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보수', 자유한국당을 위한 고전 인성 특강

'보수' 이전에 '인간'으로 거듭나는 길

등록 2017.06.23 10:16수정 2017.06.2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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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옛 고전 속 일화 한 토막

<통감절요(統監節要)>라는 고전이 있다. 송나라 시기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축약해놓은 책이다. 이 책은 예전 우리 선인들에게 필독서이자 스테디셀러였다. 비록 우리 역사가 아닌 중국 역사를 담은 책이고 오늘날에는 거의 읽는 사람들이 없지만, 사람 사는 사회는 어느 곳이나 비슷한 만큼 읽다보면 오늘 우리의 정치와 사회·인간 군상이 연상되며 미소가 떠오를 때가 많다.

<통감절요(統監節要)>에 묘사된 중국의 후한(後漢) 말기, 그러니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시대가 개막되기 이전 시대는 혼란의 시대였다. 지극히 사사롭고 탐욕으로 가득 찬 환관과 외척들은 권력을 전횡하며 부패의 늪에 빠졌다. 때로는 황제가 직접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정윤회 문건사건' 당시 세간에 회자된 '십상시' 역시 바로 이 무렵 등장했다. 그들은 직언하는 개혁세력을 숙청하며 언로를 틀어막았다. 또 환관들은 황위에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이를 즉위시키기도 했다. 권력유지를 위해선 무능한 황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지난 몇 년간 우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지 않는가?

이처럼 정치의 난맥상이 지속되던 후한은 끝내 분열시대로 접어들어 요동지역에선 공손도(公孫度)가 자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때 공손도에게 의탁한 인물 중 왕렬(王烈)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왕렬은 학문의 기량과 덕망이 높아 교육에 유능하였고, 이에 고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고을에 소도둑이 있었는데 주인이 그를 잡았다. 도둑이 죄를 청하며 말하기를 "제가 형벌은 달게 받겠습니다만, 엎드려 빌건대 왕렬 선생께서 제가 소를 훔친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왕렬이 어찌어찌하여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사람을 시켜 소도둑에게 사례하도록 하고 베 한 단을 보냈다. 고을 사람들이 왕렬에게 그 이유를 묻자 왕렬은 이렇게 답하였다. "도둑이 자신의 허물이 내게 알려지 는 것을 두려워함은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치악지심(恥惡之心)] 때문이니 이미 악을 부끄러워 할 줄 안다면 장차 선한 마음 역시 자라날 것일 만큼 그에게 포를 주어 선을 행하도록 권하려는 것이오." 뒤에 어떤 늙은이가 길에서 칼을 잃었는데 길 가던 행인이 그 칼을 주워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보관하였다. 저녁쯤 늙은이가 잃어버린 칼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그 행인이 보관한 덕분에 찾을 수 있었다. 왕렬이 이 소식을 듣고 그 행인을 찾게 하였다. 그런데 그 행인은 바로 예전의 소도둑이었다. (<통감절요>권22)

이 일화의 소도둑은 비록 소를 훔쳤지만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자기 행위를 도덕적으로 분별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왕렬의 말처럼 그는 뒷날 선한 마음을 키워 도덕적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렇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갈림길은 그러한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개선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맹자의 사단(四端)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 중 '수오지심(羞惡之心, 악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을 두고 '의(義)'의 단초라 말했다. 즉, 정의롭고 대의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인간의 자질은, 수오지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면 '인간'이 아니며, 정의로울 수도 없다. 그것은 도덕불감증에 빠져 개과천선의 여지조차 없는 아노미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무엇보다 수기(修己)를 강조했다. 자신의 인성을 닦아 인격의 도야를 이룬 뒤에야 비로소 치인(治人)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 증세 :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새 정부 출범 이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행태를 보면, 선거·대의제·의회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위협하며 정치파탄으로 돌진하고 있다. 모든 국회 상임위는 중단한 채 관례적으로 여당이 맡아오던 국회 운영위원장 자리를 내놓지 않고, 인사·정부조직법뿐만 아니라 추경과 같은 민생현안까지 비협조로 일관하며 정부 여당과의 대화를 일체 거부하고 있다. 정권교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시민들이 문자메시지로 항의하자 이제는 시민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다.

여기에 막말도 이어진다. 지난 6월 15일, 자유한국당 강동호 서울시당 위원장은 당의 공식행사 자리에서 "상대는 아주 나쁜 놈이기 때문에, 깡패 같은 놈이다. … 문재인이가 청와대 전세 내서 일을 시작했는데, 적폐 청산이라고 해서 정치보복을 시작했다. 친북하는, 종북하는 문재인은 우리 보수, 우리 주류세력을 죽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나흘 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의 대표 후보로 나온 이철우·홍준표 의원은 하루 간격으로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안 갈 것 같다", "주사파 정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탄핵을 암시해 논란이 됐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에는 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인 김정재 의원이 20일 "오늘은 조국(청와대 민정수석) 조지면서 떠드는 날"이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됐다.

이제 출범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고, 뚜렷한 불법이나 실정이 없는 정권을 향해 탄핵을 선동하는 행태는, 실상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내란선동'과 다름없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현 정권을 "조져서" 적폐청산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차기 권력을 탈환하겠다는 저열한 욕망과 저주어린 광기만 가득하다. 그 어떤 정당성도, 명분도, 대의도, 이상도 없는 정치 행태다. 일찍이 간디는 인간의 7개 죄악을 꼽으며 '이상을 결여한 정치'를 첫째로 꼽았다. 이상을 결여한 정치야말로 인간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가장 심대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 자유한국당은 왜 조기대선을 치르게 됐는지에 대한 상황 인식조차 전혀 없다. 지난 9년간 집권 여당으로서, 연인원 1700만의 국민들이 겨울 추위 속에 광장과 도심 도로의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에 나앉아 "이게 나라냐?"를 외치게 한 장본인들이지만,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내 이명박-박근혜 경선을 거치며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이 사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감춘 점에 대해 국민들 앞에 일말의 사죄나 해명도 없다.

