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에서 옛사랑 만나고... 98번 국도로 달려갔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자전거 여행 36] 무더위 잊고 달리게 되는 광릉수목원로~왕숙천

등록 2017.07.09 11:09수정 2019.06.2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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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터널 숲속을 지나는 광릉수목원로. ⓒ 김종성


전철이나 지하철을 자주 타고 다니다 보니 아주 가끔씩 아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얼마 전 '애마'인 자전거를 대동하고 전철을 탔다가 추억과 망각 사이에 간직했던 Y를 만났다. 빨간색 몸체에 바퀴가 작은 내 자전거 덕택에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잠깐 동안, 상쾌한 숲과 그늘이 그리운 날씨여서 그랬는지 함께 걸었던 숲길이 떠올랐다.

예전엔 광릉수목원이라 불렀던 국립수목원길. Y는 새소리가 들려오는 국립수목원의 빽빽하고 울창한 숲을 좋아했고, 난 국립수목원과 광릉, 봉선사를 따라 찻길 옆에 난 작은 흙길이 좋았다. 길이 작고 좁은 탓에 손잡고 걷기 좋았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는 말을 체감하게 한 길이었다.


Y를 태운 전철이 기약도 없이 어두운 지하 터널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그녀가 좋아했던 숲과 내가 좋아했던 숲길이 여전히 남아 있을까 궁금했다. 지난 1일, 애인만큼 정이든 자전거와 함께 그 숲과 길을 찾아 달려가 봤다.

정다운 시골길, 울창한 숲을 지나는 광릉수목원길

소담하게 흐르는 부용천 곁을 지나는 경전철역 효자역(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에 내렸다. 이곳에서 차도(43번 국도)를 따라 4km 정도 달리면 국립수목원으로 가는 들머리인 축석휴게소(혹은 축석검문소)가 나온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지도에서도 잘 안 보이는 함정이 있었다. 바로 야트막한 언덕길이 계속 이어지는 축석고개.

가파른 경사라면 아예 안장에서 내려 '끌바'(자전거를 끌로 간다는 자전거 용어)라도 하련만, 언덕 끝까지 자전거 여행자를 달리게 하는 교묘한 고갯길이었다. 다양한 차량들이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갔지만 겁을 주듯 경적을 울리는 차들은 없었다. 자전거 손잡이를 꽉 쥐고 차선 우측 끝에 그어진 흰색 선에 앞바퀴를 고정한 채 묵묵히 달리면 대체로 경적소리를 듣지 않는다.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에 오르막 고갯길을 달리는 자전거 라이더가 불쌍해서 경적을 누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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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수목원로에 자리한 오래된 옹기가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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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수목원로라는 별칭이 붙은 98번국도. 국립수목원, 광릉, 봉선사가 이어진다. ⓒ 김종성


차량들 바로 옆에서 국도를 달리다보면 대기오염의 주범을 코를 통해 알게 된다. 특히 경유를 쓰는 디젤 차량이 뿜는 매연은 저절로 숨이 멈춰질 만큼 지독하다. 자동차 회사들이 디젤차를 홍보하며 '청정 디젤'이란 표현을 하곤 하는데, 자전거 여행자에겐 '건강한 담배'라는 말로 들린다.


고개 끝에 다다르니 그늘 아래 야외 쉼터가 마련된 편의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길을 달려 지나는 운전자와 오토바이, 자전거 라이더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찬 음료를 마시며 쉬어 가고 있었다.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달려 닿은 축석휴게소에서 만난 98번 국도는 좀 특별한 찻길이다. 국립수목원, 광릉, 천년 고찰 봉선사를 지나는 10km 정도의 길로, 광릉수목원로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주변 풍경이 좋아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져 있지만, 이 길을 지나다보니 자전거탄 여행자에게 더 좋은 길이지 싶다. 일자로 쭉 뻗어 있는 길이 아닌, 구불구불 휘어지는 길이다.

갓길이 없는 좁은 국도다 보니 차를 타고 가면 맘에 드는 풍경이 나와도 잠시 멈추지 못하고 휙 지나가야 한다. 자전거를 탄 나는 오르막을 오르듯 느릿느릿 속도를 줄여 달리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달렸다. 갓길은 없지만 30km로 속도가 제한돼 있는데다 풍경이 좋아 차들이 천천히 달리는 덕택에 안전하게 자전거 라이딩을 즐길 수 있었다.

