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없는 무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34년 만에 무죄 확정... 역사에 남을 '고문조작'

등록 2017.07.10 22:05수정 2017.07.10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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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사진 속 인물들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 진실의힘 제공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

2017년 6월 29일 오전 10시 20분,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재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방법원 425호 법정. 법정을 가득 메운 가족들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귀 기울이고 있었다. 법정에 앉아 있어야 할 피고인들 자리에는 아들들이 앉아있었다.

판사는 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들을 일일이 지적하며, 그것이 과연 공소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34년을 기다려온 순간. 판사의 주문은 짧았다. "피고인은 무죄.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아버지, 들으셨지요!"

피고인석 최봉준(최을호씨의 아들)씨가 외쳤다. 그 순간 방청석을 메운 가족들은 박수를 치며 오래 참아왔던 속울음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부둥켜 안으며 "살아만 계셨더라면..." 눈물바람이었다.

그렇다. 지금 이 법정에 서서 마땅히 법원의 사과를 들어야 할 세 명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최을호씨는 마지막까지 간첩이 아니라고 외쳤지만, 끝내 사형 집행을 당했다. 최낙교씨는 서울지검 정형근 검사의 공소제기 후 구치소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최낙전씨는 9년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으나 경찰의 집요한 보안 관찰 감시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피고인 없는 슬픈 재심, 무죄 판결.

그날 법정에서 판사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국가가 범한 과오. 1982년 8월, 남영동 대공분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이 고문해서 간첩단으로 조작하고, 서울지검 공안검사 정형근이 적극 동조해서 간첩으로 기소한 사건. 재판 내내 고문을 당해서 허위로 자백했을 뿐, 간첩이 아니라고 호소한 피고인들의 주장을 외면한 채, 이근안의 수사기록과 정형근의 수사 그대로 판결문이 작성된 사건. 이른바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이다.

그 일은 1982년 8월,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작은 시골 마을, 김제군 진봉면 고사마을에서 벌어졌다. 해마다 이 마을에서는 8.15를 기념해 동네 축구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전날 밤 동네 어른 최을호씨가 낯선 사람들을 따라 갔는데 밤이 되고 다음 날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온 마을을 뒤졌다. 진봉지서에 행방불명 신고를 했다. 마을 이장으로 동네의 신임을 받아온 조카 최낙전씨도 숙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주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최낙전씨의 형 최낙교씨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 조카들도 8월 22일 아침을 기해 사라졌다. 몇 달 뒤. 그들은 '간첩죄'로 기소돼 법정에 세워졌다.

치안본부 대공분실 이근안의 '수사기록'

이들을 납치하듯 끌고 간 이들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이 속해있던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수사관들은 남영동 분실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된 9월 25일까지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채 고문수사를 자행했다.

수사관들은 이들의 '약점'을 이용했다. 약점은 1958년에 발생한, 도저히 피해갈 수도, 어찌해볼 수도 없었던 사건이었다. 최낙교씨와 최낙전씨는 형제이고, 최을호씨는 그들의 숙부. 일찍 부친을 여읜 두 형제는 숙부와 함께 큰 집에 모여 살았다. 1958년 4월, 6.25전쟁 당시 헤어졌던 숙부 최규인씨가 김제 고사리 최을호씨를 찾아왔다. 인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안부를 물었다. 1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온 최규인씨는 최을호씨에게 좋은 일자리를 봐뒀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최규인씨의 말과 달리 북한이었다. 돌아올 방법도 없어서 20일간 강제로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귀향했다. 최을호씨는 "북한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했고, 시간이 흘렀다. 7년이 지난 1966년 7월, 최을호씨 가족은 이사를 하고 최낙전씨가 살게 된 그 집에 무장한 남성 2인이 찾아왔다. 그들은 최을호씨를 찾았고, 최을호씨를 겁박해 강제로 이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20일 이후 다시 고향집으로 데려다 줬다. 최을호씨는 이번에도 두려운 나머지 신고하지 못했고, 이후 북한에서 더 이상 연락이 없자 그렇게 무관하게 살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농사일에 전념해왔다.

