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들에게 에워싸인 조선 도원수 권율

광주목사 역임 경력을 기려 비석을 세운 것까지는 좋은데...

등록 2017.08.14 15:40수정 2017.08.1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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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창의비 왼쪽은 '관찰사 윤공 웅렬 선정비'이고 오른쪽은 '관찰사 이공 근호 선정비'이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1910년 조선이 망하도록 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거물 친일파들이다. 권율 창의비 앞에는 두 사람이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로부터 '친일 인사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2-3 광주공원에 가면 '都元帥(도원수) 忠壯(충장) 權公(권공) 倡義碑(창의비)'를 볼 수 있다. 광주향교와 광주공원 사이의 산책로로 진입한 직후 오른쪽을 돌아보면 27기나 되는 탑들이 도열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권율 창의비다. 본래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 종류의 빗돌들을 1957년 공원 입구에 모아 세웠다가 1965년 현재 위치에 옮겼다.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라면 조선 최고 군사령관인 충장공 권율(1537∼1599)이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리는 빗돌이라는 뜻이다. 도원수가 창의를 했다?


이치 패전을 뼈아파했던 일본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자 기사에 '왜적들은 조선의 3대 전투를 말할 때(稱朝鮮三大戰)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梨峙爲最).'라는 대목이 있다. 1592년 7월 8일 이치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일본군은 그만큼 가슴 아파 했다는 뜻이다.

조선군 최고 사령관이 의병을 일으켜?

권율은 영의정을 역임한 권철의 아들이지만 46세에야 급제했다. 그러나 권율은 한산 대첩 및 진주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행주산성 승리를 이끌었고, 4대 대첩으로 이야기되는 이치 대첩도 이룸으로써 역사에 우뚝 이름을 새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은 직책이 없었다. 직전까지 의주 목사였지만 제대로 행정을 살피지 못한다는 유언비어에 휩쓸려 자리에서 쫓겨난 신세였다. 전쟁이 터지자 조정은 권율을 광주 목사에 임명했다. 직책 없던 권율을 광주 목사(정3품) 자리에 앉힌 것은 정읍 현감(종6품)에 불과하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정3품)로 파격 승진시킨 일 만큼이나 조선의 행운이 되었다.


같은 날 일본군을 대파하는 권율과 이순신

광주 목사 권율은 1592년 7월 8일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전북 완주군 운주면으로 넘어가는 이치에서 일본군을 무찔러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패전으로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함으로써 군량미를 확보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권율은 이치 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 감사(종2품)가 되었다.

같은 날 한산도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 전함 66척을 부수는 대첩을 이루었다. 그해 10월 5일에는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이 진주 대첩의 쾌거를 이루었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의 경상우도 의병들도 낙동강 주변에서 일본군을 연파했다. 덕분에 호남 일원은 1592년 당시 일본군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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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대첩비 ⓒ 정만진


"장군(전라감사 권율)은 약 4,000명을 거느리고 (1592년) 9월 수원 독성(독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적들은 평양, 황해도 및 개성을 나누어 점령하였고 후방 부대들은 서울에 모여 있었다.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앞에 나아간 적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이듬해(1593년) 2월 2,300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는 중국에서 파견된 대장 이여송이 평양에 있는 적을 격파한 뒤이므로 평양, 황해도, 개성 및 함경도에서 후퇴한 적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장군은 소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으나 워낙 적은 수였기 때문에 적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 달 12일 수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장군은 군중에게 동요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성 안에서 활을 쏘며 돌을 굴려서 기어오르는 적을 격파하였으며 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을 쏟아서 이를 방지하였다. 일부의 적이 방위가 약간 허술한 쪽으로 들어오자 장군은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세 차례 격전 끝에 적은 마침내 참패하여 전사자의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태우고 달아났다. 이것이 이른바 행주대첩이다.

그해 6월 장군은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인용문은 행주산성의 권율 사당 충장사 앞에 있는 '행주 대첩비'의 일부이다. 요약하면 권율은 1592년 7월 8일 이치 대첩 후 1592년 9월 독산성에서 다시 이겼고, 그 이듬해인 1593년 2월 행주대첩을 이루었다. 행주 대첩 이후 권율은 조선군 최고 사령관인 도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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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대첩비 ⓒ 정만진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광주 목사, 그로부터 네 달이 지난 뒤에는 전라 감사, 다시 다섯 달이 흐르고는 도원수로 일했다. 줄곧 조선 관군의 주요 장군으로서 왜적과 싸웠다. 그런데도 광주공원에는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가 있다. 진정 조선 관군의 주요 장수였던 권율이 의병장을 맡아 일본과 싸웠다는 것인가?

권율이 의병을 모으지 않았다면 광주 공원에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가 세워졌을 리가 없다. 광주 목사, 전라 감사, 도원수를 연이어 역임한 관군 장수 권율은 언제, 왜 의병을 모았을까?

