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와 정물은 가능해도 누드는 어려워

[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⑤] 도자기 이야기

등록 2017.07.24 17:40수정 2017.07.2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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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도자기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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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 화백의 대표작 진사모란문 화병 ⓒ 문은희


최근 도자기가 문화와 예술로 인정받은 것은 1960년대이다. 대학에 도자과가 생기고 정식 커리큘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도예가 이정하(李貞夏)가 홍익대 강사로 나간 적이 있다. 1970년 전후 미술계에서는 화가들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작업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문은희도 1972년 도자기 작업을 시작했다. 남관, 장우성, 김기창, 장욱진, 서세옥 등도 도자기 작업을 했다.

문은희가 도화(陶畵)를 위해 처음 찾아간 곳은 광주시 중부면 번천리에 있는 안동오요였다. 안동오(安東五)는 1960년대 전통자기를 연구 청자와 백자를 재현해냈다. 특히 백자에 일가를 이뤘으며, 철화진사(鐵華辰砂)와 청화백자(靑華白磁), 투각과 양각 등에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었다. 문은희 일행은 이곳에서 성형과 초벌구이를 마친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문제는 물감이 도자기에 잘 스며들지 않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려면 팔이 떨어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문은희는 철화진사와 청자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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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에 있는 수묵누드 도자기 ⓒ 이상기


그리고 1975년 이천군 신둔면 수광리에 있는 수광도요(水廣陶窯)를 찾았다. 그곳에는 1971년부터 이정하 도예가가 대표작가로 있었다. 당시 안동오 선생이 너무 유명해져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수광도요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백자와 다완(茶碗)이었다. 문은희는 백자에 그림을 그려 구워내는 철화진사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청화백자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 만든 도자기 제품이 접시, 화병, 필통, 항아리(大壺)였다.

시문(施紋)으로 알려진 그림 그리기 작업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문은희가 즐겨 그린 그림은 사군자, 정물 산수 등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양화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긴 어려운 때였다. 나중에 문은희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누드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문 화백이 수묵누드를 완성한 80년대에는 도자기에도 누드를 그릴 수 있었다.

도자기를 만들며 생긴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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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시작한 도자기 ⓒ 문은희


초벌구이 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이란? 종이에 그릴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우선 물감이 잘 스며들지 않는다. 한 마디로 뻑뻑하다. 작업을 하는데 하루 종일 걸린다. 어떤 때는 밤을 새우기도 한다. 다른 친구들은 5만~10만 원어치 도자기 작업을 하지만, 욕심이 많은 문은희는 30만 원어치 작업을 한다. 여기서 30만 원은 한 가마를 말한다. 친구들이 합쳐 한 가마를 만들지만, 문은희는 혼자 한 가마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작업을 마치고 나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는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며칠 후 나올 도자기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며칠 후 나온 도자기색을 확인하고는 잘못된 것은 버리고 잘 된 것만 가지고 온다. 그 작품들이 진사 화병, 청자 주병, 백자 접시 등이다. 그 중에서도 문은희는 진사 화병이 제일 좋았다고 한다. 그것은 붉은 색이 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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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작업을 함께 한 친구들 ⓒ 문은희


이때 함께 작업한 친구들이 유지원, 송경, 박영희, 이익란 등이었다. 작업하면서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담소하던 때가 그립다고 한다. 작업장에는 딸 윤선이를 데리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옆에서 잘 놀았다. 당시만 해도 예술혼이 노도처럼 쏟아져 나오는 때라 모든 일이 즐거웠다. 이가원(李家源) 선생이 와서 도자기에 화제(畵題)를 써 주기도 했다.

도자기 작업은 소원 문은희 화백이 충주로 내려오는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그림의 소재도 다양한 편이다. 초창기에는 전통적인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그리고 산수와 풍경도 그렸다. 동식물도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금붕도, 포도, 감 등이 대표적이다. 감은 반상기와 다기로 만들어져 팔리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누드가 도자기에 도입되었다.

