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기만, 씹어주자 노가리"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회상 - 6.29선언 30주년을 맞이하면서

등록 2017.06.29 07:24수정 2017.06.2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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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3일, 광주를 희생양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을 향해 '호헌선언'을 했다. 1986년 10월 애학투사건(건대항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후, '반제동맹사건'과 'ML당 사건' 등 공안조작 사건을 통하며 정권연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4.3 호헌선언'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국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국민의 저항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6월 항쟁으로 불타올랐고,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두환이 수용하면서 '대통령직선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6월 항쟁이나 6.29 선언의 역사적인 평가는 학자들에게 맡기고, 당시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내가 경험했던 1987년 6월의 전후의 이야기들을 '속이구(6.29)선언일'에 맞춰 풀어보고자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므로 지엽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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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직선제 개헌 수용 선언을 발표하는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 ⓒ MBC 뉴스데스크 캡처


6월 항쟁이 있기까지의 전 과정

6월 항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1987년만 이야기할 수 없다. 어떤 결과에 이르기까지는 '양질전화'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1987년에서 너무 멀리 갈 것 없이 1984년, 숨죽였던 대학가에서 민주화운동이 서서히 밑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던 시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1984년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조차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고, 대학가의 운동권은 소위 '언더서클'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군부독재정권은 지속해서 공안 몰이와 조작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학가를 중심으로 5월이면 '광주민중항쟁 추모식'이 열렸고, 광주의 진실이 밝혀질수록 전두환은 권좌가 흔들렸다.


이것은 피차간에 필사적이었으므로 저항과 억압의 충돌은 강도가 점점 세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광주민주항쟁 당시 미국의 역할과 개입이 밝혀졌고 마침내,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미제축출, 파쇼타도!"라는 구호가 외쳐졌다. 마침내 '미제국주의!'라는 구호가 전면적으로 외쳐진 것이다.

군부독재의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후 '인천 5.3사태'의 배후를 조사하던 경찰에 의해 위장취업 중이던 서울대생 권인숙 부천성고문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사회적으로 큰 분노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3인천사태'와 '부천성고문사건'의 여파는 10월 28일, 건국대학교 애학투 사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평화롭게 진행되던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토끼몰이로 2000여 명의 학생을 건물로 몰아넣고 사흘 동안 감금하고 연행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후 수많은 대학생의 분신, 투신사건, 마침내 6월 최루탄에 의한 연세대 이한열의 사망사건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1986년 애학투 사건 이후 수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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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건대항쟁은 1447명 연행 1288명의 구속이라는 사상초유의 기록을 낳았다. 독재정권에 의해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빨갱이로 매도되어야만 했다. ⓒ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당시 나는 3학년으로서 학회장을 맡고 있었다. 애학투 결성식이 건대에서 있던 날, 결성식만 하고 평화롭게 집회를 마칠 예정이었으므로 집회를 마친 후 그리 멀지 않은 석촌호수(당시에는 포장마차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에서 애프터를 하겠다고 유혹(?)하여 제법 많은 후배가 참석했다. 함께 가기로 했으나 전날 무리한 탓에 후배들만 참석했고, 나는 석촌호수로 가서 후배들을 만나면 된다 생각하고 느지막하게 자취방에서 총학생회실로 올라갔다가 경찰에 의해 건국대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만 해도 곧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기에 석촌호수로 약속 시각에 맞춰 가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나 경찰은 사흘동안 식수공급도 하지 않은 채 학생들을 건물에 감금했고, 200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폭압적으로 연행했다. 군부정권은 애학투 사건을 공안사건으로 조작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권력 누수 현상을 막아보려 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일로 수배가 되었다. 당시 수배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다 말하지 않겠다. 간단하게 줄이면, '잡히면 죽는다!'였다.

1987년이 밝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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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 연합뉴스


1987년, 그해가 6월 항쟁으로 남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도피 중이었으므로 새학기를 기숙사에서 맞이했고, 학교 밖에는 일절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줄을 잇는 분신과 투신,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은 마침내 '4.3호헌선언'을 하고, 그 이후 정세는 급변했다. 여기저기서 봇물터지듯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구호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배상태라 거리로 나서지 못했던 나도 가끔씩 후배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습시위를 주로 했는데, 사전에 경찰들이 정보를 입수하는 경우도 있어서 신호를 보내고 시위를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사복경찰들에 의해 연행되는 일도 많았다. 그날도 시위정보가 사전에 유출되면서 시위가 시작되자마자 백골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 후배와 함께 뛰다가 어느 건물 지하 창고로 들어갔다. 여자 후배는 "형, 형은 잡혀가면 오래 살아요. 나는 2학년이니까 훈방으로 나올 거예요, 꼭 숨어있으세요" 하며,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지하에서 나갔다. 경찰이 구타하는 소리와 비명소리... 그곳 지하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며 두어 시간을 더 숨어있다 늦은 시간에 학교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늦은 시간에도 모여 시국토론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내가 잡힌 줄 알았던 이들은 모두 환호했지만, 이내 나의 파트너였던 후배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암묵의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그 암묵적인 비난의 화살은 내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5월이 되어 교생실습을 나갔다. 4월 말에 호헌철폐를 촉구하는 삭발투쟁에 참여했으므로 머리가 굉장히 짧았다. 첫 번째 조회시간, 교장은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여러분, 대학생 형들도 이렇게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다음날 신문에 '삭발투쟁' 기사가 나가자 교장은 흙빛이 되어 나를 포함하여 삭발한 교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교생실습 평가는 가까스로 패스였다.

