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동안 531명 사망, 시신은 의대 실습용으로

[선감도의 비극 ⑦-2] 박정희 정권이 부랑인을 잡아 가둔 이유는?

등록 2017.07.06 15:26수정 2017.07.0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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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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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에서 생활하며 산을 깎아 건물을 짓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3년 6개월 동안 건물 약 18채가 세워졌지만,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보호자 없는 10살 소년에게 서울역은 무서운 곳이었다. 고사리손을 노리는 검은손이 곳곳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닥'하는 소리가 나자 소년 홍장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넝마주이가 들고 다니는 집게가 그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넝마주이는 다짜고짜 소년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소년이 "왜 그래요, 왜 그래요" 하며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자 넝마주이는 자신의 발뒤꿈치로 소년의 발등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소년은 아픈 발을 만질 새도 없이 깨금발을 한 채 넝마주이 손에 질질 끌려갔다.

소년이 끌려간 곳은 서울역 앞 창녀촌 인근에 있는 근로 재건대 4소대라는 넝마주이 본거지다. 까불이라는 별명의 넝마주이가 대장이었다. 앵벌이 소년·소녀와 넝마주이 40여 명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소년에게 그곳은 아주 낯선 세상이었다.

"앵벌이를 나가기 전에 교육을 하는데, 외울 게 정말 많았어요. '어머니는 날 낳으시고 3일 만에 죽고...' 42년이 지났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이거 한 다음에 '타박네야' 같은 노래 몇 곡 부르고, 그 다음에 손을 내미는 거지. 부끄럼을 떨치게 하려고 일주일 넘게 소주를 한 대접씩 강제로 먹였는데, 토하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 그 일(앵벌이)이 꼭 100년 전부터 내가 했던 일처럼 익숙해져 버려요."

앵벌이에게는 할당이 있었는데, 하루 5천 원이었다. 그 돈을 바치지 않으면 몽둥이가 날아왔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발을 주로 때렸는데 발바닥도 아프지만, 발가락, 특히 새끼발가락을 맞을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소질이 있었는지, 소년 홍장희는 돈을 아주 잘 버는 앵벌이로 커갔다. 그가 구슬픈 멘트를 날리고 노래를 부르면 한 달 내내 공장에서 먼지 마시며 번 돈을 봉투째 손에 쥐여주는 누나도 있을 정도였다. 차마 그 돈을 받을 수 없어 '주지 말라'고 속삭였다가 감시자인 '야방이'에게 들켜 일주일 내내 죽도록 맞은 적도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절제해야 했다. 덜 슬프게 이야기하고, 덜 슬프게 노래하는 절제를.


12살 어린 나이에 몸을 팔아야 한 앵벌이 소녀들

한국 최대 인권유린 사건으로 손꼽히는 '형제복지원', 그곳에 한종선씨가 1984년 입소할 당시 찍은 사진이다. 당시 한씨의 나이는 아홉살이었다. ⓒ 한종선


12살에서 16살 정도 되는 앵벌이 소녀들도 있었다. 소녀들은 그 어린 나이에 몸도 팔았다.

"손님을 받고 나면 몇 푼 떨어지는 돈으로 과자도 사주고, 심하게 맞으면 말려주기도 하는 착한 누나들이었는데. 어떤 누나는 내가 하도 맞으니까 그만 때리라고 대들다가 맞아서 눈알이 빠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름도 모르고!"

내 얼굴에서 불신이 엿보인 것일까! 그는 "믿기 어렵겠지만, 공장에 돈 벌러 온 여자 붙잡아서 윤간한 다음 창녀촌에 팔아먹고, 남자는 잡아서 새우젓 배에 팔고, 어린 애들은 관절 부러뜨려서 앵벌이 시키고 하던 그런 시절 이야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앵벌이 생활이 싫어 여러 번 도망을 쳤지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10살 꼬마가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청량리로 도망쳐도 성북동으로 도망쳐도,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넝마주이)은 귀신같이 찾아냈다. 어느 날인가는 넝마주이가 아닌 경찰이 소년 홍장희를 붙잡았다. 경찰은 그를 응암동 '서울아동보호소'에 넘겼는데, 그곳은 근로 재건대보다 더 험한 곳이었다.

