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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여인숙에 살던 엄마, 그날 알게 된 충격적 사실

[내 인생의 BGM] 한글 모르던 엄마가 가르쳐준 '엄마야 누나야'

17.08.13 15:51최종업데이트17.08.1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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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
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내 인생의 BGM' 이라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노래만 들으면 엄마 생각이 난다. 아주 옛날 내가 어렸을 적 엄마와 함께 보낸 하룻밤이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해 겨울, 나의 부모님은 이혼하셨다. 판사 앞에서 나의 아버지는 엄마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 주겠다 약속을 하셨다 했고, 그 약속 안에는 내가 엄마와 함께 살게 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혼을 마친 부부들이 법정을 나서면 각자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인데,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계속 같은 길을 걸어와 부부로서 마지막 한 끼를 함께 먹었다는 후일담을 내게 전해주기도 하셨다. 내일이라도 당장 엄마에게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나는 그러나 오랫동안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명목상 이유는 '나의 학교'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일정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엄마가 나를 데려가 학교를 보내고 보살피며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판사 앞에서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나는 왜 삶의 규칙을 쫒아 꼬박꼬박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학교 따윈 가지 않아도 좋으니 엄마에게로 가서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다.

부모님의 이혼

마음을 태우고 엄마를 그리워하다 병이 났다. 저렇게 가만 내버려 두기만 하다간 아이 잡겠다며 어른들이 서두르고 아버지 등을 떠다밀어 나를 엄마에게 보내주었다. 딱 하룻밤만 엄마 옆에서 자고 오라는 것이었다.

굉장히 많이 아팠다. 며칠째 열이 들끓었고, 물조차 제대로 넘기지도 못했다. 엄마의 손이 나의 이마와 나의 손과 부르튼 입술을 바쁘게 오가며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은 자꾸만 났고, 딱 하룻밤만이라 정해진 시간이 야속해서 쉽사리 잠을 들 수도 없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했던 내가 엄마 품 안에서 따끈한 우유와 커다란 카스테라를 다 먹었다. 엄마 품에 안겨 있으니 살 것 같았고, 엄마가 먹여주는 우유와 카스테라 맛이 너무나 달콤하여 아프던 몸이 금방이라도 씻은 듯이 나아질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엄마가 살고 있는 방 안 풍경을 둘러보니, 일반 가정집 방과는 어딘지 달라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엄마와 내 것인 신발이었는데, 엄마 방 구석진 곳 신문지 위에 신발 두 켤레가 얌전하게 놓여져 있었다. 그때 당시 엄마는 여인숙에서 월셋방을 얻어 생활하고 계셨다. 낮에는 식당일을 하시고, 늦은 밤 여인숙으로 와 잠만 자고 다음날이면 다시 일터로 나가고, 고단함만이 연속인 삶을 살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나를 여인숙 월셋방에 늦은 밤까지 혼자 둘 수는 없었으므로, 살림방을 구하게 되면 나를 데려가겠다고 아버지에게 말미를 얻어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하루하루 엄마를 기다리다 병인 난 것이다.

ⓒ 위키커먼스


여인숙 월셋방의 엄마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
뒷 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우유와 카스테라를 먹고 정신이 든 나에게 엄마는 노래가사가 쓰인 종이를 보여주었다.
식당에서 만난 어떤 손님에게 배운 노래라고 했다. 가사가 너무 좋아서 언젠가 나를 보게 되면 꼭 가르쳐 주고 싶어서 손님에게 물어물어 적어둔 것이라고 엄마는 나에게 자랑을 했다.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 를 모를리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듣는 노래인 듯 엄마가 불러주면 따라했다. '노랫말이 좋아서 너 보면 꼭 가르쳐 주려고, 잊어 버리지 않을려고 이렇게 단단히 넣어두었지.' 엄마의 함박웃음에 노랫말이 진짜 좋다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노랫말이 좋아서, 이 다음에 나를 만나면 꼭 가르쳐 주고 싶어서 한자 한자 힘들게 옮겨 적었을 엄마의 떨림과 설레임이 그날 밤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의 엄마는 글자를 모른다. 나도 그 사실을 몰랐다가 초등학교 입학 후 내가 말도 안 되는 점수의 시험지를 받아 왔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엄마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엄마 여기에 뭐라고 써졌는지 몰라? 안 보여?" 라고 물었을 때, 엄마는 어려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그래서 엄마는 글자를 모른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한글을 모르던 엄마의 노랫말

'oy my god, 맙소사, 우째 이런 일이...' 지금 같으면 이렇게 괴성을 지르며 호들갑이라도 떨었을 일이 나에게 생긴 격이었다. 그 후로 난 글자공부를 엄마와 같이 했다. 학교에서 받아쓰기라도 하는 날이면, 전날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함께 시원한 방바닥에 배를 딱 붙이고 엄마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받아쓰기를 했다.

아직은 단어와 문장이 맞춤법이 서툴기만 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삐뚤빼뚤 한 글자 한 글자 받아 적은 것이 아닌, 옮겨 그렸을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늦은 밤 고단한 몸을 뉘우고서도 쉽사리 잠 들지 못해 이러 뒤척 저리 뒤척이다 노랫말이 적힌 종이를 꺼내보며 내 생각을 했을 엄마의 모습이, 지금 내 눈앞에 엄마의 실재가 있음에도 자꾸만 눈에 밟혀 눈물이 났다. 하룻밤 엄마의 기운을 전해 받아 이제는 제법 병에도 차도가 보였다. 엄마는 다시 고단한 일터로 가셨고, 나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그날이후 지금까지 이 노래는 나에게 엄마의 노래가 되었다. 엄마 없이 사춘기를 보내고, 엄마 없는 스무살을 살면서 이 노래는 나에게 엄마 대신이었다. 후미진 골목에 위치했던 남루한 여인숙 끝 방에서의 하룻밤 엄마의 몸짓과 엄마의 말투와 엄마의 표정을 근근이 기억해내며 이 노래를 생각했고, 혼자 불렀고 울었다.

지금은 당장이라도 달려가면 마주할 수 있는 곳에 엄마가 계신다. 엄마생신, 명절, 여름휴가 때는 우리가 엄마를 만나러 가고, 내 생일, 남편의 생일에는 엄마가 우리를 보러 오신다. 납득할 수 없었던 수많은 날들이 지나고, 내가 그 예전의 엄마 나이가 되었더니, 이제는 엄마를 꿈속에서만 찾지 않아도, 함께 팔짱을 끼고 목욕탕을 갈 수도 있게 내 삶이 발전하였다. 엄마의 한글실력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절에서 방생을 가시는 날에는 우리 집 식구 이름 생일 나이와 띠를 조목조목 엄마 스스로 적어 가신다.

세월이 많이 흘러 엄마가 호호 할머니가 되셨고, 지금이라도 당장 폰만 들면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와 보낸 그 하룻밤 생각이 난다.

'엄마야 누나야' 듣기 https://youtu.be/bDXx0grbYag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BGM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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