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탄에 날아간 자유, 한이 되어 바다에 뿌려진 소년의 피

[선감도의 비극 ⑦-3] 형제복지원 탈출하자, 선감학원이라는 지옥이

등록 2017.07.06 15:26수정 2017.07.0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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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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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생 사진 ⓒ 이민선


'앞으로 가, 우 향 앞으로 가, 좌 향 앞으로 가, 뒤로 돌아 가.'

희한하게도 형제 복지원은 모든 게 군대식이었다. 관리자를 소대장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군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고 있었다. 군인들이나 하는 제식 훈련도 거의 매일 받아야 했는데, 말이 좋아 훈련이지 사실은 두들겨 맞는 시간이었다. 해서, 제식 훈련 시간에 친구와 이야기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숨막히는 공간에서도 우정은 꽃피었다.

"가야라는 아이였어요. 이름은 몰라요. 서로 호감이 있었어요. 제식 훈련을 하면서도 계속 눈빛으로 이야기했는데, 뭐가 통했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문 쪽으로 뛰었고, 7m 정도 되는 벼랑을 뛰어내렸어요. 난 낙엽이 있는 데로 뛰어내려서 열 바퀴 정도 구른 다음 일어섰는데, 가야는 그냥 엎어져 있는 거예요. 가서 보니 얼굴이 다 뭉개져 있어요. 착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자기 무릎에 얼굴이 찍힌 거예요."

첫 탈출은 이렇게 해서 실패했다. 소년 홍장희가 11살 때 일이다. 홍장희는 목덜미를 잡혀 끌려갔고, 가야는 다리를 잡혀 시체처럼 끌려갔다. 지독한 매질이 시작됐다. 누군가 허리를 걷어차자 11살 소년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구석으로 처박혔다. 그래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살려 달라고 손을 비비는 순간 머리에 천둥 벼락이 떨어졌다. 곡괭이 자루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 가야가 옆에 누워 있었다. L자로 몸이 꺾인 채였는데, 눈이 하얗게 뒤집힌 채 숨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 만져 보니 머리카락이 아닌 피 범벅된 머리 껍질이 만져졌다. 곡괭이에 찍혀 머리 가죽이 벗겨진 것이다.

어디선가 라면 냄새가 났다. 소대장이 펄펄 끓는 라면을 들고 다가왔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가야 배를 그가 콱 밟았다. 가야 입이 벌어졌다. 그 입에 라면 국물을 붓자 가야 눈에서 김이 새어 나왔다. 가야 몸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가야가 죽었다. 다음은 홍장희 차례다. 소년은 영혼의 찌꺼기까지 모아 살려 달라고 빌었다. 소대장은 가만히 노려보다가 "조용히 처박혀 있어"라고 차갑게 한 마디 내뱉고는 사라졌다.


형제복지원 탈출하자, 선감학원이라는 지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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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선감학원 시찰 모습. ⓒ 이민선


이렇게 첫 탈출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채찍에 맞으면서 하는 가혹한 노동을 견딜 수 없었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직장도 있고 가족도 있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술 마시고 벤치에 쓰러져 자다가 잡혀 왔는데, 집에도 안 보내주고 머리 박박 민 다음 매일 낚시공장에서 일만 시키니까 공개적으로 항의를 한 거죠. 원생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소대장이 그 사람 머리를 수도 없이 내리쳐서, '뻑' 소리가 나고 두개골 다 깨졌는데도 그 머리를 군홧발로 밟고! 명백한 살인이죠. 그 사람 수박 됐을 거예요. 시체를 토막 쳐서 뒷산에 있는 송아지만 한 셰퍼드들한테 준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을 셰퍼드한테 수박 준다고 했어요. 이 꼴보고 질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가 공포인 거예요."

탈출 기회는 1년여가 흘러 12살 때 찾아왔다. 합창단 일원이 되어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바깥세상으로 나왔을 때를 놓치지 않고 소년은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해, 성공했다. 형제복지원에 잡혀간 지 2년 만이었다.

소년은 익숙한 서울로 가지 않고 인천으로 향했다. 서울과 달리 인천에는 아이들 붙잡아서 앵벌이를 시키는 이른바 '양아치'가 거의 없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인천 여객 터미널에서 소년은 목발이라는 별명의 구두닦이를 만난다. 그는 다리 장애가 있어 실제로 목발을 짚고 다녔다. 한 끼만 먹여주고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하자 그는 흔쾌히 응했다.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소년은 그를 형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소년은 닦을 구두를 모아 구두닦이에게 가져다주는 이른바 '찍새'를 하게 된다.

"야 너 이리와 봐!"

