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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압도적 연주, 아무도 박수 칠 수 없었던 이유

[해외리포트]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축제에 초청 받은 조성진, 그의 쇼팽 콘서트

17.07.26 11:07최종업데이트17.08.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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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인 네바강의 개폐교. 자정이 넘은 시간인 데도 푸른 하늘이 보인다. ⓒ 강인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가 저물어 간다. 물론 '저물어 간다' 해도, 새벽 4시면 해가 뜨고 밤 10시가 되어야 해가 진다. 해가 넘어간 뒤에도 자정 가까이까지 하늘이 훤하고, 새벽 세 시가 되면 동이 터 온다.

백야가 한창인 6월 중순에서 7월 초까지는 아예 저녁과 새벽이 맞붙어 하늘이 어두워질 새가 없다. 물론 겨울에는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아침 10시 넘어야 해가 뜨고 오후 4시 전에 해가 떨어진다.

겨울이 긴 이 도시에서 사람들이 '흰 밤'을 최대한 즐기려는 것은 당연하다. 비가 오지 않는 저녁이면, 네바 강변에 어김없이 젊은이들이 맥주나 와인 병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고, 열린 다리 사이로 거대한 유람선들이 지나쳐 가도 여름밤의 대화는 끊길줄 모른다.

18일, 그날 공연은 유독 늦게 시작되었다. 6시로 예정되었으나, 관객들은 30분을 훌쩍 넘겨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조성진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 2번을 연주하는 이 콘서트는 일찌감치 매진된 터였다. 그날 따라 복도 이곳저곳에서 한국어가 자주 들려와, 한국에서 조성진의 식지 않는 인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객석 입구가 열리고, 앳된 얼굴의 여성이 무대 앞줄로 걸어와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았다. 그는 자신의 좌석이 연주자와 손 뻗으면 닫을만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는 입을 가린 채 수줍게 웃고는 사뿐히 자리에 앉았다.

마린스키 콘서트홀 앞에 걸린 조성진의 대형 포스터. 백야축제에서 그의 공연이 갖는 위상을 잘 말해준다. 조성진 옆에 마린스키극장 음악감독 게르기예프가 보인다. ⓒ 강인규


묘한 긴장감, 공연장을 채우다

6시 40분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세 번째 종이 울리고, 연주단원들이 박수를 받으며 무대 양쪽에서 걸어들어왔다. 왼쪽 가장자리에 앉았던 악장이  일어나 '라(A)'음을 연주하고, 모든 악기들이 그 소리에 맞춰 조율을 하기 시작했다.

조율음은 오케스트라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이자, 연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다. 공연장을 즐겨 찾는 사람에게 조율음은 '파블로프의 개'의 귀에 들리는 종소리와 비슷하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침샘을 자극하듯, 조율음은 음악애호가들의 심장 박동수를 높인다.

조율이 끝나고 연주가 시작되기까지의 짧은 시간은 행복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조성진의 경우, 이 시간은 더욱 길게 느껴졌다. 그가 무대로 걸어들어오고,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고, 의자 높이를 조절하고, 건반을 천으로 조심스레 닦을 때만이 아니었다. 연주가 끝나고, 수없이 박수를 받고, 앙코르곡을 연주할 때까지도 좀처럼 긴장의 끈을 늦추기 어려웠다.

이처럼 조성진은 관객들에게 묘한 긴장감을 안기는 연주자다. 긴장했던 마음은 공연장을 나서며 서서히 사라졌으나, 그와 함께 찾아온 행복감은 그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샌님', 폭풍을 몰고 오다

조성진이 무대에서 관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강인규


피아노에 막 앉은 조성진은 수줍은 '샌님' 같았다. 나비 넥타이를 단정히 맨 채, 양손을 무릎에 올리고 연주를 기다리는 연주자의 얼굴은 앞에 앉은 어린 팬 만큼이나 앳돼 보였다. 그 여린 외모가 관객들의 긴장감을 한층 높이는 듯했다.

연주자 뒤쪽으로 마린스키 극장의 음악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봉을 들고 서 있었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드는 게 특별할 수는 없겠으나, 게르기예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흔히 맨손으로 지휘하는데, '손'보다는 '손가락'을 사용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마치 투명한 악기를 연주하기라도 하듯, 손가락을 재빠르게 떨며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게르기예프는 지휘봉을 사용할 때에도 대개 짧은 놈들을 쓴다. 가끔 이쑤시개를 지휘봉으로 쓰기도 하지만, 조성진의 연주장에는 조금 긴 '꼬치 막대'를 들고 왔다. 지휘자는 연주자가 준비되었는지 살피고, 오케스트라를 향해 눈짓을 한 뒤 손을 들어올렸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이 곡은 조성진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는 2015년 쇼팽 국제피아노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했다. 쇼팽이 20대 초반에 발표한 이 음악은 곧 20대 초반의 피아니스트 손에서 되살아날 터였다.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빠르고 장중하게).' 전체 연주시간 40분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악장이다. 피아노 독주가 나오기 전까지 4분 가까이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며, 여기서 곡 전체에서 전개될 상반된 두 개의 주제가 소개된다.

첫 번째는 비장한 느낌의 테마로, 피아노는 이 것으로 독주를 시작한다. 조성진의 곱상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싶더니, 피아노의 고함소리가 귀를 때린다. 하지만 이 장엄한 주제는 곧 쇼팽 특유의 화려한 아르페지오(펼침화음)를 타고 감미로운 두 번째 주제로 이어진다.

