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로 남북이 하나되는 모습 볼 수 있을까

[서평] 무예로 역사·문화·철학을 읽다 <무예 인문학>

등록 2017.06.30 14:52수정 2017.06.3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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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 속 주인공의 화려한 액션에 반해 따라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소룡·성룡이 극장가를 장악했던 당시만 해도 전국의 쿵푸도장은 '이소룡 키드'가 되고자 하는 까까머리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주먹들의 낭만과 의리를 그린 드라마 <야인시대> 열풍이 사내들의 욕망에 또 한 번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만큼 남자들에게 있어 강함에 대한 로망은 본능적인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10대 소년 시절 우연히 본 성룡 영화가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무예를 수련해오고 있다. 오로지 '강해지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를 무협영화 속 주인공이라 착각하며 공원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철 없는 무술 덕후인 모양이다.


무술 덕후, 진정한 무인의 삶을 읽다

그런데 여기 나보다 더 지독한 무술 덕후가 있다. 수원 화성에서 우리의 전통무예를 복원·전수하고 있는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본래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던 경영학도였다. 그러나 우연히 전통무예 동아리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자신이 수련하는 무예를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마음에 전공을 역사학으로 바꿔 대학원에 진학하더니, 기어이 국내 1호 무예사 박사라는 타이틀을 따내고야 만 것이다.

그는 지금도 낮에는 말 타고 활을 쏘며 밤에는 연구에 몰두하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최근 자신이 무예를 수련하며 느낀 단상과 연구 성과를 함께 엮어 <무예 인문학>이란 책을 펴냈기에 같은 무술 덕후로서 반가운 마음으로 찬찬히 살펴봤다.

<무예 인문학> 표지 ⓒ 인물과사상사


무예는 당대 신체문화가 낳은 산물


사실 무예를 인문학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발상 자체는 신선하지만 한편으로 생뚱맞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문학은 흔히 문(文:문학)·사(史:사학)·철(哲:철학)로 나뉜다. 문학과 철학은 동서고금 인류의 사상이 집약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역시 지나간 인류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세 학문이야말로 인문학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예는 신체적 활동이란 점에서 인문학보다는 체육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무예 인문학이란 대체 어떤 개념일까 궁금해진다.

저자는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고 무예야말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의 정수"라고 강조한다. 무예야말로 당대 인류의 신체문화가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예란 강한 자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탄생한 생존수단이었다. 당연히 남들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 상대방의 강점과 나의 약점을 연구하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자연스레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적 특성, 자신의 기질, 인류문명의 발전 정도에 따라 무예의 형태도 천차만별로 변화해왔던 것이다.

예컨대 무술의 메카라 불리는 중국만 해도 대륙의 드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그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문파들이 존재한다. 그 문파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양쯔강을 기준으로 이남 지역에서 발달한 무술을 '남파무술', 이북 지역에서 발달한 무술을 '북파무술'로 구분하곤 한다. 여기에는 지역적 특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남파무술은 주로 낮은 자세로 이뤄진 동작들이 대부분이며 발기술보다는 손기술 위주로 구성돼있다. 양쯔강 이남은 바다를 끼고 있는 탓에 주로 뱃전에서 무예 수련이 이뤄졌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낮은 자세와 손기술이 발전했던 것이다. 반면 북방 지역의 무술은 호쾌한 발차기와 큰 동작들로 이뤄져 있는데, 겨울만 되면 급격히 추워지는 날씨 탓에 몸을 최대한 많이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 <엽문 3 - 최후의 대결> 스틸컷. 영춘권의 고수 엽문(견자단 분)이 목인장을 상대로 수련에 열중하고 있다. 발차기보다 빠르고 화려한 수기가 특징인 영춘권은 대표적인 남파무술에 해당한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이렇듯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생존본능과 지혜가 집약된 무예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인류의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의 핵심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인간이 어깨에 창을 메고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이 바로 무(武)의 본질인 셈이다. 그러한 진취적인 모습이 있었기에 인간이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을 야성적으로 만든 것이 무예다. 효과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수많은 지혜가 집약된 것이 무예기도 하다. 무예에는 지성과 야성이 함께 남아 있다." - p.6

한민족의 DNA에 살아숨쉬는 옛 무예의 흔적

역사학자의 통찰력으로 옛 무예의 형태와 오늘날 무예 형태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자 한 시도도 인상적이다. 사실 외침으로 굴곡이 잦았던 역사만큼이나 우리의 옛 무예들도 온갖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름이 알려진 대부분의 전통무예들은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실체를 알 길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자는 당대 무예에 응축된 선조들의 지혜가 우리의 DNA 속에 박힌 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수박과 씨름, 조선 후기 <대쾌도>에 묘사된 택견의 모습 등 문헌 속에 등장하는 옛 무예의 뿌리를 추적하며, 당대의 무예 형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주되어 왔는지 분석한다. 여기에는 스스로 전통무예를 복원하는 작업에 반평생을 바친 저자의 이력이 빛을 발한다.