최을호씨가 북한과 접촉한 것은 1958년부터 1966년까지 발생한 일이었다. 1982년 8월 이근안이 이들을 체포한 시점에는 이미 공소시효도 지나간 일이 됐다. 하지만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들은 원하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이들을 고문했다. 이들이 체포되기 전까지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자백.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들이 작성한 수사기록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들이 눈에 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날은 1982년 9월 25일이고, 최을호씨의 1회 진술서 작성일은 9월 22일이다. 진술서는 모두 52쪽인데, 1958년 최규인씨의 첫 남파 때부터 1977년 8월까지의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있다. 128장에 달하는 1회 피신 작성일은 9월 23일, 110장에 달하는 2회 피신조서 작성일도 9월 23일이다.

묻고 답하는 방식의 신문조서가 23일 하루 동안 무려 238장이나 작성된 것이다. 최낙교·최낙전씨 역시 1회 진술서, 피신조서에서 범죄사실을 전면 자백하고 있으며, 범죄 장소 약도까지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수사기록 어디에도 혐의를 부인하는 조서는 없다. 간첩활동을 했다는 직접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단 한 번도 부인하지 않은 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20년 이전에 벌어진 일들까지 상세하게 진술해 200장이 넘는 조서를 하루에 모두 작성했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자발적으로 작성한 진술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최을호씨는 43일간, 최낙전씨와 최낙교씨는 35일간 불법감금된 상태에서 고문 수사를 당한 결과라는 뜻이다.

"심문 받을 때의 그 악몽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며 몸서리쳐지는 것은 배지도 않은 애를 내놓으라 했을 때 저는 이미 제 자신을 포기했던 것이며 뱃가죽에는 지금 그 흔적이 역연하게 남아있습니다." - (최낙전씨 상고이유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간 나는 그 침대에 눕혀졌습니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커다란 혁대 같은 것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엄지 발가락에 전기선을 묶었고, 철제 침대 옆에 있는 스위치로 전기를 넣었습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고, 소리를 질러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안에 커다란 주전자로 물을 쏟아붓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남산처럼 불러오니까, 거구의 수사관이 내 몸 위에 올라타더니 배를 팍 눌러댔습니다." - (참고인 최연석 진술서)

'거구의 수사관'은 이근안이었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이 이 가족을 영장도 없이 40여 일 넘게 장기 감금하고, 고문수사를 했던 것은 하나의 자백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최규인으로부터 포섭돼 체포될 때까지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무인포스트를 활용하여 무전을 보내는 등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 결과는? 성공이었다. 수사관들은 가족관계를 이용해서 더욱 압박했다. 딸들을 데려와서 조사를 하고, 툭하면 가족을 다 잡아들이겠다고 협박했다.

"제가 제일 겁이 났던 일은 옆방에서 들리는 위협과 신음소리 때문이었습니다. 큰 어머니(서순녀)가 바로 옆방에 있었습니다. 수사관들이 막 소리 지르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너 하나쯤 죽어 나가도 우리는 아무 상관없다'는 소리가 내 방까지 크게 들렸습니다." - (최을호 딸 최명자 진술서)

고문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서로 듣게 하고,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조카가 죽는다고 협박하면서 그들은 원하는 각본을 만들어나갔다. 조카가 고문당하며 지르는 소리는 숙부에게 고문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딸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원하는 대로 자백을 '해줘야 했다.' 수사관들의 고문과 협박, 그것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하는 진술에 이르러야 고문은 잠시 멈췄다. 글씨를 못 썼던 이한테는 보고 베껴 쓰라고 했다. 그림 그리듯이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해서 간첩단 사건은 만들어졌다.