"거기 가니까 이상한 놈들이 더 많은 거예요. 열대여섯 살 먹은 놈들인데 길거리에서 닳고 닳은 악마 같은 놈들이라 인간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다 시키는 거예요. 항문성교는 기본이고 입으로 그곳을 빨게 하고, 밥도 뺏어 먹고. 수사, 수녀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들도 두려웠어요. 걸핏하면 탁구채 같은 거로 때리니까요. 제일 힘든 거는 갇혀 있다는 것이었고요. 앵벌이 할 때는 그래도 내 발로 어디든 걸어 다닐 자유는 있었거든요."

소년 홍장희는 이때부터 탈출하고 붙잡히기를 반복한다. 서울아동보호소를 탈출했다가 근로 재건대에 붙잡혀 죽도록 맞은 다음 다시 앵벌이를 하고, 그러다가 경찰에 붙잡혀 다시 서울아동보호소에 갔다.

부랑인 청소, 철권통치로 무너진 정권의 정당성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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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희, 산을 여행하다 문막에 있는 기천문에 입문, ⓒ 태장희


그런데 어째서 경찰은 거리의 소년들을 이렇듯 결사적으로 잡아들인 것일까?

그 이유는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이 영구 독재를 하기 위한 철권통치를 했기 때문이었다. 거리의 소년 홍장희가 경찰에게 툭하면 붙잡힌 75년 당시는 유신독재의 절정기인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였다. 긴급조치는 대통령 명령 하나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초헌법적 조치다.

이렇게 전 사회적으로 통제가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시행된 게 부랑아 등을 잡아 가둘 수 있는 근거인 내무부 훈령 제410호(부랑아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다.

그렇다면, 부랑아를 잡아 가둠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얻을 수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철권통치로 인해 무너진 '정권의 정당성과 존재 이유회복'이었을 것이다. 역대 독재 정권이 민심을 얻기 위해 부랑인 청소, 범죄 척결 등을 단골로 써먹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쓰였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내무부 훈령 10조에서 정의한 부랑아의 정의를 보면 알 수 있다. 해석에 따라 거의 모든 시민이 부랑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부랑인의 범위가 넓다.

부랑인 :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역, 버스, 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방해하는 자."

부랑인에 준하는 자 :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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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들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집단 삭발하고 있다. ⓒ 남소연


소년 홍장희가 자꾸 도망치자 서울아동보호소 측은 그를 부산에 있는 '형제복지원'이라는 곳에 보냈다. 그곳은 거친 삶을 이어온 소년 홍장희에게도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때리는 것도 차원이 달라요. 아무리 세게 맞아도 신음조차 낼 수 없어요. 앗! 소리라도 나오면, 그건 죽음이에요. 말 안 들으면 결핵 환자가 있는 결핵 소대에 집어넣어요. 10일이면 결핵 다 옮아요. 병에 걸려 죽으면 그만이고요. 맞아 죽기도 하고 병에 걸려 죽기도 하고... 죽으면 병원에 의학 실험용으로 팔았고요. 먹는 건 또 어떻고요. 깡보리에 배추 소금국. '쇼팅(쇼트닝)'이라는 기름을 꼭 먹어야 했어요. 그걸 먹어야 얼굴에 기름기가 흐른다며, 강제로 먹였는데, 정말 니글니글합니다. 그거 안 먹어 봤으면 형제복지원 사람 아닌 거예요."

형제복지원에 관한 그의 기억은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주)'가 지난 2013년 펴낸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라는 사건 사례집에 그 참상이 잘 기록돼 있다.

"형제복지원은 전국 최대 부랑아 수용 시설로 지난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맞아 죽고 35명이 탈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여 암매장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서 12년 동안 531명이 죽었다.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 해부 실습용으로 팔려 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원장 박인근은 매년 20억 원의 국고 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을 무상으로 노역시키고 부실한 음식을 제공하여 막대한 금액을 착복했다. 또한, 자신의 땅에 운전 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직원 5명이 구속되었다." - 사례집에 수록된 국가기록원 기록

그러나 이렇듯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른 박인근 원장에 대한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의 비호 아래 그는 수감 중에도 사우나를 하는 호사를 누리다가, 2년 6개월이라는 짧은 형을 받았다. 추징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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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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