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먹는 밥은 '피밥', 그리고 미안하다"

마산 표성배 시인 시산문집 <미안하다> 펴내 ... 읽는 독자도 '미안함'

등록 2017.06.23 09:45수정 2017.06.2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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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눈 뜨면 다가와 있는 이 아침이,/오늘, 이 아침이 미안하다/공장 기계들 이른 아침을 깨우는/햇살이 퍼진다/너와 나 사이 골고루 퍼진다/어제 동료 앞에/햇살 그 푸근함을 말하는/내 입이 거칠구나/공장 야외 작업장을 터벅터벅 걷는/이 아침이 미안하구나/오롯이 숨 쉴 수 있다는 게/더 미안하구나 - 시 "미안하다" 부분

마산에 사는 표성배 시인이 펴낸 시산문집 <미안하다>(도서출판 갈무리 간)에 실려 있는 시 한 편이다. 표 시인이 '미안하다'고 해서 쏟아낸 시와 산문을 읽다 보면 독자도 미안해진다.

표성배 시인의 이번 시산문집은 온통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아내에게 미안하고, 함께 부대끼며 생활해 온 공장 동료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집이건 일터건, 나아가 사회건 국가건 간에 모든 갈등을 푸는 첫 마디는 '미안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구든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듣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이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해 버리거나 들으면 아픔은 눈 녹듯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노동자들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말은 무엇일까? 찾을 수 있다면, 아마도 불안일 것이다. 불안. 불안한. 불안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캄캄하다. 절벽이다. 불안을 빼고는 어떠한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불안 앞에는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락이다. 오늘이 불안하니, 내일도 불안하다. … 더 캄캄한 것은 이 불안을 없앨 어떤 답을 명확하게 찾을 수 없으므로 장기적 만성적 불안이다. 한 마디로 통째 불안이다."

표성배 시인은 노동자들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그가 일터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아픔을 뼈 속 깊이 느끼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어떤 노동자들은 잘 돌아가던 공장을 일방적으로 폐쇄한다는 발표가 나고부터 밀려드는 불안한 미래 앞에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반성은 늘 늦게 도착하고 후회가 앞서지만, 반성과 후회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표성배 시인의 시와 산문은 하루하루 성큼성큼 다가서는 불안한 '밥' 앞에 벌거숭이로 서 있는 이 땅 노동자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밥이 불안하고부터 숨 쉬는 공기가 불안하고, 편안해야 할 잠자리가 불안하고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지난 시간마저 불안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료의 심정임을 그는 숨기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살아온 삶 전부를 부정하게 만드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끔찍하지만 이 경험은 이 땅에서 밥을 벌어먹는 노동자라면, 빠르거나 느리거나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한 번은 겪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밥. 우리가 공장폐쇄라는 당면한 문제 앞에 두려운 것은 밥, 밥 때문이다. 밥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밥은 모든 것으로 통하게도 하고, 모든 것을 벽처럼 막기도 한다. 밥은 그래서 전지전능하다. 사람을 웃게 만들 수도 울게 만들 수도 있는 밥, 밥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밥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다."

표성배 시인은 이 불안의 근본 원인을 밥에서 찾고 있고, 그것도 노동자들이 먹는 밥은 '피밥'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늘도 공장폐쇄나 정리해고, 희망퇴직이라는 명분 앞에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나고 있으며, 불법파견이나 불법적인 정리해고나 공장폐쇄 등에 맞서 노동자들은 송전탑이며 공장 옥상, 크레인 위나 심지어 광고탑에까지 올라 밥을 위해 밥을 굶는 이 땅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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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성배 시인이 펴낸 시산문집 <미안하다> 표지. ⓒ 도서출판 갈무리


표성배 시인은 "할 수 없이 떠밀리듯 희망퇴직서에 서명한 동료에게 더 미안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어제까지 나란히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동료의 빈자리를 생각하고, 공장이 폐쇄되고 일자리를 잃고 떠나가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괴로워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더 괴롭다"고 말한다.

표성배 시인은 책 머리말에서 "미안하다는 말, 이 말만큼 미안한 말은 없"으며, "공장은 단순히 일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한 노동자의 삶이 오롯이 배어 있는 삶터"라고 주장한다. 그는 공장 폐쇄는 "삶의 터전"을 빼앗아가는 횡포며 폭력이라고 고발한다.

이규석 시인은 추천사에서 "불안하다. 불안, 이 산문집을 읽으며 내내 나를 지배하는 단어는 '불안'이다. 이 불안이 공장 폐쇄라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개별적 노동자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벽으로 인해 느끼는 불안이라면, 한 집안의 가장인 내 불안도 이미 '장기적, 만성적, 통째불안'이다"고 했다.

최상해 시인은 "공장이 단순하게 밥을 벌어먹고 사는 공간이 아니라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그래서 '공장은 논이고 밭이다.' 나아가 노동자의 삶을 지배하는 근원이다. 그게 이 땅 공장 노동자가 처해 있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을 잊고 살아간다는 말에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표성배 시인은 마창노련문학상(1995년)을 받았고, 그동안 시집 <아침 햇살이 그립다>, <저 겨울산 너머에는>, <개나리 꽃눈>, <공장은 안녕하다>, <기찬 날>, <기계라도 따뜻하게>, <은근히 즐거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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