데리고 간 아들이 그린 그림으로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돌이켜 보면 재미있다고 한다. 잔에다 아버지와 아들, 엄마, 엄마와 아빠를 그려 넣었다. 아들이 그린 그림에서 아빠는 고집쟁이, 엄마는 신경질쟁이로 표현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문은희 부부는 자식에게 좋은 부모는 못 되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부모가 개성이 강하고 자신의 직업의식에 충실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원이 최고로 치는 도자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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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작업 ⓒ 문은희


도자기 작업의 출발은 제토와 수비다. 점토질이 많은 태토(胎土)를 미세하게 분쇄해 불순물을 체로 걸러 제거한다. 이것을 물속에 침전시켜 미세한 앙금만을 채취하여 일정기간 그늘에서 말린다. 수비된 흙을 충분히 반죽해 도토(陶土)를 만든다. 도토는 원통형으로 만든 다음 비닐에 싸서 보관한다. 습도의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통형 도토를 가지고 도자기의 기본 형태를 만드는 것을 성형(빚기)이라 한다. 성형의 기본이 물레 성형과 코일링 성형이다. 그 외 판 성형, 흙가래 성형, 주입 성형, 압출 성형이 있다. 성형 다음 과정이 정형(굽깎기)이다. 성형된 자기의 밑 부분을 자르거나 깎아 매끄럽게 만든다. 정형이 끝난 도자기는 아직 마르지 않아 부드러운 상태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면에 상감 작업을 하거나 양각과 음각 작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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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 그림 그리기 ⓒ 문은희


정형과 조각이 끝난 도자기를 가마에 넣어 1차로 구워낸다. 이것이 초벌구이다. 이때 가마의 온도를 920℃까지 올린다. 초벌구이 시간은 6~7시간이다. 초벌구이가 끝나면 도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린다. 이것을 시문(그림 그리기)이라고 한다. 화가들에게는 그림 그리기가 가장 중요하다. 그림을 통해 도자기의 품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술로서의 도자기는 오로지 하나 나만의 것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초벌구이가 끝나고 그림이 완성된 도자기의 표면에 유약을 발라준다. 이것을 시유(유약 바르기)라고 한다. 유약은 자기의 표면을 매끄럽고 윤이 나게 한다. 다음이 재벌구이다. 도자기를 가마에 넣은 다음 가마의 온도를 1250~1300℃까지 올린다. 도자기를 9~10시간 정도 구우면 원하는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꺼내 완성도를 확인한다.

도자기는 불의 예술이어서 결과가 매번 다를 수 있다. 당시에는 장작 가마를 이용했는데, 장작 가마로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자기 작업은 화가와 도예가의 의사소통과 교감이 아주 중요하다. 또 가마꾼의 정성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자기 그림은 화가 혼자 완성도를 높여가는 회화와는 다른 어려움과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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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 표현된 누드 도자기 ⓒ 이상기


완성되어 나온 작품을 볼 때 성취감과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도자기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붉은색 계열의 진사백자라 말한다. 1972년에 만든 진사추상문 백자호, 음각포도문 청자주병을 좋아한다. 제작년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진사어문 접시도 좋다. 그리고 진사모란문 화병, 국화문 청화백자도 좋다.

누드가 들어간 도자기는 수작은 없지만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수작이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선이 가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 화백 누드의 특징은 선이 칼처럼 예리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인데, 도자기에서는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몸의 형태적인 특징이 강렬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누드가 들어간 항아리와 접시, 이들은 모두 예술로서 가치가 있다.

30년 후 수광도요를 찾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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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를 좋아한 한문학자 이가원 선생 ⓒ 문은희


문은희 화백이 수광도요에서 도자기 작품을 한지 30년이 지났다. 문 화백은 2017년 4월 옛 추억을 되찾기 위해 이천의 수광도요를 찾았다. 먼저 구글 지도에서 수광도요를 확인하니 나오질 않는다. 네이버 지도를 확인하니 이천시 신둔면 남정리 343-19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차를 몰아 그곳을 가니 지번만 있지 수광도요는 없다. 그 대신 멀지 않은 곳에 새로 만든 신둔도예촌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정하 장인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다른 이름으로 수광도요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시조처럼 산천은 의구하데 인걸은 간 데 없다. 나는 문 화백에게 가까운 이천 시내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미술관을 방문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월전미술관은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서울대학교 미대교수를 지낸 동양화가 장우성의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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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전미술관을 방문한 문은희 화백 ⓒ 이상기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은 2007년 8월 이천시 관고동 설봉공원 안에 개관되었다. 월전미술관 건립은 서울대학교 농대교수를 지낸 유달영 선생의 제안으로 처음 논의되었다. 장우성과 유달영은 동시대 서울대교수를 지낸 친구였다. 2004년 5월 미술관 건립방침이 확정되었고, 2005년 9월 미술관 공사가 시작되었다. 2007년 1월 건물이 준공되었고, 8월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월전 장우성과 소원 문은희의 예술적 인연은 개인전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 인연이 지속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유달영 교수가 예술애호가적 입장에서 문 화백의 전시회에는 꼭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달영 교수는 문 화백의 평생 후원자였다. 또 월전 장우성이 운보 김기창과 라이벌이어서 운보 제자인 문 화백을 월전이 지원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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