 국내 사회 정치 영역으로 확장됐고, 독일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는 분단과 민족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교민사회에서 민족의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개인의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인으로서 민족 분단에서 파생된 갈등과 증오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었죠. 당시 천주교와 기독교는 독재 권력에 맞서며 저항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원초적 문제인 분단 질곡을 해결하는데 불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결심했죠." 

그는 귀국한 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위원회 본부장을 맡았고, <민족21> 발행인을 하면서 통일운동을 했다.
 
[깨달음에 대하여 2] 봉암사 옥석대에서의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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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은 젊은 시절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섰다. ⓒ 명진스님


대승불교승가회는 그가 독일에 간 사이 큰일을 저질렀다. 폭력을 동원해 강남 봉은사를 접수했다. 그가 귀국해서 주모자를 제적시켰지만, 이미 기운 달이었다. 91년에 해산했다. 그는 걸망을 지고 길을 떠났다. '스님 오백 명이 살지 않으면 도적 오백 명이 살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기가 센 경북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 선방으로 들어갔다.  

봉암사에서 점심 공양을 마치고 차를 먹는 다실 앞을 지나다가 그는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명진인가 하는 그 사람은 운동권도 했다가 선방에서 공부하는 척도 하다가... 수좌도 아니고 사판승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대체 뭐여?"

그날부터 그는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단다. '나는 누굴까?'에 대한 물음을 온몸에 채웠다. 1~2시간씩 잠을 잤는데도, 정신이 초롱초롱했단다. 누워도 잠이 안 오고, 밥 먹을 때도 간절한 물음으로 누가 먹는지도 몰랐단다. 한 달간 용맹정진 하다가 밤에 혼자 봉암사 마애불이 조각된 옥석대까지 포행(산책)을 하고 내려오는데 세상이 확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음력 11월 12일이었을 겁니다. 달이 휘영청 밝았죠. '허공은 형상이 없다. 삼라만상도 다 허공에서 일어난 변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지나가지만 허공에 흔적이 없다. 허공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천년 물에 씻긴 바위 모습은 더 뚜렷하다. 마음이 허공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이다. 더 이상 구할 것도 깨달을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깨달았다고 생각한 그는 89년 11월에 걸망을 쌌다. 수경 스님이 택시를 부르고 봉암사 홍문정까지 배웅을 했다. 수경 스님은 '다른 데 가지 말고 송담 스님에게 가라'고 이르면서 엄청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지금 기분이 워뗘?'라고 물었단다.

"저 하늘에서 비추는 달빛은 만상을 비추는데 달빛이 어디는 비추고 어디는 비추지 않겠다는 허물이 있겠는가? 환하고 어두운 것은 사물의 경계일 뿐이지. 진리는 환하게 모든 것을 비추는데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야."

명진 스님은 수안보의 작은 모텔에 짐을 풀었다. 그날 오후 9시 뉴스를 보면서 자기가 깨달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단다.

"제가 약간 바뀌긴 했죠. 깨달은 게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조금 안 것뿐이었어요. 당시 저처럼 사물을 보는 관점이 약간 달라진 것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착각하면서 설치다가 망하는 수행자가 많습니다. 그 뒤부터 깨달음의 함정에 빠져 공부를 포기하죠.

산을 올라가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밑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개울, 빨간 기와집도 보이겠죠. 멈추지 말고 나가야 합니다.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보물을 찾아가다가 뒤돌아서면 돌로 변하는 대목이 있죠. 뒤를 돌아보면 산에 오르기 전과 다른 견해가 생깁니다. 다른 게 보이니 신기하겠죠. 그럼 고정관념이 생기고 갇힙니다. 당시 으스대던 저는 아마 2부, 3부 능선쯤?"

깨달았다고 느낀 그는 '센 스님'을 향해 칼을 들이댔다. 상대를 베든, 아니면 자기가 베이든 모두 배움의 길이라고 생각했단다. 당대 불교 최고봉인 성철 큰 스님과의 법거량(法擧揚. 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을 해보겠다고 벼르고 별렀다. 하지만 성철 스님과 법거량을 할 기회를 놓쳤다. 그는 다른 스님들과 겨루었다. '스님은 사춘기'(이솔 출판)에 있는 한 대목만 인용해 재구성하면 이런 식이었다.

"성철 대가리 터지는 소리, 법전 창시구 터지는 소리"

"해인사에서의 결재 해제법문을 성철 스님 대신 법전 스님이 했다. 법문을 시작하자마자 명진 스님이 삼배를 올리고 여쭈었다.

-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법을 세 번 전하셨습니다. 한 번만 전해도 되는데 왜 세 번을 전했습니까?
'그런 것은 방장 스님(성철 스님)에게 물어 봐.'

- 만약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면 법상에 올려 보낸 성철 스님도 대갈통이 깨지고 법상에 올라가란다고 올라간 스님도 창시구가 끊어집니다. 대답을 하십시오.

스님은 묵묵히 앉아 계셨다.

