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왜 단지회 동지를 밝히지 않았나

혈서 쓰고 독립만세 결의… 구체적 실명 아직 확인 안 돼

등록 2017.08.02 16:32수정 2017.08.02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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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와 절개를 지킨 인물은 죽어서도 영웅으로 남는다. 영웅의 업적은 책이나 기념관으로 재탄생돼 후세에 널리 알려진다. 독립운동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안중근 의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국에서 오랜 기간 항일운동을 벌이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람. 안중근 의사가 지키고자 했던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안중근 의사가 강조한 동양평화론과 서슬퍼런 민족의 독립운동사가 고이 간직된 러시아 크라스키노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250km 떨어진 크라스키노는 연해주의 최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한인들의 항일운동 주요 거점 지대였다. 안중근 의사가 최재형, 이범윤과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을 위해 단지회를 조직한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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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 크라스키노로 가는 여정. ⓒ 최종환


그러나 영웅의 흔적을 찾는 길은 험난했다. 광활한 대지에 인적은 드물었고, 오가는 차량도 쉽게 볼 수 없었다.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 탓에 버스는 이리저리 기울었고, 몸은 갈수록 피곤해졌다. 어제는 외교부로부터 여행에 '유의하라'는 문자를 받은 터였다. 문명의 빛을 보지 못하는 이곳은 어쩌면 100년 전 우리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듯했다.

국운 기울자 연해주로 망명길 올라

1879년 9월 2일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출신으로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이다. 안 의사는 어릴 적 비교적 유복하고 안락한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다. 그는 근대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개화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정계 진출이라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열망한 정치를 아들이 이어받은 것일까. 안중근 의사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신문을 탐독하며 국제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면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 침략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꿈꾼 정치인보다 민족을 살리겠다는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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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을 기리는 표지석. ⓒ 최종환


이후 1907년 연해주로 망명길을 택했다.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꾀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중국 상하이 대한임시정부 초대 재정총장을 지낸 최재형 선생으로부터 각종 훈련과 지원도 받았다. 그러다 1909년 3월 11명의 항일투사들과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일명 '단지동맹'으로 잘 알려진 이 조직은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조선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졌다.

안 의사의 높은 야망은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암살 계획으로 이어졌다. 또 3년 내에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자살로써 국민에게 속죄하겠다며 왼손 네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피로써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이토 히로부미 사살된 하얼빈은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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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이곳에서 단지회의 넋을 기렸다. ⓒ 최종환


그해 9월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에 들른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일본은 만주 하얼빈을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면 하얼빈을 관할하고 있던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요했다.

특히 1904년 미국과 체결한 '가스라-태프트'조약으로 필리핀 진출이 봉쇄된 일본은 만주를 장악하는 일이 큰 숙제였다. 러시아 역시 독일을 상대하기 위해 극동지역의 평화유지가 중요했다.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상황에서 이토의 만주 방문은 정치, 외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이토를 처단해 일제의 조선 침략을 막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 하얼빈역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애타게 기다렸다. 민족의 한을 치유하기 위한 길목에 선 순간이었다. 잠시 후 신문에서 흐릿하게 보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 시야에 잡혔다.

안 의사는 그를 향해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총탄 소리와 함께 이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피 튀긴 총탄에는 식민지 청년의 용기와 한이 응축되어 있었다.

영웅은 끝까지 동지를 지켰다

2011년 8월 4일 크라스키노에 단지회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조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은 이곳은 매우 쓸쓸해 보였다. 곳곳에 잡초가 무성했고, 유적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내원조차 없었다. 단지회 소속 12인 애국투사 이름이 기록된 기념비만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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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회 조직원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 ⓒ 최종환


그러나 기념비에 명기된 이름마저 실제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회의 구성원을 일제에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문을 받을 때 조직원의 별명이나 가명을 진술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보유한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에서도 정확한 이름을 확인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안 의사는 심문관들의 거듭되는 추궁에 "우리들 결사대(決死隊)는 12명이라고만 생각하지 말라. 연해주로 이주한 일백 만 동포는 모두 결사대라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답했다. 끝까지 비밀결사의 명단을 밝히지 않았던 안 의사의 결기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도 '안중근의 동의단지회의 보유(安重根의 '同義斷指會'의 補遺)'라는 논문에서 "12인의 명백한 거론자는 안의사를 비롯해 김기룡과 백규삼, 황병길 등 7인 안팎"이라며 "나머지 5인은 거명된 이름이 실명인지 혹은 가명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100년이 흘렀지만 단지회의 실체와 진실은 온전히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보다.

그가 죽어서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조국과 함께한 동지를 배반하지 않는 인품이 있어서다. 안중근 의사가 이승을 떠난 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민족애는 한국을 넘어 러시아에서도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 우리 세대가 그의 공적을 기리고 지조와 절개를 지킬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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