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슬리퍼 끄는 소리, 무서워 숨이 턱 막혔어요"

[선감도의 비극 ⑦-1] 양어머니의 학대, 도망치던 순간이 악몽이 되어

등록 2017.07.06 15:26수정 2017.07.0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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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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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 막사, ⓒ 이민선


"제 말 안 믿어지죠?"

이 말에 무심코 "네!"라고 대답했다가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그럼 그만합시다. 믿지 못하는 사람한테 말해서 뭐해!"라며 실망스러운 듯 입 언저리를 씰룩거렸다. 다행히 잠시 뒤 감정을 추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증거가 될 만한 서류 같은 거 없나요? 저는 사실만을 써야 하니까요!"

이렇게 말했다가 또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실수하셨네!"라며 다시 입을 닫았다. 급히 '그런 뜻이 아니고, 증거가 있으면 더 신뢰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불쾌했다면 사과합니다'라고 수습 멘트를 날렸다. 그는 "뭐 그렇다고 사과할 일은 아니고"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쁘시겠지만, 내 평생 한이니까.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죽음으로 증명하라고 하면 나 죽어 드릴게."

내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렸던 것일까! 아니면 조급함이 서렸던 것일까. 그가 소리치듯 한 느닷없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잘 듣고 있어요'라고 해야 하는데,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터뷰가 5시간 넘게 이어지면서 나 또한 지쳐가고 있었던 탓이다. 소리를 한 번 치고 난 뒤에 속이 후련해졌는지, 그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처절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지옥의 소년 수용소 안산 '선감학원'과 한국의 홀로코스트로 알려진 부산 '형제복지원'을 모두 거친 태장희(52세)씨와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7시간 넘게 이어졌다.


인터뷰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이러다가 숨이 멎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그의 열악한 건강 상태였다. 갑자기 힘이 몽땅 빠져 나가 버린 듯 목소리가 잠겨 들기도 했고 폐가 찢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기침을 해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공연한 일을 벌여,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육신은 죽어 가는데 정신은 놀라울 만큼 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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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희씨 다리, 지금은 훨씬 더 상태가 안좋다. ⓒ 태장희


그를 지난 6월 28일 대전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인터뷰가 정말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병색이 깊어 보여서다. 오른쪽 눈은 거의 감겨 있고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부풀어 있었다. 스타킹 사이로 보이는 다리 빛깔도 거무죽죽했다.

그를 괴롭히는 병마는 뇌종양, 심부전 등 듣기만 해도 혀를 차게 되는 무시무시한 것들이다. 그가 내민 진단서(2013년 발급)에는 '고혈압, 당뇨, 통풍, 심부전, 진폐증, 뇌종양'이라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호흡곤란 등의 증상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며, 급사의 위험이 있다'라는 의사의 소견도 있었다.

이 병마와 그는 수년째 함께 살고 있다. 의사는 이미 진단서를 발급한 지난 2013년에 길어야 3~6개월 정도 살 수 있으니 (삶을) 정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 있다. 더군다나 그의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했다.

"내 몸은 이미 죽어 있어요. 그때(2013년)는 그래도 시력은 있었는데, 지금은 시력도 거의 없어요. 누우면 숨을 쉴 수가 없어 눕지도 못해요. 이 상태로 수년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한계치를 이미 넘어 섰어요. 어째서 저에게 24시간 고통 받으면서, 잠 한 번 편히 잘 수 없는데, 이토록 명료한 의식을 지금까지 주시는지! 이 몸을 가지고 버티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한다는 것만 알면 좋겠어요."

이 말과 함께 그의 처절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돈암동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네 살 터울 그의 형과 그를 잠시 이모가 맡아 길렀지만, 생활이 어려웠던지 어느 날 그를 홍씨 성을 가진 아들 없는 종갓집 '업둥이'로 보내 버렸다. 포대기에 싸서 홍씨 대문간에 버린 것이다.

이것도 장성한 그가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해 한때 잘 나갈 때 사설탐정을 고용해 알아낸 사실이다. 그 전에는 이마저도 알지 못했다.

치매 걸린 할머니 송곳으로 찌르라 강요, 갈가리 찢긴 동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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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희 씨 어릴적 사진. ⓒ 태장희


그의 양부모는 그에게 홍장희라는 이름을 지어 주기는 했지만, 그를 홍씨 집안 자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업둥이를 내몰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이 두려워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했다.

