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하나에 낮 주인, 밤 주인이 따로 있다고?

열악한 노동자의 삶,<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에 가다

등록 2017.07.17 16:13수정 2017.07.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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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은 1964년 조성된 이래 90년대까지 우리나라 대표적인 산업단지였다. 당시 시골의 가난한 청소년, 청년들은 서울의 꿈을 안고서 이곳 구로공단에 정착했다. 구로공단은 그들의 숙식처이자 일터였다. 노동 환경이 열악했던 만큼, 노동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구조가 변함에 따라 점차 구로공단의 규모도 축소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정부 주도의 IT 첨단 디지털단지로 변모함에 따라, 당시 공단의 흔적은 찾기 어려워졌다. 이에 구로구청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실제 노동자들이 살던 곳을 개조해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로 나가서 골목을 쭉 따라 5분 정도 걷다 보면 노동자생활체험관이 나온다.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갔는데도, 상주하는 직원 분께서 친절하게 소개를 해주셨다.
 
벌집에 사람이 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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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생활체험관에 방문한 필자와 친구들(가운데 필자). 당시 노동자들이 입었던 교복과 작업복을 입었다. ⓒ 신영수


체험관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실제 노동자들이 묵었던 집을 개조했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지하 1층으로 들어갔다. 지하 1층에는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방을 크기나 소품 등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당시에 노동자들이 살던 방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방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라서 이를 '벌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지하1층의 이름도 벌집재현관이다.
 
방은 어림잡아 2평 남짓이다. 그런데 나도 비슷한 크기에 창문 하나 없는 지하방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생각보다 그렇게 열악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들던 차, 안내해주시는 직원 분께서 바로 "이 방에서 보통 네다섯 명이 함께 살았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내 경험 상, 2평이면 사람 한 명 살기에도 넉넉지 않은데, 다섯 명이 함께 살았다니 끔찍했다. 다섯 사람이 일자로 눕기에도 비좁아 보였다. 게다가 집이라는 게 잠만 자는 곳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게 가능하나요?" 묻자, "그때는 노동이 워낙 길고 고돼서요. 일 끝나면 방에서 잠만 잘 수밖에 없었대요."라고 한다. 열악한 환경을 견뎌야 했던 노동자들에게는 애초에 방이란 그저 잠을 해결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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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공'들이 살던 '벌집'을 재현해놓은 소형 모형 ⓒ 신영수


또 쉴 새 없이 돌아갔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은 주간부와 야간부로 근무했는데, 그래서 당시의 집주인들은 이 작은 방을 낮과 밤을 나눠서 계약했다고 한다. 예컨대, 주간부 네 명과 야간부 네 명이 있다면, 주간부는 낮에 일하고 밤에 자기 때문에 '밤방'을 계약하고, 야간부는 밤에 일하고 낮에 자기 때문에 '낮방'을 계약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방에 낮 주인과 밤 주인 따로 있게 되는 것이다.


착취의 현장이자 노동운동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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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전시관. 체험관 직원 분이 구로공단의 역사를 설명해주시는 모습 ⓒ 신영수


체험관 1층은 구로공단의 사진과 자료를 모아놓은 전시관이다. 구로공단의 발전상과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전시해놓았다.

당시 공단의 노동자들은 휴무 없이 하루 기본 12시간 이상을 일하고 월급 2만원(70년대 기준)을 받았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만원 정도의 금액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방값과 식비, 기타 생활비 등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었다.

학생운동 시절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했었던 소설가 공지영은 당시 노동자의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2시간 서서 일해야 했어요. 다리가 퉁퉁 붓고 빈혈이 생겨 일하다 쓰러지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관리자가 와서 발길로 걷어차면서 일어나라고 마구 때려요. 한 명이 빠지면 라인 전체가 못 돌아간다는 거죠. 폭력이 일상화된 때였어요. 참담하게도 때리면 정신이 들어 일어나곤 했으니까요." (공지영, 경향신문 인터뷰)
 
노동자들은 그 정도의 월급이라도 받기 위해, 매일 철야 근무를 해야 했다. 잠을 자지 않고 버티기 위해 신경제 약을 복용해야 했고, 감독관들한테도 얻어맞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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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영상관에서는 구로공단 노동자들과 관련된 영상을 볼 수 있다. ⓒ 신영수


이에 노동자들의 불만도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근무조건 향상을 위한 노동운동을 조직했다. 이를 돕기 위해 대학생들은 공단에 위장취업했다.
 
또 불교계 여익구 거사 등이 구로구에 여래포교원을 세워 야학을 운영하는 등, 종교인들은 산에서 도심지에서 내려와 공단에 법당과 교회당을 옮겨와 노동운동을 도왔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85년 구로동맹파업이다. 파업과 시위 과정에서 43명이 구속되고, 370명이 구류, 700명이 해고했던 이 사건은 '6.25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라 평가받는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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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관 2층의 '여공 순이'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필자와 친구들(가운데 필자). 이름을 '순이'라 정한 것은 당시 여공들 이름에 '순이'란 이름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신영수


오늘날 구로공단의 이 같은 역사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구로공단이라는 이름도 구로디지털단지,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겪는 착취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실제로 여기 디지털단지의 노동자들은 밤샘근무, 초과근무, 임금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디지털단지에 위치한 한 IT기업의 노동자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연속으로 30시간 이상을 근무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30%가 그렇다고 답했다. 심지어 연장근로, 초과근로 수당을 받은 노동자는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말하길, 감옥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 사회가 감옥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쩌면 이곳 노동자생활체험관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열악한 노동환경이 비단 과거에만 존재했던 '역사 유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은 굳이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에 가지 않아도 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덧붙이는 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민주화운동 대학생 탐방에 선정돼, 친구들과 함께 2박3일간 민주화운동 관련 현장을 탐방했습니다. 그중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노동자생활체험관 #구로공단 #여공 #벌집 #구로동맹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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