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장관 임명이 성평등? 그것만으론 안 된다

[서평] 벨 훅스 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등록 2017.07.03 20:27수정 2017.07.03 20:27
5
원고료로 응원
새 정부 들어 여성들이 고위직에 줄줄이 임명되고 있다. 조현옥 인사수석부터 시작해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주목을 받으며 자리에 올랐고, 여성 부장판사를 대법관으로 임명 제청했다는 뉴스도 들린다.

주위에서 '남녀평등' 운운하는 이야기가 꽤 많이 오간다. 성평등이 다 이뤄진 듯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성차별의 부당함을 꺼내놓을라 치면 "이 정도면 '남녀평등' 다 된 것 아니야?" 하는 말이 훅 치고 들어온다. "예전보다 여자들 살기 많이 좋아졌다"는 말과 쌍을 이룬다고 보면 된다.


높은 자리에 여성들이 진출하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고 성평등 관점에서 볼 때도 분명 진보한 일이다. 하지만 '남녀평등'이나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세상이 변하려면 아직 멀었다.

a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 문학동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문학동네 펴냄)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초기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는 개혁파와 혁명파가 있었다.

개혁파는 기존 체제 안에서 일부만 수정하자는 입장이다. 이들은 가사노동과 양육을 여성의 몫이라 당연시하는 분위기와 직장에서 남녀 간 임금 격차를 문제로 지적하며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고학력 백인 여성들이 개혁파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와 달리 혁명파는 기존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 사회 밑바닥부터 변화를 만들자는 데 목소리를 모았다. 이들이 집중한 것은 성차별주의와 가부장제였다. 존중과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모델을 세우는 게 목표였다.

페미니즘 운동이 양쪽으로 극렬히 갈린 것은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위치 때문이다. 당시 고학력 엘리트 여성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저임금 직종'(99쪽) 밖에 없었다.


이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커리어에 맞는 일을 택하고 그에 합당한 임금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지 못할 바엔 '차라리 전업주부가 되는 편을 택'했다.(99쪽) 대중들도 이들의 주장에 더 관심을 보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특권을 가진 여성들만이 가정을 벗어나 일자리를 구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자족할 수 있는 소득을 손에 넣으리라 기대하는 호사를 누렸다. (중략) 그녀들이 계급 권력을 손에 넣는 동안 그 밖의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한 채로 남았다는 사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위해 직장 환경을 개선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이 어떻게 계급 이익으로 치환되는지 잘 보여준다.' (100쪽)

개혁파의 운동은 일부 엘리트 여성들의 계층 이동에 사다리역할을 했지만 전체 여성이 처한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이를 두고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사실상 백인 권력을 지지함으로써, 주류인 백인우월주의-가부장제가 권력을 강화하는 상황을 방조했으며 동시에 급진주의 페미니즘 정치를 약화시켰다."(103쪽)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수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던 혁명파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이들의 주장은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엘리트 여성들의 등장이 오히려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가부장제하의 대중매체는 혁명파의 주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당연히 이 주장은 주류 언론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다. (중략) 특권층 백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들이 기존 사회구조 내에서 경제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혁명적 페미니즘의 비전은 고려 대상에서 멀어졌다.' (31쪽)

몇몇 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이 나머지 여성의 삶을 대변할 수 없으며, 그들의 성공이 성평등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성들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계급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2016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여성 노동자의 41%가 비정규직이고(남성은 26%)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는 여성 비율도 19.8%나 된다. 국무위원의 여성비율을 50%까지 끌어올리더라도 대다수 여성들이 가정과 일터, 사회 곳곳에서 마주치는 불평등과 폭력,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 벨 훅스는 50여 년 동안 페미니즘 운동을 하며 계급, 인종, 자본주의,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썼다. 이 책은 2015년 미국에서 발간된 책으로 우리나라엔 올해 3월 소개됐다. 임신선택권, 외모, 일, 폭력, 남성중심주의 등 페미니즘의 '핫'한 이슈들을 차례로 소개하며 페미니즘이 이 주제들에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이미 서른 권이 넘는 책을 펴낸 작가가 300쪽이 안 되는 작고 얇은 사이즈의 책을 새로 쓴 이유가 있다.

'대개 사람들은 페미니즘 하면 남자처럼 되고 싶은 한 무리의 성난 여자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권리에 대한 것이라고, 다시 말해 여자들도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운동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중략)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상대에게 추천할 만한 얇은 책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 책을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면 페미니즘이 뭔지, 페미니즘 운동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렇게 권하게 말이다.' (17쪽)

언제부턴가 살면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페미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내 불편함을 지지하고 지친 나를 위로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실어주는 것도 페미니즘이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 앞에선 여전히 막막했다. 페미니즘은 매력적이었지만 소화하기엔 너무 크고 단단했다.

이런 내게 이 책은 밑줄 그을 부분이 많았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18쪽)라는 명쾌한 한 줄 정의에 반가움을 느꼈고 '여성도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28쪽) '외부의 적과 맞서려면 그 전에 내부의 적부터 변화시켜야 한다'(45쪽)는 부분에선 '허걱' 하며 나를 돌아봤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성들의 유대는 인정과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의 유대는 불가능했다. 그런 행동 자체가 반역이었다.'(52쪽)는 내용에 '맞아, 맞아' 하며 박수를 쳤고, 임신선택권을 강조하며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여성들이 선택할 수 없다면 삶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80쪽)는 대목에선 쨍한 깨달음에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만일 책의 단 한 부분에만 밑줄을 칠 수 있다면 나는 이 부분을 택하고 싶다. 처음 읽었을 때의 두근거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 말이다.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중략) 한 걸음 더 다가오라. 페미니즘이 당신과 우리 모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지켜보라. 더 가까이 다가와 페미니즘 운동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라. 더 가까이 다가오라. 그러면 더 잘 보일 것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22쪽)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리커버 특별판)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문학동네, 2017


#페미니즘 #여성주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문학동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 쓰고, 글쓰기 강의를 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2. 2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3. 3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4. 4 "남자들이 부러워할 몸이네요"... 헐, 난 여잔데
  5. 5 고립되는 이스라엘... 이란의 치밀한 '약속대련'에 당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