경찰이었다. 이 말이 소년을 다시 수렁으로 내던졌다. 구두닦이 스승인 목발이 출근하기를 기다리며 일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경찰은 다짜고짜 등 뒤에서 소년의 목을 감고는 팔을 꺾어 차에 밀어 넣었다. 채 5분도 안 돼 부두가 나왔고 소년은 배에 실렸다. 도착한 곳은 지옥의 소년 수용소 선감학원이었다. 소년의 나이 13살, 형제복지원을 탈출한 지 1년도 안 돼 또 지옥에 가게 된 것이다.

첫 탈출에 실패, 이틀 동안 축구 골대에 묶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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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 이민선


"형제복지원보다는 좀 덜했지만, 그곳도 지독한 노동과 폭력, 그리고 성폭행 어휴! 개척사와 창조사라는 숙소가 있었는데, 창조사는 좀 큰 애들이 있는 곳이고, 개척사는 저 같은 어린애들이 있는 곳이었어요. 창조사 애들이 밤마다 개척사 애들 데리고 가는 거예요. 한마디로 수청을 들게 하는 거죠. 워낙 험한 곳만 다니다 보니 저는 깡이라는 게 있어서 당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동생들 당하는 것까지 막아 줄 수는 없었어요. 그 새벽에 어기적거리고 들어온 애, 다 찢어진 '똥꼬' 닦아주고. 에이그 잘 버텼는데 흑!"

상황이 이렇듯 험하니, 소년의 머리에 '역시 살 길은 탈출뿐'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첫 시도는 선감도에 여행을 온 대학생들에게 목숨 걸고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대학생들에게 선감학원의 참상을 설명하고는 인천에 가서 구두닦이 스승인 '목발'을 찾아 자기가 이곳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 달라고 사정했다.

분명 '정말이냐고, 그렇게 많이 맞고 학대받느냐'고 물으며 분개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대학생들은 인천으로 가지 않고 다음 날 선감학원을 찾았다. 사무실에 가서 선생에게 자기가 전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정말이냐?'고 묻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순진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선생은 그 학생들에게 "이 애가 정신질환이 있어서 학생들을 힘들게 했네"라고 둘러댔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갔다.

대학생들이 돌아갔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꼼보라는 별명의 선생은 매질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소년을 축구 골대에 묶었다. 매질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을 준 것이다. 그렇게 이틀 동안 소년은 묶여 있었다. 따가운 햇볕에 어깨살이 다 벗겨져 쓰라렸지만, 소년의 몸을 가려줄 그늘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 번째 탈출은 치밀한 준비를 거쳐서 단체로 이루어졌다. 팔에 스티로폼을 묶고 플라스틱 세숫대야 두 개를 뒤집어 붙여서 물에 잘 뜨는 튜브처럼 만들었다. 새벽 4시, 원생 8명은 살며시 몸을 일으켜 미리 준비한 장비를 챙겼다. 그 전에 툭 하면 고자질을 해서 동료를 곤란에 빠뜨린 '간신'이라는 별명의 원생 몸을 묶고 재갈까지 물려 화장실에 가뒀다.

소년들은 갯벌을 지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장비가 있어 물에 잘 떠서 다행스럽긴 한데, 어찌 된 일인지 몸이 건너편 부두가 아닌 넓은 바다로 쓸려갔다. 망망대해로 한참 떠내려갈 때 '정지, 암구호!'라는 소리가 들렸다. 바다를 지키는 군인들이었다. 소년들이 암구호를 알 리가 없었다. 잠시 후 서치라이트가 환하게 켜지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총소리가 들렸고 물이 튀어 올랐다. 소년 두 명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명을 사살하고 나서야 적군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했는지 군인들은 갈고리로 소년들을 하나둘 건져 올렸다.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 두 명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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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 이민선


"총알이 날아올 때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두려움에, 잡혀서는 총살당하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어요. 선감학원 원생이라고 하니까 무릎 꿇려 놓고 개머리판으로 찍고 조인트(정강이)를 살이 다 파일 정도로 막 까고. 정말 무지무지하게 맞았어요. 선감학원에 와서도 엄청나게 맞았는데 그때 어깨가 탈골돼서, 지금도 팔이 뒤로 돌아가지를 않아요."

어릏듯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소년은 탈출을 멈출 수 없었다. 두 번의 탈출로 꼼보 선생은 물론 같은 원생들도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해서, 그가 설 자리는 선감학원 어디에도 없었다. 탈출할 때마다 연대 책임을 물어 전 원생에게 지독한 폭력이 가해졌으니, 원생들이 그를 미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 번째 탈출에 실패했을 때는 동료 원생들한테 조리 돌림을 당했다. 침 한 번 뱉고 따귀 한 대 때리는 기분 나쁜 벌이었는데, 원생들은 함께 고생하는 동료의 따귀를 때리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험한 환경에 시달리다 보니, 그들도 정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뒤 20일 만에 그는 네 번째 탈출에 성공한다. 선감학원에 붙잡혀 온 지 10개월여만이었다.

