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부엌과 지옥문에 다녀왔습니다

호주 시골 생활 이야기; 썬샤인 코스트, 퀸즐랜드 (2)

등록 2017.07.21 15:51수정 2017.07.2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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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눈길을 끈 특이하게 생긴 선인장 ⓒ 이강진


민박집에서 파도 소리와 함께 하룻밤 지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뒷마당으로 나간다. 바람이 세차게 불지만 차가운 바람은 아니다. 파도 소리가 제법 크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집을 많은 사람이 선호하지만, 매일같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지내는 것이 꼭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끔 지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게으름을 피우며 아침을 준비한다. 타인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간에 얽매여 지내지 않을 수 있어 좋다. 나만의 삶이다. 자유를 만끽한다.


어제 끝까지 걷지 못했던 누사 국립공원(Noosa National Park) 산책길로 향한다. 출근 시간이라 도로가 복잡하다. 인구 4,000명 정도 되는 동네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관광객이 많아서 일 것이다.

가는 길에 초등학교를 지나친다. 학교 앞에 있는 신호등에 잠시 서 있는데 학교 정문에 아이를 내려놓는 젊은 엄마가 보인다. 키는 작지만 야무지게 생긴, 햇볕에 탄 피부를 가진 동양 여자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자동차 안에 있는 서프보드다. 입은 옷도 수영복위에 티셔츠 하나 걸친 옷차림이다. 바닷가에 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사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차할 자리가 없다. 차 세울 곳을 찾아 동네 길로 들어선다. 근처에 있는 골목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참 되돌아가서야 주차할 공간을 찾았다. 우리보다 조금 전에 차를 세운 젊은 남녀는 서프보드를 자동차에서 내리고 있다. 무거운 서프보드를 들고 꽤 많이 걸어야 할 것이다. 

동네 길을 걸어 국립공원 입구에 들어섰다. 적당히 붐비는 해안가 산책로를 걷는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사람은 서프보드를 옆에 끼고 걷는 남녀들이다. 젊은이가 대부분이지만 나이 많은 사람도 종종 보인다. 심지어는 들고 가기가 힘들어 유모차를 개조해 서프보드를 싣고 가는 노인도 있다. 바다도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산책길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다를 사진기에 담는다. 파도가 심하다. 멀리 파도를 타고 있는 서퍼들이 돌고래처럼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바닷가 바위에 작은 돌멩이를 쌓아 놓은 곳이 있다. 한국에서 산행할 때 흔히 보았던 눈에 익은 모습이다. 호기심에 내려가 본다. 산책로를 걷던 몇몇 사람도 내려와 구경한다.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쌓아 올린 수많은 돌무덤이 관광객 시선을 끌고 있다.


끝없는 태평양 바다를 보며 국립공원 산책길 끝에 도착했다. 지옥문(Hells Gates)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지옥이라는 단어에서 흔히 연상되는 뜨거운 불길 대신 세찬 바람이 불고 있다. 몸을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의 심한 바람이다. 모자를 손에 벗어들고 벼랑까지 가본다. 깊은 계곡 아래로 거친 파도가 물거품을 일으킨다. 황량한 자연의 모습이다. 지옥문이라는 지명을 붙인 이유를 알 것 같다.

지옥문을 지나 산책로를 계속 걸어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에 도착한다. 멋있는 해변이지만 파도가 심해 수영하는 사람은 없다. 백사장을 산책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지도를 보면 백사장 끝나는 곳에 또 다른 산책길이 있다. 그러나 오늘 걷기는 무리다. 내일 걷기로 하고 돌아간다.

바다만 보이면 전망 좋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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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 모두 즐기는 서핑. 파도가 높은 누사 헤드(Noosa Head)는 서퍼들로 항상 붐빈다. ⓒ 이강진


다음 날 아침도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 어제 가지 못했던 산책길을 찾아 나선다. 해안 가까이 도착하니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집을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면적의 가파른 경사에도 집들이 비집고 들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전 한국에서는 달동네, 산동네라며 우습게보았던 높은 지역이 호주에서는 최고의 명당자리다.

전망 좋은 집에서 보였던 해변을 걷는다. 해변에서 바라보니 새로 짓는 집도 몇 채 보인다. 백사장을 조금 걸으니 계단이 나온다. 산책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산등성이를 타고 계속 이어진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핑계로 쉬어가면서 끝없는 계단을 오른다.

정상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파도가 심하게 부딪히는 절벽이 나온다. 이곳도 어제 갔던 지옥문처럼 바람이 심하다. 사람들은 바람과 싸우며 절벽 근처를 기웃거린다. 이곳은 악마의 부엌(Devils Kitchen)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지옥문과 악마의 부엌, 무엇인가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더 걸어 사자 바위라는 지명을 가진 곳을 지난다. 풍파가 할퀴고 간 상처가 뚜렷하게 보이는 바위가 계속된다. 파도와 싸우며 숲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바위들이다. 오늘도 바다는 거대한 물줄기를 하늘로 뻗치며 바위를 치고 있다.

거대한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웅장한 박물관이다. 이러한 박물관 앞에 설 때마다 인간의 작음을 본다. 자연 앞에서 교만하지 말자. 잘못하면 악마의 부엌에서 요리되어 지옥문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터이니.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호주 동포신문 '한호일보'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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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300km 정도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 여행과 시골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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