조선 후기 풍속화인 <대쾌도>에 묘사된 씨름과 택견의 모습 ⓒ 위키피디아


삶을 이해하는 철학, 수파리(守破離)

책의 후반부는 대부분 저자 자신이 무예를 수련하며 느낀 경험들로 이뤄져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 혹여라도 '난 태어나서 태권도 도장 한 번 다녀보지 않았는데...'하며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저자는 무예를 수련하며 느낀 단상들을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현상에 빗대어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설명을 듣다보면 무예서라기보다는 철학서적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예컨대 저자는 일본 검도에 있는 '수파리(守破離)'라는 개념을 인용해 삶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에 대해 말한다.

수파리의 첫 번째 단계인 수(守)는 '지킨다'는 뜻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자신의 몸으로 체화하는 단계다. 즉 같은 동작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해 자다가도 부지불식간에 동작이 나올 정도로 반복·숙달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두 번째 단계인 파(破)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신체구조와 추구하는 가치에 맞게 스승의 가르침을 변주하는 단계다. 마지막 리(離)는 '떠나는 것', 즉 기존의 것을 탈피해 자신만의 무예를 완성하는 단계다.

저자는 무예를 통해 체득하게 된 수파리의 철학이 일상의 모든 현상에 적용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어릴 적에는 부모를 통해, 학창시절에는 학교를 통해,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는 직장 상사나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수파리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수파리의 반복은 늘 똑같은 반복이 아니다. 어제 떠오른 태양과 오늘 떠오른 태양은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소멸과 생성을 거친 다른 존재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 그리고 오늘의 나를 넘어서는 내일의 나를 꿈꾸기에 우리의 삶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 p.62

수파리 철학은 무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이자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은 모두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미완성의 생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배움의 동물'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가르침을 얻고, 또 그것을 다시 깨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예에는 이 자명한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무예를 수련한다는 것은 삶의 철학을 공부하는 길이기도 하다.

전통무예야말로 진정한 '한류'

이처럼 현대에 이르러 무예는 생존수단으로서의 호전적 기능을 상실한 채 삶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수단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무예의 예술적·스포츠적 가치에서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

실제로 오늘날 무예는 유희와 축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당장 우리나라의 국기(國伎)인 태권도만 하더라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전세계 많은 인구를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

2011년에는 우리의 택견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우리만의 무예 문화를 정립하고 세계화에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다이나믹 코리아'를 완성하는 길이라 힘주어 말한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무예24기 시범공연 모습 ⓒ 김경준


태권도로 남과 북이 하나되는 모습 볼 수 있을까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니 무예에 내포되어 있는 소통과 화합의 힘을 우리 안의 불신과 갈등을 해결하는 단초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컨대 1991년 남북탁구단일팀이 결성되어 남북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북에는 국제태권도연맹(ITF), 남에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있어 각각 남과 북의 태권도를 대표하고 있다. 비록 구성과 형식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지만 결국 뿌리는 하나의 '태권도'에서 비롯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점에 한반도와 만주 대륙을 말 달리던 우리 선조들의 호연지기가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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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남북 태권도 시범단과 기념촬영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오후 전북 무주군 태권도원 T1 경기장에서 열린 '2017 무주 W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 참석해 한국-북한 태권도시범단과 기념촬영을 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태권도로 남과 북이 하나되자'는 구상이 마냥 비현실적인 얘기만은 아닌 것 같다. 지난 24일 전북 무주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북측 태권도 선수들이 참가해 남북 태권도 교류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이날 열린 개막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역시 "스포츠는 모든 장벽과 단절을 허무는 가장 강력한 평화의 도구"라며 "WTF와 ITF가 하나가 되고, 남북이 하나가 되고, 세계가 하나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태권도 안에 살아숨쉬는 단일민족의 전통과 화합의 힘이 남북의 갈등을 치유하는 생명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무예 안에 숨은 인문학의 힘을 현실에 맞게 되살려내는 지혜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무예 인문학>, 최형국 저, 인물과사상사, 2017.5.8, 15,000원.

무예 인문학 - 전통 무예에 담긴 역사·문화·철학

최형국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7


#무예 #인문학 #최형국 #무예24기 #무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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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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