'성철이 대가리 터지는 소리, 법전이 창시구 터지는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왔다. 나도 누구에게 그렇게 당할지 모른다. 어느 보살에게 당할지 어느 사미에게 당할지 모른다. 순간순간 들어오는 칼날과 공격을 막아내려면 항상 긴장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불법은 자비 속에 서릿발 같은 칼날이 숨겨져 있고 그 칼날 속에 또한 자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스님은 사춘기. 194~196쪽)

[깨달음에 대하여 3] 힘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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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절 명진스님. ⓒ 명진스님


얼마 전 한 모임이 그를 초청했다. 그 자리에 갔더니 세계 챔피언 3~4명이 앉아 있더란다. 마라톤선수 황영조씨, 프로권투 챔피언 김지원씨, 가수 전인권씨 등. 한 마디 해달라고 해서 이렇게 말했단다.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죠. 가수 전인권씨도 목에서 완전히 힘을 빼야 자유자재로 음이 나옵니다. 힘이 빠져야 부드러워지고, 순발력도 나옵니다. 골프 같은 운동도 몸에서 힘을 빼야 순간적으로 파워가 나오고 정확한 방향으로 공이 날아갑니다. 평상시 힘이 들어간 사람은 막상 힘을 쓸 때 힘을 줄 수가 없어요. 인생에서도 힘을 빼야 합니다. 부처님도 완벽하게 마음의 힘을 뺀 분입니다. 예수님도 힘이 빠졌기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모두 다 힘을 뺀 자들이죠. 여러분도 힘을 빼세요."

다음에 그 모임을 또 갖기로 했는데, 카톡방 이름을 '힘빼자'라고 지었단다. 

그는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수영으로 알았단다. 명진 스님은 1991년경, 봉암사에서 나온 뒤에 서울 남산의 한 집에 머물렀다.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면서 사회단체 인사들과 교류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미친 듯이 수영을 배웠습니다. 한강을 건너겠다는 생각으로 팔당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물 속에 뛰어들었어요. 어렵지 않았습니다. 뿌듯해 하면서 차 쪽으로 걸어가는 데 경찰차가 가로막았습니다. 새벽에 머리 깎은 사람이 팬티만 걸치고 물안경을 낀 채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신고했나 봅니다. 차 안의 승복을 보여주고 누명을 벗었습니다. 하-하-."

그는 "물 위에 누워서 잠을 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면서 "수영을 할 때 힘을 완전히 빼면 물에 뜨고 그 뒤에 천천히 나아가면 힘을 들이지 않고 수영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참선 수행에 적용을 했다.

"참선 공부도 마음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없애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정보,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알 수 없는 물음을 끝없이 되풀이하면 '안다'는 생각이 지워지고 '모름'만 남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한국 근대 선종의 끊어진 맥을 이은 경허 스님이 '참선곡'에서 설한 구절을 인용했다.

'어미 닭이 알 품듯이, 고양이가 쥐 잡듯이.'

물음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면 공적영지(空寂靈知)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공적'은 텅 비어서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영지'는 신령스러운 지혜가 샘솟는 것을 뜻합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와 같은 경지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묘한 게 나타나죠. 자기를 탁 놓아버린 그 자리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종단개혁에 나서다] 원로스님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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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이 1994년 조계사에서 열린 행사에서 종단개혁을 주장하면서 가사를 벗어 원로 스님들에게 바치는 장면. ⓒ 유튜브 화면 캡쳐


그는 1994년 3월 봉암사에서 용맹정진을 했다. 수좌 32명을 그가 모았다. 21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앉아서 수행하기로 결의했다. 2주 뒤에 서울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당시 개혁파 스님들이 총무원장이었던 의현 스님이 3선에 나서는 것을 막는 싸움을 시작했는데,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당초 계획대로 21일 채운 뒤 4월에 종단개혁 대열에 섰다.

"그때만 해도 수좌들의 정의감이 살아 있었습니다. 서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죠. 2000명이 모인 조계사에서 제가 대중연설을 했습니다. 연단에 오르면서 고민했던 것은 총무원장을 끌어내리기 전까지 스님들을 조계사에 묶어두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행사 끝나고 각자 지방으로 내려가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죠. 나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종단 개혁이 안 된다면 승복을 벗고 절 집안을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가사를 벗어 가지런히 갠 다음, 원로 스님들 앞에 내려놓았다"면서 "절을 하고 일어서는데 원로 스님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고 비구니 스님들이 흐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종단개혁이 성공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단다. 실제로 전국에서 몰려온 스님들은 자기 돈으로 여관을 잡고 4월 12일 총무원 청사를 접수할 때까지 함께했다. 그는 당시 종단개혁 상임위원으로 활동을 했는데, 사표를 썼다. 개혁 스님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개혁종단이 출범할 때 종회의원(조계종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4편에는 봉은사 주지 시절 천일기도를 하면서 이명박 정부에 죽비소리를 내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명진 스님 1편-나를 찾는 길] "성철스님과 맞장 뜨려고 백련암 올라갔죠"
[명진 스님 2편-운동권 스님] "소머리 대신 스님 머리 삶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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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 #조계종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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