두려움 속에서 거리로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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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 연합뉴스


수배 중이라 교생실습을 하면서도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워낙 시국이 혼란스러운지라 수배자에게까지 경찰의 역량이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했다. 교생 실습을 마치고 거리로 나오면 늘 시위 중이었고, 거리는 늘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가득했다. 농담으로 최루탄 냄새를 사흘 동안 맡지 않으면 힘이 빠진다고 할 정도로, 늘 거리에는 최루탄과 백골단이 넘쳐났다.

교생실습을 하는 동안에는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그나마 직장인 행세를 하며 백골단을 넘겨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식'에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일이 발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이어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국민들도 이에 분노하여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통치는 지속되고 있었으며, 권좌에는 전두환이 앉아있었고, 여당인 민정당 대표는 부역자 노태우가 대표로 있었으니 언제 계엄령이 선포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신체제에서의 계엄령이나 1980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었고, 이런저런 유언비어들이 횡행했다.

만일, 계엄령이 떨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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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 연합뉴스


'만일, 계엄령이 떨어진다면...' 이런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엄령이 선포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과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고문보다는 죽음이었다. 6월이 어느날 밤, 군인들이 학교로 들어온다는 급전에 부랴부랴 기숙사에 있던 각종 유인물들을 소각하고 그들이 학교로 진입하면 투신하려고 기숙사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다행히 군인들은 학교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내가 투신하는 일은 없었다. 훗날, 그 당시 군에 입대해 있던 후배 중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학교로 진입할 준비가 다 되었고 실제로 배치도 되었는데 갑자기 취소되었어요. 하마터면 형과 거기서 만날 뻔했죠."

그 당시 군대의 움직임이 어떠했는지 민간인인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계엄령에 대한 불안함은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거리로 나서는 이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졌고, 넥타이부대들이 합류했으며 시민들이 모이는 곳곳마다 전두환 정권을 성토하는 시국 토론이 활기차게 벌어졌다.

6월 29일, 노태우에 의해 '속이구 선언'이 발표되다

6월 29일,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한다. 그것을 전두환이 받아들일 리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두환이 덜컥 받아버린다. 이후 알려진 일이었지만 전두환의 각본에 의해 연출된 것이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도 석방되어 활발하게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며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지지가 상당히 높았다.

만일 직선제로 간다면 여당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고, 여당의 패배는 곧 광주를 짓밟고 정권을 찬탈했던 자신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이전처럼 힘으로 짓누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상당히 교묘한 술법으로 정권을 연장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물태우'로 불리며, 국민에게 비아냥 거리가 되었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 그를 대통령이 되게 하려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반기를 들어 6.29 선언을 하는 것처럼 하고, 전두환은 그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그해 있었던 12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을 누르고 노태우가 당선되는 놀라운(?)일이 현실이 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그들의 정권연장만큼 늦어졌고, 늦어진 만큼 민주화의 의미는 퇴색됐다.

당시 대학생들은 6.29 선언이 나오자마자 '속이구 선언'이라며 반발했지만, 많은 이들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알맹이가 없는 선언에 환호했다. 12월에 당연히 문민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따낸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이다.

경찰에 확인한 바 없으나, 6.29 선언 이후에 '수배'도 해제된 것 같다. 민주화운동관련한 수배자들의 수배를 해제하고, 양심수도 일정 정도 석방되는 조치들이 있었기에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해 10월, 시위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건대사건과 관련하여 취조를 받은 바 없는 것으로 보아 내가 6.29 선언의 수혜자인 것은 확실하다.

'나이 서른에 우린'을 불렀던 이들이 중년이 된 지금

소위 386세대 혹은 486세대, 6월 항쟁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세대. 그 당시 백창우의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20대였으므로 그 노래를 자주 불렀고, 나이 서른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고자 다짐했었다. 아니 서른이 되려면 꽤나 많은 세월이 지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때에 부끄럽지 않길 바랬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 나이도 훌쩍 넘어 50대 후반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많이 부끄럽다. 지금의 중년이 6.10항쟁의 주역이었던 세대가 만들어온 나라의 현실, 그것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경쟁이 판치는 승자독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순수성을 포기하고 과거의 이력을 밑천 삼아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으며, 변절자들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나름 그당시 공부했던 사회과학적인 지식으로 중무장한채로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능하고 익숙하다.

물론, 다는 아니다. 여전히 순수성을 지키는 이들이 많고, 이 나라가 좀더 사람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1987년 6월 항쟁은 여전히 미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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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출발해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해 ‘6월항쟁군’ 복장을 한 시민들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며 서울광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자유한국당에서 혁명이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그런 정당이 아직도 거대 야당이라는 점, 국정농단의 주범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죄 없다고 항변하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나라 같지 않은 나라를 다시 세워주기를 바라며 문재인 정권이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장·차관 임명과정에서 보듯이 새로운 정권에 임명되는 이들 중에는 '서민이 알 수 없는 별세상'에 사는 이들이 부지기수인데다가, 문재인 정권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은 알겠지만, 애정 어린 비판에도 온갖 혐오성 발언과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조금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던 시대를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우리는 그런 시대 앞에 서 있는가?

1987년 6월 항쟁 당시 함께 했던 기억들은 좋은 추억으로 내게 남았지만, 6월 29일 '속이구선언' 때문에 여전히 살아남은 적폐들이 여전히 이 나라 곳곳에 독버섯처럼 퍼져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제 그런 것들을 확대재생산하는 이들이 한때 동지기도 했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그건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겠지. 무엇보다도 아직도 이 나라가 제대로 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라 같지 않은 나라라는 점에서 6월 항쟁은 아직도 미완의 혁명임에는 분명하다.
#6.29선언 #6월 항쟁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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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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