모두 다 아는 국가기밀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수집해 누설한 간첩. 국가기밀이라고 하면 대단한 것 같아도 그것의 실체를 알고 나면 황당하다. 이들을 '간첩'으로 만든 국가기밀은 최을호씨가 살던 고사마을의 심포, 거전, 망해초소 현황, 최낙교씨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근처 황산 미군 미사일 기지 그리고 최낙전씨가 예비군훈련 받으러 갔던 고사초소 대간첩 비상훈련과 초소 현황이다.

굳이 탐지할 의도가 없이도 오며 가며 볼 수 있는 관공서들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 사실을 알고 나면 헛웃음이 나올 내용들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공지의 사실도 국가기밀"이라는, 성립하기 어려운 형용모순의 대법원 판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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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록 628쪽. 최을호씨, 최낙교씨가 탐지했다는 해안초소. ⓒ 진실의힘 제공


국가기밀이 된 초소 현황을 보면 "초소에 경찰관 또는 전투경찰 수명이 배치되어 있고 선박과 통행인을 감시한다"는 요지다. 해안에 초소를 설치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해안을 경비하고 통행 선박과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자명한 이야기가 국가기밀로 둔갑했다. 고사초소와 망해초소는 최을호와 최낙전 집 뒤에 있는 산 넘어 있고 심포초소와 거전초소도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동네 아이들은 초소에서 놀았고, 어른들은 조개 잡으러 나가는 길에 반드시 그곳을 들르게 돼 있어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들의 범죄사실에는 수도 없이 초소 이야기가 나온다. 20년 넘도록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이들이, 20년 동안 해안초소 현황만 반복적으로 탐지했다는 설정 자체가 어설프다.

공작금 "한화 1000원권 500매"

간첩사건에서 공작금은 간첩활동을 입증하는 주요 증거가 된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에서도 공작금이 등장한다. 최을호씨는 남영동에서 작성한 진술서에서 1966년 입북해 공작금으로 "한화 50만 원, 즉 1000원권으로 500매"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그 돈 가운데 일부를 최낙교에게 공작금으로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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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교씨의 진술서.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 진실의힘 제공


최낙교씨 역시 최을호씨한테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1000원권 지폐를 최초 발행한 때는 1975년 8월 14일이다(한국은행 누리집, 화폐연대표). 2차 입북에서 돌아온 최을호씨가 최낙교씨에게 '공작금'을 줬다는 1966년 당시엔 한국은행 1000원권 화폐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최을호씨와 최낙교씨는 자신에게 불리한 허위의 사실을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근안이 이 사건을 수사한 1982년에는 1000원권 지폐가 있었다. 이근안은 화폐가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했고, 오직 수사 당시 존재했던 화폐만 알고 있었기에 착오를 일으켜 가짜 증거를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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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누리집에 나와 있는 화폐연대표. 천원권은 1975년 8월에 발행됐다. ⓒ 한국은행 누리집 갈무리


이근안이 '발견'한 최낙교의 무인포스트

'무인포스트'도 공작금처럼 간첩사건에서 공식처럼 등장한다. '북한에서 간첩에게 숫자로 된 지령방송을 내보내면 간첩은 암호문을 가지고 난수를 해독한다. 그리고 그 지시사항에 따른 내용을 난수로 다시 만들어 미리 약정된 무인포스트에 파 묻는다.' 이처럼 무인포스트는 간첩임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열쇠라 할 수 있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에서도 무인포스트가 당연히 등장했다.