"플라스틱 물병, 콜라병을 투망에 담아 묶었더니 아주 물에 잘 떴어요. 그거 붙잡고 바다 건너서 마산포로 갔어요. 그땐 혼자였어요.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었는데, 한 번 실패하고 나니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탈출에 성공해 다시 자유의 몸이 됐을 때 그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그 뒤의 삶을 그는 '야수의 삶'이라 표현했다. 어린 몸을 지키기 위해 늘 칼을 차고 다녔고, 한때는 남대문 '철이파'를 이끌기도 했다. 복수하기 위해 혼자 칼 쓰는 법을 익혀 부산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을 찾아갔지만, 복수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형제복지원 담은 여전히 높고 무서웠으며, 선감학원은 이미 사라져 아무도 없었다. 선감학원은 1982년에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사람을 찌르고 소년원에 가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은인과 같은 사람을 만나 공부를 시작해 2년여 만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소년원에 가기 전 초등학교 3학년이 최종 학력이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다. 그 덕에 그는 특별 사면을 받아 21살 나이에 사회에 나오게 된다.

억울한 구치소, 나와 보니 여자는 떠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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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2일, 만화가게 운영당시 모습. ⓒ 태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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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희. 불교에 귀의했을 때 모습. ⓒ 태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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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희. 승려를 포기하고 중국에서 일할 때 사진, ⓒ 태장희


그 뒤의 삶은 그래도 그 전보다는 평탄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큰 외항선을 타고 전 세계를 누벼 보기도 했고, 일본에서는 사업에 성공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의 덫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서른을 훌쩍 넘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0년 3월 일본에서 번 돈으로 청주에 큰 만홧가게를 차려서 운영하던 때였어요. 제 곁에 여자도 있었고요. 친구를 만나 인천에서 술을 마시는데 건달 같이 생긴 사람이 술에 취해서 저한테 팔씨름하자며 시비를 거는 거예요. 상대를 안 했더니 다짜고짜 저를 때려서 코뼈를 부러뜨렸어요. 112에 신고했더니 순찰차가 와서 그를 체포했는데, 서로 아는 눈치였어요. 순찰차를 어떻게 열었는지 범인이 도망을 쳤어요. 그런데 경찰이 잡을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항의를 했죠. 왜 안 잡느냐고. 도망 방조한 것을 경찰청에 알리겠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그랬는데도 '그냥 가시라고'하며 저를 달래더니 가버렸어요. 억울해서 다시 112에 전화해 '경찰이 출동해 범인을 잡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놓아 주었다'고 신고했어요. 그러자 좀 전의 경찰들이 다시 와서는, '이러면 좋을 게 없다. 나중에 우리가 알아서 잡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일단 파출소로 가자고 해서, 저는 싫다고 하며 경찰청으로 간다고 택시를 잡으려 했는데, 갑자기 넘어뜨리고 수갑을 채워 저를 연행했어요."

파출소에 가서도 계속 항의를 하자 경찰은 공무집행방해와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기물 파손 혐의로 체포한다며 그를 유치장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구치소에서 대법원까지 가는 긴 법정 투쟁을 벌였지만,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에게 무죄가 아닌 벌금 700만 원을 선고했다.

특이한 점은 벌금 700만 원이 나오는 무겁지 않은 사건을 재판하는데, 1심에서만 6개월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홍장희씨는 인천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그것도 독방에.

"너무 억울한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구치소 철문을 차는 것뿐이었어요. 철문을 3개나 부수었어요. 그래서 제 다리가 지금 이런 거예요. (그의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 있다. 색깔도 검다) 끔찍한 것은 0.98평 독방에 키 1m 90cm 몸무게 160kg 정도 되는 애를 밀어 넣은 거예요. 그것도 밥 안 준다고 엄마를 죽인 미친놈을.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살아요. 밥도 그놈이 다 뺏어 먹고 패악질 부리고. 그러니 문을 찰 수밖에 없지."

6개월 뒤 구치소에서 나왔을 때 그의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자도 떠났고 만홧가게도 망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산에 들어가 스님들과 3년을 수행했고, 그 넓은 중국을 떠돌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증오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뇌종양, 심장병, 이거 증오를 지워버리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그는 지난 2008년 중국에서 쓰러진 뒤로 병마와 싸우고 있다. 심장병 때문에 수년째 편안히 눕지를 못한다.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에게 양부모 측은 유산 상속 문제도 있으니 성을 바꾸라고 강요했다. 그는 현재 어릴 적 이름인 홍장희가 아닌 태장희로 고달픈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선감학원 #형제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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