국정농단 사태뿐만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자신들의 집권 기간 일어난 4대강 사업·민간인 사찰·용산참사·자원외교 비리·방산비리·국가기관 선거개입·세월호 참사·정윤회 문건사건·메르스 사태 등 국민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아파하거나 분노한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사죄하거나 책임진 사례가 지금까지 전무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실정과 비리를 덮기 위해 검찰과 미디어를 동원해 물타기나 프레임 전환, 안보몰이를 시도하며 공포 분위기나 정치 혐오 정서를 조장하는 음모 정치만을 자행해왔다. 여기에 성추문과 막말, 부정부패·비리는 그들의 단골 소재였다.

기실 유권자들의 눈높이에서 볼 때는 자유한국당이 대선 후보를 낸 것 역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이들은 의회·미디어·자본권력을 토대로 여전히 건재하며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 특히 그들이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두고 5·18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측 버스기사였던 배용주씨에게 사형을 판결했다며 공격하거나, 여당을 향해 언론장악 저지 TF를 구성하고 근래 '언론 부역자 명단'을 발표하고 있는 언론노조를 공격한 일들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자유한국당 강동호 서울시당 위원장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듯 오로지 자신들이 보수이며 이 땅의 주류여야 한다는 사고방식만이 팽배해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도 이 땅의 주류로 군림한다면, 우리 시민들은 얼마나 불행해질 것이며, 얼마나 수치스러울 것인가?

3. 진단 : 한국 보수 세력 권력상실 공포증의 역사적 배경

대체 우리 보수는 왜 이런 수준인 것일까? 우선 태생적 역사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잘 알다시피 한국의 보수(또는 주류 기득권) 세력은 친일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방 후 이 땅을 점령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그대로 중용했다. 물론 항일해방투쟁 과정에서 좌우대립이 있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우파 계열의 독립투사들마저 정치에서 배제했다. 문제는, 친일파들이 단순히 사회의 주류로 재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독립투사들을 암살·고문·투옥·학살한 사실에 있다.

예컨대 김구 암살의 경우 그 배후에 채병덕, 장은산, 전봉덕, 김창룡 등 친일경찰·친일군인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암살자 안두희 역시 일제의 밀정이었다고 한다. 또 한국전쟁 시기 보도연맹원 학살 과정에선, 일제시기 지방에서 농민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나섰던 인사들이 대부분 학살당했다. 이런 속에서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사회정의나 국가 기강·인본주의와는 상극일 수밖에 없었고, 도덕적 파탄에 빠지기 쉬웠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부정부패, 민중탄압과 연관되어 있었고, '부끄러움'에 대한 초보적 감수성조차 갖추지 못했다. 대의는커녕 어떻게든 '권력만 유지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의식으로 무장했을 따름이었다. 더욱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4월 민중혁명의 공간을 뒤엎고 장기 독재를 자행하면서 이런 상황은 수십 년간 지속됐다.

이와 함께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환경 역시 지적해볼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과 한국을 점령한 미국은, 한국에선 친일파들을 재등장시켰다면, 일본에선 침략전쟁의 전범들을 다시 복귀시켜주었다. 이들을 냉전에 활용하기 위한 의도였다. 한마디로 한국과 일본의 보수 세력은 미국이라는 외세와 냉전체제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양육되고 지속돼 온 것이다. 무반성·무책임·인간의식의 실종이라는 측면에서 한일 보수 세력이 닮아있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유독 동아시아에서는 남북분단과 미중 대결구도에 의해 여전히 냉전적 구도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적 환경에 더해 한국의 보수 세력은 미디어 환경의 안온함 속에 안주하면서 자정(自淨) 기회를 상실해왔다. 또 이들은 여태까지 권력을 '선용'해본 경험이 전무하다. 오직 이승만 정권 이래 권력을 악용해온 통치술에 익숙해져 그것이 화석처럼 몸에 배어있을 뿐이다.

정리하자면, 한국 보수 세력은 민중 속에 굳게 뿌리내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외생적 요인에 안주하며 주류 기득권의 위치를 점령해왔고, 이로 인해 권력 상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병적 수준에 이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4. 처방 : 고전과 인문학 학습을 통한 인성 함양

지금 자유한국당에 필요한 것은 야당으로서의 존재감 입증이 아니라 권력상실에 따른 공포증 치료가 우선이다. 이들의 공포증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다음 총선 때까지 국회 마비상태는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공포증은 어떻게 치료될 수 있는가? 아마 인성 함양을 위한 고전 및 인문학 학습만큼 빠른 처방이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알고, 인간을 사랑하고 공감할 줄 알며, 진실에 의거한 발언을 하고,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알며, 보편적 가치를 체화한 주체로 거듭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자유한국당은 '수오지심'을 배우고, 인간의 가치와 도덕성을 고민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지금 우리 보수는 '합리적 보수'를 운운하기에 앞서 '인격을 갖춘 보수'로 거듭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만일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길밖에 없다.

기실 보수나 주류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는 자세가 없고, 보편적 가치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면, 보수가 무슨 소용이 있고, 주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보수가 인간의 가치에 뿌리박지 못한 채 보수를 추구한다면, 결국 날것 그대로의 추한 사욕 외에 남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자유한국당 #인성 함양 #고전 #친일파 #수오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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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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