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친구, 문득 옛기억이 떠올랐다

싱그러운 청춘의 기억

등록 2017.06.28 14:57수정 2017.06.28 14:5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가 왔다. 나는 내 방에서 들국화 1집 카세트 테잎을 들으며 흥얼거리다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장롱을 뒤졌다. 내가 가진 옷 중에 젤 이쁜 옷을 꺼내 갈아입고 머리를 빗고 오빠 방 앞을 지나간다. 나를 발견한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놀라는 척 "어? 오빠 왔어요?"대답한다. 시력도 나쁘고 눈치도 없는 나의 오빠는 "야! 너 왜 집에서 그렇게 입고 있냐?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화끈해 진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새하얀 빽바지에 새빨간 티셔츠. 때는 1980년대. 시대를 너무 앞서간 붉은 악마 패션.


당시 나는 중1이었다. 오빠와 그는 중3. 그는 촌스럽고 약간 뚱뚱하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낀 나의 오빠랑은 전혀 다른, 세련되고 날렵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가졌다. 둘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다. 서로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그 점이 상호 보완을 한 건지 단짝이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후, 그는 오빠 친구에서 점점 남자로 변했다. 우리 학교는 남녀 공학이라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서 만난 그는 집에서 보던 모습과 매우 달랐다. 다정하고 잘 웃고 편안해만 보이던 그는, 학교에서는 카리스마 넘치고, 터프하고, 그야말로 상남자 같아 보였다. 결정적으로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도 단연 인기가 많았다. 우연히 수돗가에서 그를 마주쳐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만 해도 "어떻게 아는 사이냐"며 반 친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그러니 그가 달라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오빠와 그는 다른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이후 그를 보는 일이 뜸해졌다. 그는 가끔 일요일에 우리 집에 놀러왔다. 나는 그와 같이 얘기하고 싶었지만, 오빠와 그는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는지 문을 닫고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매번 새 옷을 갈아입고 거실을 얼쩡거렸다.

어느 일요일, 오빠가 집에 없는데 그가 왔다. 드디어 오빠가 올 때까지 그와 얘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오빠는 엄마랑 안경을 맞추러 나갔으니 적어도 1~2시간은 있어야 돌아올 것이다. 나는 후다닥 원피스로 갈아입고 오빠 방으로 갔다. 그는 언니랑 얘기하고 있었다. 언니랑 나는 3살 차이다. 그보다 1살 연상인 우리 언니. 

내가 방에 들어가자 그는 말을 얼버무렸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들어버렸다. "나 누나 좋아해요. 오래 전부터..." 나는 이미 한쪽 발을 방에 들여놓은 상태였고 "오빠 주스 드실래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하고 물어본 후 주스 두 잔만 전해주고 그 방을 나왔다.


a

아미 미술관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개조한 아미 미술관에서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나다. ⓒ 문하연


고2가 된 토요일 오후,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할 일없이 여수 시내를 쏘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오토바이가 내 앞을 막았다. 그였다. 그는 나를 만난 게 진심 반가웠는지 환하게 웃으며 맛있는 거 사준다며 근처 음악다방으로 날 데려갔다.

그는 파르페를 권했지만 나는 웬일인지 생전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는 잠깐 어리둥절한 듯 보였으나 이내 웃으며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커피와 함께 '프림과 설탕이 든 도자기 그릇'이 셋트로 나왔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티스푼을 들고 설탕을 한 숟가락 떴다. 갑자기 수전증이라도 생긴 건지 손이 살짝 떨리더니 의식할수록 스푼에서 설탕이 떨어졌고 내 컵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설탕이 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고개는 자꾸만 밑으로 향했다.

"이제 어쩌지? 그냥 일어서서 집에 갈까?" 고민하는 순간 그는 내 커피 잔에 설탕 두 스푼과 프림 두 스푼을 넣고 저어주며 "오빠는 학교 잘 다니지? 대학 다니니깐 좋대?"라고 말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지만 무슨 얘길했는지 기억이 없다. 그저 내 맘을 들킨 거 같아 창피하고 빨리 그 자릴 뜨고 싶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그는 빨리 마시고 일어나자고 했고 나는 손이 떨릴까 봐 잔을 들고 마실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가 화장실에 갔고 나는 커피를 원샷했다.

그는 오랜만에 우리 엄마께 인사도 드릴 겸 날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괜찬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나를 끌어다 오토바이 뒤에 앉혔다. "꽉잡아" 그가 말했다. 나는 어딜 잡아야하는 지 몰라서 그의 셔츠 자락을 손 끝으로 쥐었다.

오토바이가 출발과 동시에 관성의 법칙에 의해 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가 달려왔고 내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그는 유치원아이 살피듯 나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다친 데가 있는지 살폈다. 나는 아프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는 "아이구... 그러게 오빠가 꽉 잡으라고 했잖아. 빨리 다시 타." 그는 다시 나를 뒤에 앉힌 후, 내 양팔을 끌어다 자기의 허리를 꽉 감게 했다. 그의 등과 내 가슴이 밀착되자 창피함은 사라지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내 심장소리가 그의 등을 타고 가 그에게 전해 질까봐 최대한 가슴을 뒤로 빼고 앉았다.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그는 내 손을 더 끌어다 놓으며 "또 떨어지니깐 조심해"라고 말했고, 나는 우리 집이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어디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 깜짝할 사이 그가 날 집 앞에 내려주고 갔다. 이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우리 집은 광주로 이사를 했고 나도 전학을 갔다. 오빠에게 듣기로는 그는 고2때 자퇴를 하고 이미 누군가와 동거하고 있었다고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난 그를 차츰 잊었다.

지난 달 아버지 생신에 우리 가족이 다 모였다. 얘기 끝에 우연히 그의 얘기가 나왔다. 아직 비혼인 오빠는 "누구는 한 번도 못해본 결혼을 그는 세 번이나 했다"며 진심 부러워 했다. 결혼 전 동거까지 합하면 "그는 무려 5명의 여자랑 살아봤다"며 "그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오빠는 여한이 많아 보였다. 

언니는 학창시절 "그가 언니에게 고백했던 얘길" 하며 "동생 대하듯 잘 타일렀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듣고만 있었다.

내가 만일 그와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면 나는 다섯 여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까? 그도 어설픈 나의 마음을 알아챘을까?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일이 기억나서 오빠한테 말했다. 물론 그때 내가 가졌던 감정은 쏙 빼고 팩트만 말했다. 오빠는 박장대소하였고 오빠의 웃음 속에 어리버리하고 순수했던 내가 보여 같이 웃었다.

오빠 말에 의하면 그는 부모님께 받은 유산으로 지금까지 변변한 직장 없이도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과 지지고 볶고 20년을 넘게 살면서 때때로 일탈을 꿈꿨던 나보다, 다섯사람과 살아본 그는 더 행복했을까?
#학교 #첫사랑 #추억 #오빠 #행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