조성진의 얼굴은 어느 새 꿈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다. 갈망으로 가득한 이 구슬픈 테마는 2악장 '로망스'를 암시한다. 20분이나 되는 긴 첫 악장은 다시 비장한 테마로 되돌아가 마무리된다.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소리를 길게 뽑아낸 뒤 지휘봉이 멈추는가 싶다가, 곧바로 2악장이 시작되었다. 숨죽이고 듣던 청중들은 헛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2악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랑의 상념' 2악장

조성진이 앙코르 곡으로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다. ⓒ 강인규


두 번째 악장('로망스-라르게토')은 '사랑의 테마'라 할 만하다. 쇼팽이 음대 시절 짝사랑했던 여학생에 대한 갈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현악기만으로 나지막히 시작되는 도입부는 한 사람이 서서히 옛 추억에 젖는 과정을 그리는 듯하다.

이윽고 호른 소리와 함께 피아노 독주가 시작된다. 맑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피아노 소리가 하나둘 흘러나온다. 피아노 소리가 원래 이토록 고왔던가 싶다.

하나씩 누르는 건반이 혼자 천천히 밤길을 걷는 발소리 같다. 그의 머리 위에는 달이 떠 있다. 상념에 잠겨 산책하던 이는 수많은 추억이 어린 곳에서 발을 멈추고, 그의 눈은 흐려져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입은 여린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쇼팽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조용하고 구슬픈 로망스는 수천 가지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곳을 따뜻한 눈으로 응시하는 사람의 느낌"이라고 썼다. 그는 이어 "아름다운 봄날 저녁, 달빛 아래에서 잠기는 상념"이라고 덧붙였다.

조성진은 달콤한 표정으로 눈을 감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듯 아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연주자의 표정은 그가 음악을 대하는 느낌이나 해석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조성진의 과하지 않은 몸동작과 표정은 연주에 몰입하는 데 도움을 준다.

3악장도 쉼 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마지막 악장은 불안한 기운으로 시작된다.

'경쾌한 귀가' 3악장(론도)

앙코르 연주 중인 조성진. ⓒ 강인규


현악기들이 일제히 쏟는 저음은 숲을 덮치는 어둠처럼 스산하다. 2악장에서 온갖 상념을 안겼던 달은 짙은 구름에 가려진 지 오래다.

마치 겁에 질린 어린 짐승처럼, 바순과 클라리넷 소리가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온다. 곧바로 더 짙은 어둠이 찾아들고, 이제는 플루트와 오보가 놀란 새처럼 가련한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밤은 군대처럼 숲 전체를 덮치고, 이들의 행진은 이제 거침이 없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숨 죽이고 있을 때, 피아노 소리가 적막을 깬다. 생각에 젖어 한없이 걸었던 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발소리 같다. 그는 추억 속에서 위로를 얻은 듯 가볍고 경쾌하다.

피아노는 이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늘의 달은 사라졌지만 상관 없다. 이미 가슴 속에 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조성진은 신나는 듯 머리를 흔들기도 하며, 표정은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경쾌한 춤이 빠르고 화려한 스케일로 마무리되자, 적막할 만큼 조용했던 객석에서 박수와 환성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피아노가 오케스트라 전체를 끌고가는 협주곡 2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갈망 가득한 협주곡 2번, 그리고 환호

공연후 조성진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지휘를 맡은 게르기예프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 강인규


협주곡 2번은 1번의 2악장을 확장해 곡 전체를 채운 듯한 느낌이다. 쇼팽은 1년 안에 두 곡을 모두 완성했지만, 2번이 시기적으로는 1번보다 앞선다. 모두 같은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에서 쓴 곡이니, 두 곡 사이에 일관성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쇼팽은 협주곡 2번에 "오케스트라 반주의 피아노 콘체르토"라고 이름 붙였다. 말 그대로 피아노가 곡 전체를 이끌어 가고, 오케스트라는 조연을 맡는 것이다. 피아노 독주의 비중과 곡 전체를 수놓는 화려한 장식 면에서 이에 필적할 곡을 찾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2번은 조성진이 역량을 드러내기에 더 없이 좋았다. 마치 곡이 조성진을 위해 쓰인 듯했다. 연주가 끝나자 객석이 떠나갈 듯 우렁찬 갈채가 쏟아진다. 연주회가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끝났건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관객들은 결국 앙코르곡을 얻어냈다.

조성진은 마치 처음 연주회장에 들어온 듯한 모습으로 피아노에 앉아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베토벤의 소나타 8번 다단조 ("비창") 2악장이다. 영국 루이즈 터커의 노래 "미드나잇 블루" 멜로디로 쓰이기도 했던 아름다운 곡이다.

네바강 위로 폭죽이 터지고 있다. 오른 쪽으로 백야의 상징이 된 '주홍돛'이 보인다. ⓒ 강인규


조성진이 이 건반에서 마지막 손가락을 뗐으나, 박수는 곧바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피아노의 잔향이 사라지기까지 숨 죽이며 기다렸다. 이 짧은 적막 뒤 또 다시 요란한 박수의 파도가 일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힐러리 한은 2015년 모차르트 음반을 내면서 "모차르트를 연주할 때마다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하나는 주위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행복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새로운 관점을 얻는다는 것이다.

내게도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연주회가 끝난 지 일주일이 넘어서까지 행복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행복 뒤에는 그동안 지나쳐 온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연주회장을 나서던 순간, 저물어 가던 백야의 밤이 한층 밝아보였다. 하늘에 달도 뜨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의 밤산책이 시작되었다.

조성진 쇼팽 피아노협주곡 상트페테르부르크 게르기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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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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