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대한민국의 탄생을 긍정하면 안 될까

[서평] 대한민국의 '사주팔자'는 평등,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등록 2017.07.04 08:23수정 2017.07.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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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보수는 대한민국의 탄생을 긍정하고 진보는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고 한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부터 친일파 미청산, 반공 국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까지. 대한민국의 탄생을 마냥 미화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고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 유명한 "과거를 지배하는 자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을 남겼듯이,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역동적이고 정치적인 학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운동장을 뛰면서 진보가 대한민국 탄생의 어두운 면에만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보수와의 담론 싸움에서 한 수 물리고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역사의 부끄러운 면을 덮어두자는 얘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기억하되, 오늘날 유용하게 끌어올 수 있는 대한민국 시초의 진보적인 측면을 함께 주목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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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주대환,2017 ⓒ 나무나무

여기 대한민국을 긍정하자는 '발칙한' 주장을 하는 진보 지식인이 있다. 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63)이다. '부마항쟁의 주역', '노동운동의 대부' 등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는 몇 년 전에는 <좌파논어>라는 책까지 낸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다.

그런 그가 올해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출판했다. 작가는 진보가 대한민국 역사의 평등한 면을 발견하고 긍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를 '선점'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서 현재의 좌우 담론에서 진보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자고 말한다.

여태까지 논쟁에서 보수는 대한민국이란 집 안에서 싸움을 했다면, 진보는 울타리 밖에서 투쟁을 해야 했다.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이다. 이제는 진보가 대한민국이란 집을 보수로부터 선점함으로써 운동장의 형평을 맞출 수 있다는 게 그의 전략적인 사관이다.

제헌 헌법에 새겨진 평등의 유전자


예컨대 노동자 경영 참여 문제를 놓고 진보 보수가 토론할 때, 진보가 제헌헌법 18조를 근거로 가져온다면 어떨까.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제헌헌법 제18조)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최초의 정신과 지향이 담긴 문헌이다. 그런 제헌헌법에는 지금의 노동3권은 물론 노동자의 이익분배균점권까지 명시돼 있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사기업에서의 노동자의 이익분배를 보장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것도 보수가 '국부'로 받드는 이승만이 제헌국회 의장을 맡아 공포한 헌법에서 말이다. 이 같은 역사적 근거에 기반할 때 진보의 주장은 보다 큰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 역사가 갖는 힘이다.

이외에도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제헌헌법 84조) 등 제헌헌법에는 지금의 헌법보다 더 진보적이고 평등에 입각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출발이 단지 이승만의 독점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는 '역사에서는 반드시 승자의 꿈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패자의 꿈도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제헌 헌법에는 이승만이나 김성수의 꿈만 아로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김구와 조소앙의 꿈도, 김규식과 여운형의 꿈도, 심지어 박헌영의 꿈도 새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 p97.

김구, 조소앙,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은 각기 다른 정치지향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반대편에 섰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의 꿈까지도 제헌헌법은 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때는 이승만조차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이나 무엇이나 민의를 따라 행하"자고, 또 우리의 목표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취임사에서 주장할 만큼 당시의 국민들 사이에서의 사회주의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무턱대고 사회주의를 반대해서는 국가가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시대였던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제헌헌법은 탄생할 수 있었다. 좋은 '사주팔자'를 타고 대한민국이 태어난 것이다.

작가는 오늘날 다시 제헌헌법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성격과 지향을 규정하는 제헌헌법을 읽음으로써 제헌헌법에 새겨진 당시의 여러 독립투사들이 꿈꾸었던 진보적, 평등 정신을 오늘날 실현하는 발판으로 삼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숨은 설계자, 신익희와 조봉암

대한민국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한 가지 관문이 있다.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이승만을 비판하고서도 대한민국의 탄생을 긍정할 수 있을까? 작가는 가능하다고 답한다.

대한민국의 국부를 이승만이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사실 국부가 이승만이냐는 논쟁 이전에, 나라에 국부가 있어야 한다는 발상부터가 매우 구시대적인 사고다. 하지만 정부 수립에서 큰 역할을 한 주체가 누구냐는 질문은 충분히 생각해 봄직하다.

작가는 이승만 혼자서는 대한민국이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특히 조봉암과 신익희가 있었기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인 조선공산당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세력이 모인 한국독립당은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하지만 각각 공산당의 조봉암과 한독당의 신익희가 정부 수립에 찬성함으로써 정부 수립은 일정 정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좌우 이데올로기가 극한에 달하던 시절에 남북 분단은 조선 몇 사람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북쪽은 이미 김일성의 체제가 확고해지고 있었다.

그런 시국에서 조봉암과 신익희의 남한 정부 참여는 어쩌면 현실주의적 노선이었다. 그 때문에 조봉암과 신익희는 옛 동지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정부 수립에 참여했기에 이후 이승만과 한민당의 독주를 내부에서 비판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있을 때, 신익희와 조봉암은 각각 국회의장과 국회부의장으로서 민주당과 진보당을 이끌었다. 둘 다 대통령선거에 나가 이승만과 대결하기도 했다. 그만큼 둘은 초기 대한민국에서 설계자로서, 견제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장관을 수행하면서 농지개혁을 이끌어냈다. 조봉암은 과감하게도 좌파 단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출신의 진보 경제학자 강정택, 강진국 등을 농림부 차관, 농지국장으로 기용해 농지개혁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평년작 기준으로 한 해 소출의 3할(이전의 소작료에 비하면 훨씬 낫다)을 5년에 걸쳐 지가로 상환하는 조건으로 농지를 분배하니, 어떤 농민도 지가 상환의 부담 때문에 자기에게 분배된 농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강수 교수에 따르면, 1960년까지도 토지 소유의 평등 지수는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었다." -p.366

조봉암의 농지개혁은 합리적인 분배 정책이자, 한국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진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세계은행 경제 정책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1960년 시점의 토지 분배 지니계수가 낮을수록 그 후 40년간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높다고 한다. 방한 당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비결로, 50년대에 시행된 농지개혁을 꼽기도 했다.

역사에 발을 디딜 때 진보의 길은 열린다

이처럼 작가는 대한민국의 탄생을 긍정한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을 긍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승만도 대한민국 역사의 일부다. 그러나 작가가 진정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한민국은 김구, 조소앙, 여운형을 비롯한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이 담긴 나라이며, 조봉암이 이끌어 낸 농지개혁의 평등 정신에 바탕한 나라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의 유전자를 갖고서 앞으로도 이를 실현해야 할 소명을 가진 나라다.

"우리가 '평등'을 말하기 위해서는 '평등'이 이미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존재하였음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미래는 과거의 회귀이고, 미래는 과거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희망은 현실에서 근거를 가져야만 관념의 유희로부터 벗어난다." -p365.

작가의 이 말이 바로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이자, 이 책의 의의가 될 것이다. 현재와의 접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 책을 읽을 때,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보다 평등한 세상을 향한 귀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주대환 지음,
나무나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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