"누군가 저를 안아준 기억이 없어요. 늘 맞을까 봐 두려웠고요. 그곳에서 10살, 광명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도망쳤는데, 지금도 도망치던 날 기억이 생생해요. 어렸을 때는 그 날 일이 악몽이 되어 자주 나타나기도 했고요."

그를 심하게 학대한 것은 양어머니였다. 학대는, 그의 양할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완전히 역전이 된 거죠. 논 두 마지기에 팔리듯 시집와서는 아들 못 낳는다고 시어머니한테 엄청난 학대를 받다가, 치매에 걸리자마자 복수를 시작한 거예요. 툭하면 아무 이유 없이 할머니를 꼬집고 깨물고. 전 무서워서 말릴 수도 없었어요. 나중엔 송곳으로 찌르기까지 했는데, 언제부턴가 저한테 찌르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하지 않으면 그 송곳으로 저를 찔렀고요. 무서움에 덜덜 떨며 할머니를 찌르면서 제 동심은 갈가리 찢어졌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양어머니의 학대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남편이 툭하면 새벽에 들어왔는데, 그때까지 저를 무릎 꿇려 놓는 거예요. 밥도 못 먹게 하고요. 힘들어서 다리를 풀면 그 두꺼비 같은 손으로 '빡' 그러면 저는 그냥 날아가요.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여자 슬리퍼 끄는 소리였어요. 그 소리만 나면 저는 숨이 막혔어요. 넥타이를 제 목에 감고 발로 제 어깨를 누른 뒤 당겼는데, 혀가 다 빠져 거품 물고 죽게 될 정도가 되면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거예요. 이거 한참 하다 지치면 돌아가요. 그러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지요. 너무 어리니 대항할 수도 없고 분노할 줄도 모르고. 그저 두렵기만 한 거죠. 도망칠 때까지 제 일상이 이랬어요."

어느 날, 어린 홍장희가 '(학교에서) 엄마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말하자, 양어머니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양어머니의 손에는 불에 벌겋게 달궈진 연탄집게가 들려 있었다. 그의 몸을 숱하게 아프게 했던 무서운 연탄집게였다. 그가 10살 된 겨울에 벌어진 일이다.

"5원짜리 동전을 꺼내려고 학교 스케이트장 얼음을 깬 적이 있는데, 그 일로 학교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고, 엄마 모시고 오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말을 전하자 그 시뻘건 연탄집게로 제 배를 인정사정없이 찔러 버렸어요. 갈 데까지 간 거죠. 가학증은 갈수록 심해지잖아요."

개밥 뺏어 먹으며 서울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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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극한의 강제 노력 또한 수행해야 했다.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그때 "도망쳐"라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세 들어 살던 새댁이었다. 소년의 머리에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새댁은 "애한테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악을 썼다. 그리고는 "너 여기 있으면 죽는다"라고 소리치며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소년은 죽을 힘을 다해 대문으로 내달렸다. 양어머니가 무어라 소리치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는 사이 신발 한 쪽이 벗겨졌다.

소년은 그 길로 버스를 얻어 타고 서울 관악구 신림동까지 도망쳤다. 시장통에 떨어져 있는 배추 잎사귀를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그 잎사귀에서 나온 즙으로 살에 눌어붙은 옷을 떼어냈다. 그러나 세상은 10살 어린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시장 경비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혀 신림동 파출소를 거쳐 봉천동에 있는 한 아동 보호소에 가게 된다.

그곳은 천국이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여자 선생님이 있었고 먼저 말을 걸어준 예쁜 여자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친절한 여자 선생님은 집 전화번호를 대라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그는 결국 집 전화번호를 말해 버렸다. 다음 날 그의 양부모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끌려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목을 죄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뒷산으로 뛰었다. 밤낮없이 뛰다 보니 서울 동작구 흑석동이 나왔고 한강 다리를 넘자 서울역이라는 곳이 나타났다. 서울역까지 가는 동안의 배고픔은 견공들이 해결해 줬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해, 미안해' 하자 인심 좋게도 견공들은 자기의 밥을 뺏어 먹는 소년을 물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와 양부모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먼 훗날 마흔 줄이 넘은 홍장희가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딱 한 번 홍씨 일가와 연락이 닿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독한 악연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일이었을 뿐이다. 양부모인 홍씨 집안에 연락을 한 것은 병원이었다. 호적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홍씨 측에서는 매정하게도 병마에 휩싸인 홍장희에게 '그런 아들 없다'며 '유산 상속 문제도 있으니 호적을 파가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 홍장희에서 태장희로 바뀐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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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형제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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