복숭아·토마토를 파는 길가 옆 과일 노점, 푸릇푸릇한 색의 송이들이 귀여운 포도밭, 자전거여행자를 친근하게 대해준 개가 지키는 옹기가게에서 아프리카 예술 박물관까지. 국립수목원을 향해 가는 국도변엔 정답고 오래된 풍경이 남아 있었다. 국립수목원(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앞 버스정류장에 자전거를 기대어 놓고 잠시 앉아 쉬어갔다.

수목원의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환영이라도 하듯 그늘을 내려주는 이 정류장까지 Y와 함께 버스를 타고 오곤 했다. 버스가 빨리 오지 않아도 좋은 국립수목원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는 '숲'이라고 말할 때 시원하고 서늘한 기분이 들어서 좋다고 했다. '난 너의 숯덩이 같이 까맣고 숱 많은 머리칼이 더 좋다'고 (속으로만) 말했다. 서울의 5배 크기로 돌아보는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함께 가는 꿈을 꿨지만 결국 이루진 못했다.

'광릉숲'이 품은 국립수목원, 광릉, 봉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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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빨리 오지 않아도 좋은 국립수목원 앞 버스 정류장.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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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천이 흐르는 원시림같은 국립수목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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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수목원로에서 보이는 울창한 국립수목원. ⓒ 김종성


국립수목원 입구엔 숲에서 갓 나온 듯한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돗가가 아직도 남아 있어 더위 속을 달려온 자전거 여행자를 기쁘게 했다. 약수 같은 물은 잘 마셨지만 수목원엔 들어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온 탓에 이곳이 사전예약제로 입장한다는 걸 깜박 잊은 거다. 더불어 수목원내 숲과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일정 인원 이상의 방문객은 받지 않는다.

수목원을 졸졸 흐르며 지나는 봉선사천 위 다리에서 숲을 바라보기만 했지만 크게 안타깝진 않았다. 매년 6월 광릉숲 걷기 축제를 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품은 광릉이 이어져서다. 국립수목원에서 광릉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엔 좁지만 걷기 좋은 정다운 흙길이 남아 있었다. 광릉을 지나 봉선사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한갓진 길이라 더욱 좋다.

자전거 페달을 최대한 천천히 돌리며 걷는 듯 달렸다. 온갖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터널처럼 펼쳐진 아름드리 고목들 사이로 불어오는 산소 바람을 마시며 달리는 기분이란…. 거의 매일 휴대폰으로 폭염주의보, 오존 주의보를 알려오며 밖에 나가지 말라고 겁을 주는 도심 속에 살다보니 이 길이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계유정난'이라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이 된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부인 정희왕후가 묻혀있는 광릉(光陵,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는 광릉 역사관에서 과거 광릉수목원이라 불렸던 국립수목원이 광릉 덕분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468년 세조의 능이 들어 선 이후 광릉의 사방 15리(6km), 약 3600ha의 주변 숲은 조선 말까지 엄격히 통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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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수목원, 광릉숲의 모체가 된 광릉.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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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면 연꽃으로 화사해지는 천 년 고찰 봉선사. ⓒ 김종성


일제강점기 땐 학술연구보존림으로 지정·보호됐고, 1997년에 국립수목원으로 독립했다. 광릉의 능림 일대를 총칭하는 '광릉숲'은 이렇게 수 백 년 동안 인간의 손길에서 보호받은 덕분에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숲속 나무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이 눈길을 끌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그래서 숲은 종이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 책을 아끼고 좋아해서 그런지 궁궐은 물론 무덤에도 나무와 숲을 울창하게 가꿨다.

매년 이맘땐 불교의 상징 연꽃 축제도 할 만큼 연꽃이 풍성하게 피어나는 천년 고찰 봉선사도 광릉과 인연이 깊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는 운악산 자락의 운악사라는 작은 사찰을 '선왕의 능(광릉)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는 뜻이 담긴 봉선사(奉先寺)로 이름을 바꾸며 큰 절로 확장했다.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제한다는 '숭유억불'을 기치로 삼은 조선시대지만, 오래된 신앙의 힘은 쉽게 사라지지 않나 보다. 세조 또한 만년에 왕위찬탈 당시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고뇌에 싸여 불문에 깊이 귀의했다고 한다.