: "그러면 피의자가 3차 전문지령을 받고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최낙교) : "67.8. 일자 불상... 3차 전문지령에 따라 67.8. 하순 일자 불상 20:30경 집에서 '동조자 1명 포섭 중임'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보고용(발신용) 난수로 변신암호로 작성(약 15조로 기억)하여 비닐로 싸서 준비한 페니실린병에 삽입 준비하여 약정 장소인 동리 뒷산 국사봉 정상에서 남쪽 약 10지점의 최우호 묘비석 뒤 중앙에서 약 10cm 떨어진 지점에 약 10cm 깊이에 묻고 그 위에 표지석을 올려놓아 북송케 한 후 돌아왔으며..."
: "그러면 피의자는 무인포스트를 통해 보고한 것이 북괴에 전달되었는지 확인한 사실이 있는가요."
: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 다음 4차 전문지령 시 확인되었습니다."
- 수사기록 1016~1018, 최낙교 피의자신문조서

이 조서만 살펴보면 최낙교씨는 명백한 간첩이다. 이근안이 작성한 실황조사서는 무인포스트로 삼은 '최우호 묘비석'의 위치와 사진까지 첨부돼 있었고, 직접 묘비의 크기를 재는 사진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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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교 무인포스트 실황조사서, 이근안이 실제 답사하여 조사하는 광경. ⓒ 진실의힘 제공


그런데 보안이 곧 생명인 간첩들이 바로 집 뒤에 있는 산에 무인포스트를 둔다? 게다가 실황조사서 사진을 보니 비석이 아주 깨끗했다. 1959년 5월 뒷산을 답사해서 묘비석을 무인포스트로 선정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을 보면, 1982년 이근안이 사진을 찍었던 묘비는 최소한 23년은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기에도 이끼 하나 없이 깨끗했다. 최우호씨 묘비를 찾아서 비석을 살펴봤다. 비석 맨 앞 부분에 "최우호가 이미 죽은 지 27년이 지났다"고 돼 있었고, 이 비석이 세워진 경위와 과정이 적혀 있었다. 최씨 족보를 찾아서 최우호씨 사망 년도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묘비석 맨 마지막 줄에 적혀있는 글귀. 묘비를 세운 시기가 적혀있어야 할 부분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고대 중국에서 쓰던 고갑자(古甲子)였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가 고갑자와 대응관계를 이룬다. '강어'(强圄)는 음양오행을 뜻하는 천간(天干) 가운데 '정'(丁)을 뜻한다. '대황락'(大荒落)은 12지지(地支) 가운데 '사'(巳)를 뜻한다. 따라서 '강어대황락'(强圄大荒落)이란 '정사(丁巳)년이 되는 것이다. 1977년이다. '소춘'(小春)은 음력 10월을, '하완'(下浣)은 21일부터 말일까지를 뜻한다.

결국 '强圄大荒落小春下浣'은 '1977년 음력 10월 하순'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낙교씨가 무인포스트로 정했다는 1959년은 물론이고 암호문을 매몰했다는 1967년에도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근안이 사건을 수사했던 1982년 사건 당시 이 비석이 있었다는 점이 열쇠다. 이 무인포스트는 이근안이 '발견'해서 간첩 활동 증거로 사용한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근안은 고갑자를 몰랐고, 그래서 우리는 이근안이 이 사건을 조작했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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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호씨의 묘비. 사진 왼쪽 상단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종합하면 최우호씨가 죽은 시점은 1977년 10월 21일부터 말일 사이다. ⓒ 진실의힘 제공


글이 길어졌다. 이근안의 수사기록은 피해자들이 흘린 피눈물의 흔적이다. 피해자들을 사형으로, 자살로 내몰았던 기록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수사기록은 진실의 편린들을 꼼꼼히 담아내고 있었다.

수사기록을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의혹은 더욱 쌓여간다. 마치 허위로 만들어진 산더미 같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은 40여 일이 넘도록 고문으로 짜내고 맞춰나갔다. "24년 동안 암약해온" 간첩으로 만들었으니 제 아무리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이라도 거짓의 흔적만큼은 다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근안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그 수사기록이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지고 사실관계를 따져 묻게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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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검사 정형근(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오른쪽). ⓒ 오마이뉴스


간첩 지령을 받아 무인포스트까지 설정하며 북한과 암호문을 주고 받았다고 이근안에게 '자백'한 최낙교씨. 그는 검찰로 송치된 이후 정형근 검사의 조사를 받았다. 이근안과 정형근. 2인의 이름은 공안수사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들 아니겠는가. 정형근 검사는 이들이 40여 일 넘도록 남영동에서 불법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최낙교씨, 최낙전씨를 몰아붙였고, 심지어 남영동 수사관을 대질시키며 이근안의 수사를 동조했고 완성시켰다.