권율은 언제, 무엇 때문에 의병을 모았을까?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6월말까지 전라도에서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수군을 이끈 이순신과 경상우도(경상도 중 낙동강 서쪽 일대)를 지킨 곽재우·김면·정인홍 등 의병들의 분투 덕분이었다. 일본군은 이들을 피하느라 전라도 침공을 포기한 채 곧장 한양을 향해 북진했다. 여유가 생긴 전라 감사 이광은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당당하게 북상했다. 이광은 근왕, 즉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출정한다는 거대한 명분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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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3만여 조선군이 1,600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했던 광교산 아래의 풍경. 사진은 서봉사 터를 거쳐 종루봉으로 오르는 입구이다. ⓒ 정만진


하지만 이광은 공주까지 갔다가 철군했다. 선조는 이미 북쪽으로 피신했고, 한양은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다. 이광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선조가 보낸 심대(沈岱)가 전라 감영까지 찾아와 크게 질책을 했다. 결국 이광은 다시 출병하겠노라 맹세했다.

다시 군사 2만을 모은 이광은 광주 목사 권율 등을 대동하여 5월 2일 북진했다. 충청 감사 윤선각의 8000명과 경상 감사 김수의 몇백 군사들도 온양으로 집결했다. 이광이 지휘하는 군대는 3만 안팎의 대군이 되었다. 하지만 이광 군은 1600명에 지나지 않는 일본군에 참패를 당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를 연출했다.

권율, 조방장 백광언 등이 작전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 후 천천히 공격하자고 거듭 제안했지만 이광은 무턱대고 진격과 공격을 재촉했다. 숫자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일본군은 성 안에 들어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군이 무질서하게 쉬고 있을 때 벽력같이 뛰어나와 기습을 했다. 군사들이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다투는 바람에 아군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 와중에 백광언, 선봉장 이지시, 고부 군수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1592년 6월 5일의 일이었다.

무턱댄 공격, 어처구니 없는 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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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장군 초상 (이치 충장사의 영정으로, 걸려 있는 초상을 촬영한 것이므로 실제 그림과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 정만진

1600여 적병의 단 한 번 공격에 어이없이 괴멸을 당한 이광의 전라도 군은 겨우 도망쳐 충청도 군이 머물고 있는 광교산(수원과 용인 경계) 아래로 갔다. 6월 6일 아침, 역시 오합지졸의 모습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에 적이 또 기습을 해 왔다. 아군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충청병사 신익이 먼저 도망가자 아군은 저절로 무너졌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자는 이 광경을 두고 '마치 산이 무너지고 강이 터지는 듯했다(勢如山崩河決)'라고 한탄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갈 결심을 굳혔다.

선조는 이광을 파직하였다가 다시 귀양을 보냈고, 윤선각도 충청 감사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광의 자리는 권율이 맡았고, 충청 감사에는 윤선각 대신 공주목사 허욱이 등용됐다.

군사 없는 전라 감사, 어떻게 할 것인가

전라 감사 권율은 남원 일대를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했다. 비록 오합지졸이기는 했지만 광교산 전투 당시까지만 해도 군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죽고 다치고 하면서 완전히 해산되어 버렸다. 적은 이제 전라도 점령을 위해 금산을 거쳐 전주로 진격할 낌새였다. 적에게 군량미의 보고 호남을 그냥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직책은 감사이지만 사실상은 의병장이나 다름없었다. 권율은 김제 군수 정담, 해남 현감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종사관 이봉, 비장 강운, 비장 박형길 등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웅치를 지키도록 했다. 자신은 동복(화순) 현감 황진 등 1500여 장졸들과 함께 이치에 진을 쳤다.

일본군은 6000명이 웅치로, 1만 명이 이치로 진격해왔다. 권율이 이치에서 왜적과 싸울 때 그의 좌우에는 우리 의병과 관군 병사들이 함께 피를 흘렸다. 마침내 아군은 이치에서 적을 격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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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비석이지만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안내문 ⓒ 정만진


그러나 오늘날 광주 공원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에 가면 친일파들의 선정비가 장군을 좌우에서 에워싸고 있다. 권율 창의비 왼쪽은 '관찰사 윤공 웅렬 선정비'이고 오른쪽은 '관찰사 이공 근호 선정비'이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1910년 조선이 망하도록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거물 친일파들이다.

권율 창의비 앞에는 두 사람이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2005.5.31.∼2009.11.30.까지 활동)'로부터 '친일 인사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철거나 단죄비 설치 등 방안을 논의 중에 있으므로 본 안내문을 존치할 예정'이라면서 '이들의 친일 행적은 QR 코드를 참조 바랍니다'라는 보충 설명도 붙어 있다. 인근에는 친일파의 비석일지라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현수막도 게시되어 있다.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선정비는 여전

친일파로 선정된 지 이미 10년 안팎이나 되는 자들의 선정비 처리 문제가 그토록 논의를 거듭해야 할 일인가 싶어 가슴이 답답하다. 권율 장군께서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신다면 틀림없이 '그게 그리 어렵다면 창의비를 철거해버려라! 어찌 친일파 선정비 속에 내가 묻혀 지내겠느냐!' 하고 크게 호통을 치실 것이다.
#권율 #이치 #이광 #행주산성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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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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