봉선사는 큰 연못에 피어난 푸른 수련과 예쁜 연꽃으로 화사했다.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연못가에 서있는 아기 부처의 모습이 마치 디스코 춤을 추는 것처럼 재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불교용어가 나온 모습으로, 부처님께서 세상 만물의 이치를 알고 난 후 홀로 그것을 깨우쳤다는 두려움과 고독함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봉선사에서 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꽃이 혼탁한 흙탕 속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기독교)모태 신앙이라던 Y가 어쩐 일인지 부처님 앞에서 다소곳이 절을 했다.

왕이 묵어가고 잠든 명당 물줄기, 왕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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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하천 풍경이 남아있는 왕숙천.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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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하천 풍경이 남아있는 왕숙천. ⓒ 김종성


봉선사를 나오면 길은 자연스레 푸근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만난다. 왕이 묵었다는 뜻을 지닌 특별한 이름을 가진 왕숙천(王宿川). 길이 37.34km의 큰 하천으로,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해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든다. 옛부터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었던 명당수로 알려졌다.

태조 이성계가 여드레를 묵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세조의 광릉 안장 후 '선왕이 영숙(永宿) 즉 길이 잠든다'는 뜻에서 왕숙천이라 한다고도 전해지니, 광릉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물줄기임은 틀림없겠다. 하류쪽으로 가면 한국에서 제일 큰 능원(陵園) 동구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도 있다 보니 가히 왕들의 하천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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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숙천을 더 친근하게 하는 잠수교 풍경.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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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숙천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아파트. ⓒ 김종성


왕숙천 상류엔 새하얀 깃털을 한 백로들이 많이 살고 있어 흡사 왕족들처럼 보였다. 희고 호리호리한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거칠고 걸걸한 반전이 있는 텃새다. 동네 주민들과도 친한지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곁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닌다.

원래 철새였다가 아예 한강과 지천에 자리를 잡고 사는 노련한 물고기 사냥꾼 가마우지도 보였다. 잠수를 해 물고기를 잡는 새라 물 위에선 늘 날개를 양쪽으로 펴고 말려야 하는 특이한 새다. 하필 이런 새가 텃새로 정착을 하다니, 옆에 있는 오리나 백로, 왜가리들이 좀 불만스러워 보였다.

왕숙천 상류엔 정겨운 하천 풍경이 남아 있다. 다리 밑에 생겨난 반가운 모래톱 위에 앉아 동네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고, 어린 딸과 아버지가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걷고 있었다. 자전거 여행자도 물가에 들어가 손발을 담그며 쉬어가기 좋았다. 푸근한 하천 풍경과 달리 왕숙천 주위엔 큰 아파트 단지가 생겼거나 생겨나고 있었다.

왕숙천이 아니었다면 거대한 수용소처럼 보이겠구나 싶은 풍경. 오래되고 낡아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어느 잠수교 너머로 한창 짓고 있는 아파트들이 우뚝 서있었다. 은행에 큰돈을 빚져야 겨우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 같았다.

왕숙천이 좋은 것 중 하나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큰 다리보다 자전거가 더 많이 지나가는 작은 다리들이 더 많아서다. 그 가운데 비가 많이 내리면 잠기는 잠수교들이 눈길을 끌었다. 하천 바로 위에 있는 다리다보니 다리 위를 지날 때 왠지 정겨운 기분이 들고, 하천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주민들에겐 좋은 낚시터가 돼주기도 한다. 아이들부터 노인까지 잠수교 위에 자리를 잡고 낚시에 열중하는 모습이 정답다. 물고기가 안 잡힌다고 투덜대며 딴 짓을 하는 아이들을 보니 확실히 낚시는 어른들 놀이인 듯하다. 한강이나 다른 지천과 달리 왕숙천은 낚시를 허가한 곳이 많은지 잠수교 외에 하천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동구릉이 인근에 있는 경의 중앙선 구리역이 천변에서 가깝다. 

* 주요 자전거 여행길 : 의정부시 효자역 - 축석 휴게소 - 국립 수목원, 광릉, 봉선사 - 왕숙천 - 경의중앙선 구리역 
덧붙이는 글 제 블로그(sunnyk21.blog.me)에도 실었습니다.
#국립수목원 #광릉 #광릉수목원로 #봉선사 #왕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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