"검사실에 들어갔더니, 최낙전 조카가 와 있었습니다. (중략) 낙전이가 계속 부인을 하니까 정형근 검사는 윽박지르면서 기록을 던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조금 후 낙교 조카를 불렀습니다. 낙교 역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중략) 검사실에 있는 어떤 사람이 우산대로 낙교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눈도 찌를 것처럼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저를 불렀습니다. 나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기를 들고 '들어오세요' 그러더군요. 바로 나를 고문한 수사관 2명이 들어왔습니다. 나한테 같이 가자면서 진짜로 데리고 가려고 양팔을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 (참고인 최연석씨 진술서)

최낙교씨는 공소제기가 된 이후 수감 중이던 서대문구치소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형근 검사는 자살이라고 결론지었으나 가족들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최낙교씨의 죽음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남은 최을호씨와 최낙전씨는 피고인이 돼 법정에 서게됐다. 그리고 탄원서를 수 없이 법원에 제출했다. 강제로 이끌려 북한에 다녀온 뒤 신고하지 못한 잘못은 있겠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외면했다.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이 만든 의견서 그대로 공소장이 됐는데, 판결문은 공소장과 겉표지만 달랐다. 1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가면서 탄원서를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최을호 사형, 최낙전 15년형의 1심 판결은 대법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이근안과 남영동의 불법감금, 고문수사는 간첩을 조작하는 데 필요조건이었다. 간첩 조작이 완성된 데는 검찰과 법원의 묵인 혹은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 

1985년 5월 27일, 최을호씨는 사형을 집행당했다. 그날 사형장에 입회했던 문장식 목사는 그가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아무런 간첩활동도 안했는데 간첩 누명 쓰고 공산주의자로 낙인 받아 죽는 것이 억울합니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문장식 목사의 사형장 일기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에서 문 목사는 "애절하게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라고 그날을 기억했다.

15년형을 선고받은 최낙전씨는 9년 감옥살이 끝에 석방됐다. 그러나 경찰의 보안관찰법에 의한 집요한 감시가 그를 옥죄었다. 1991년 9월 30일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방된 지 4개월 만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당시 경찰과 검찰이 어떻게 서로 동조하고 묵인하면서 평범한 일가족을 간첩으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판사와 검사 등 법률 기술자들이 법에 무지한 평범한 시민들을 어떻게 사지로 떠밀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공모로 인해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자녀들과 부인들은 '간첩'이라는 차가운 외면과 따돌림 속에서 피눈물로 살아가야 했다.

34년 만에 무죄로 밝혀지고, 법원은 "위법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헌법에 보장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한 범법자로 낙인찍힌" 피고인들과 최낙교씨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다.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면 다 끝난 것일까. '무죄'라는 추상적인 꽃다발을 부여받은 억울한 죽음들은 이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가. 고문조작에 개입한 수사관, 검사 등 그 어느 한 사람 처벌받지 않았다. 공소시효의 방패 뒤에 숨거나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엉뚱하게 간첩으로 엮은 국가보안법은 한 글자도 고쳐지지 않았고, 대공 수사실은 그대로인 채 대상을 바꾼 수사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보안관찰은 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은 가능한 것인가. 최을호, 최낙교, 최낙전... 그들의 슬픈 죽음은 지금 우리들에게 재발방지의 보증이라는 근본적인 숙제를 던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송소연님은 (재) 진실의힘 상임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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