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험을 '격려' 소재로 삼은 조교, 심각하다

[24개월 병영 기록 ⑧] 군대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돌아보게 만든 훈련소 모습

등록 2017.07.11 21:24수정 2017.07.1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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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훈련병은 '메르스' 상황 알아선 안 된다?]

수료식을 앞둔 밤, 조교가 내무실로 들어왔다. 곧 있으면 제대할 말년 병장이었다. 훈계하러 들어온 건 아니었다. 훈련도 다 끝났겠다, 격려 차원에서 들른 거였다. 조교는 소대 인원 전부를 한 내무반에 불러 모은 뒤, 문을 닫고 말을 이어나가길 시작했다.

처음엔 훈련하면서 뭐가 힘들었냐, 조교에게 불만은 없었냐 등의 신변잡기 위주로 말을 꺼냈다. 이어진 말의 주제는 '성'이었다.

조교는 작정한 듯, 본인의 성 경험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말 속 묘사는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소대 훈련병을 모이게 한 뒤,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성 경험을 적나라하게 풀어내고 있는 건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밖에다 말하는 건 다른 일

물론 성생활은 사생활의 영역이고 마땅히 존중해야 할 부분이다. 허나 성 경험을 밖에다 말하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조교 자신과 여성 사이에 있던 그 적나라한 사적 상황을, 여성의 동의도 없이 그것도 소대에 무차별적으로 말로 내보낸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일방적인 말 가운데 여성은 상상의 존재에 머무르게 되고, 객관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격려'라는 명분으로 훈련병들의 주목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그 조교는 성 경험을 동원했을 것이다. 명분이 그럴듯해도, 해서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다. 이것은 여성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도구로 삼는 데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개인의 경험인데 뭘 심각하게 받아들이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적 소재와 성 경험은 겹치면서도 엄연히 다른 부분이다. 사적 소재는 개인이 중심이 되어 얘기를 꾸릴 수 있지만, 상대방과 함께한 성 경험은 개인만이 중심이라고 볼 수 없다. 함께한 대상도 고려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결국, 성 경험이란 건 아무렇지 않게, 어디에서나 퍼뜨릴 그런 성격이 아니다. 

말을 듣는 이들의 수는 웬만한 교실 강의 이상이었다. 조교는 교육을 하는다는 군인이라는 중요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강압적인 훈련소 분위기 아래, 조교의 이런 교육 같지 않은 말을 들은 훈련병들은 앞으로 사회에 나가 이런 말 정도는 꺼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군대에서 훈장이 '성 경험'인가

성생활을 타인의 동의도 없이 찍어 유포하는 것과, 성 경험을 역시나 동의 없이 다수에게 구구절절 풀어내는 건 유통의 매개가 다를 뿐, 비슷한 맥락의 일일 것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다수에게, 그것도 성생활을 같이 한 이의 인지 없이 이런 일이 행해진다는 점에서 조교의 이 같은 행동은 매우 심각하다.

말 도중에 상병 조교가 눈치 살금살금 보다 문을 열고 "사령관님 오셨는데요"라고 해도 조교의 말은 멈춰지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교육은 그렇게 강조하는데, 과거 성 경험을 마치 '훈장'인 양 꺼내는 이것은 훈련과 교육의 일환인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훈련병이면 훈련병답게 하라는 조교의 말처럼, 교육을 행하는 조교도 조교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까지의 얘기는 '결말'에 불과하다. 서막은 따로 있었다. 같이 훈련을 받다 보면 별의별 얘기가 들린다. 어느 훈련병 입에선 아무렇지 않게 '처음 만난 여성을 임신시키고 낙태를 시켰다'란 말이 천진난만하게 튀어나왔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마음이 심란했다.

'임신과 낙태를 시켰다'란 그 말엔 자랑스럽다는 뉘앙스가 흠뻑 담겨 있었다. 여성이 임신 뒤의 겪었을 감정, 낙태로 인한 고통은 원천 배제되어 있었다. 나만 즐겼으면 됐다는 극강의 '자기중심', 뒷일은 모른다는 극단의 '편의주의'가 여성을 소모품 취급하는 격이었다.

구태의 반복이었던 성교육

이런 얘기들이 내무반에서 공유되고 활개를 친다는 건 군대를 통한 '사회화'의 악습이었다. 군대에 '성교육'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복무 기간 2년 통틀어 훈련소에서 딱 한 번, 훈련 중후반에 받았다. 어느 단체 강사를 초빙한 거였다.

훈련소 성교육은 구태를 벗어나질 못했다. 수백 명의 훈련병들을 강당에 불러놓고 교육한다는 게 낙태 장면을 보여주는 정도였다. 급기야 "성폭력을 막으려면 너희들이 능력을 갖춰 여자친구를 사귀어라"란 말도 서슴지 않았다. 질의응답에서 몇몇 훈련병들의 항의가 이어진 건 물론이다.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서 군대의 목적을 살필 필요가 있다. 군대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있다. 국민엔 남과 여가 따로 없다. 제도와 편제상 군대가 '남성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말과 생각마저 '남성 중심'이어선 결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얘기한 것들이 십수 년 전 얘기도 아니고 불과 2년 전, 2015년의 모습이다.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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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조교 #공군 #성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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