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명함 떼고, 벌금 300만 원 택한 이유?

[노역장 가는 길 ④] 30여 년, 온 몸으로 외친 호소... 갈 길, 아직도 멀어

등록 2017.08.05 12:13수정 2017.08.1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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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에도 동시에 연재합니다.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고, 후원금은 벌금을 대신 내는 데 쓰입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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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박옥순씨가 7월 24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자진 노역을 마치고 출소 직후 남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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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박옥순씨가 7월 24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자진 노역을 마치고 출소하고 있다. ⓒ 이희훈


"어쩌다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들의 질문은 엇비슷하다. 박옥순씨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는지 지인이 장애를 겪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 사지 멀쩡한 비장애인 옥순씨가 왜 그렇게까지 장애인 인권을 외치는지 무엇이 옥순씨를 움직이게 하는지 묻는 것이다.

옥순씨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사무총장으로 집회와 농성을 하다 받은 4개 사건으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옥순씨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장애인권 활동가들에게 매년 평균 2000만 원의 벌금형이 선고되고 있다. 모두 장애인권 관련 집회와 농성을 벌이다 받은 것이다. 벌금을 내지 못해 수배를 받은 활동가도 있었다. 옥순씨는 노역을 택했다. 7월 17일부터 7박 8일을 서울구치소에서 보냈다.

그러니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장애인권 활동가로 30년을 살아내는 데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옥순씨에게도 장애는 낯설었다. 어떤 종류의 불편과 슬픔을 겪는지 차별과 편견이 얼마나 장애인의 삶을 좀 먹고 있는지 그 역시 잘 모르던 시기가 있었다.

"우연치 않게 발을 헛디뎌서, 훅 들어왔어요."

옥순씨의 답은 늘 같았다. 월간지 기자 3년 차 때의 일이다. 호흡이 빠른 취재가 고팠다. 누군가 주간지 채용이 나왔다며 써보라고 권했다. 어떤 종류의 주간지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주간지'만 보였다. 그렇게 입사한 곳이 장애인신문사였다.


장애인신문사에서 4·20, 장애인의 날을 취재했을 때다. 축사와 공연이 이어진 행사였다. 여러 민간 장애인 단체가 자리를 채웠다.

이날은 옥순씨가 신문사를 그만두어야겠다 결심한 날이기도 하다. 2년 째 장애인의 날을 취재하며 한계를 느꼈다. 지난해 기사를 그대로 붙여 써도 별다를 게 없었다. 장애인 복지를 말하고 희망을 전하는 말의 성찬뿐이었다. 유명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공연하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무대가 잘 보이지도 않는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행사. 화가 났다. 

"장애가 있는 삶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사회는 변하지 않더라고요. 한계가 벅차게 다가왔죠."

현장에 뛰어들었다. 장애인의 삶과 제도적 한계를 다루던 '기자'란 이름을 떼어내고 제도를 개선하고 정책을 만들어가는 '활동가'의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10여 년을 일했다.

"장애인이 뭐하러 배우냐"..."교육은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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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박옥순씨가 7월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자진 노역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마친 동료들과 함께 걷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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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박옥순씨가 7월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자진 노역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마친 후 동료들과 포옹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시작은 장애아동의 교육권 확보였다. '몸이 성치 않은데 무슨 교육이냐, 아픈 애가 어디를 나다니냐, 써먹지도 못하는 거 배워서 뭐할래.' 가족들마저 '장애인에게 무슨 교육이냐'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몸이 좀 불편하다는 이유로 교육도 취업도 결혼도 삶도 장애에 저당 잡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던 시절. 장애인 교육률이 12%인 1990년대였다. 그래서 매달렸다. 장애인에게 의무교육을 허락하라며 옥순씨는 "교육이 생명이다"라고 외쳤다.

1977년 '특수교육진흥법'이 제정됐지만 장애인의 교육은 의무가 아니었다. 특수교육 대상자인 장애인이 학교에 입학하려 할 경우 특수교육 대상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하면 안 된다는 정도에 머물렀다. 1994년에 와서야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의무교육으로 한다는 개정안이 나왔다. 유치원과 고등학교 가정을 무상교육으로 해야 한다는 규정도 생겼다.

헌법은 교육이 모든 국민이 누려야할 기본권이라 했지만 장애인은 예외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교육법 조항에 처음 설치된 것이 1949년이었다. 본격적으로 의무교육 정책이 추진된 해가 1952년이다. 장애인은 42년이 걸렸다. 중학교 의무교육 역시 1984년 규정됐다. 장애인은 10년 후에야 가능했다.

명동성당 앞에서 집회하고 서울시청에서 유인물을 나눠주고 국회로 찾아가 의원을 만나 법안을 설명하고 나서야 획득한 기본권이었다. 장애인에게 의무교육이 왜 필요한지, 장애인의 현실을 2년이 넘게 알려야 했다.

교육 다음은 '편의시설'이었다.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입구에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드는 것. 장애인이 편리하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요구였다. 2003년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이 개정됐다.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과 임산부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편의시설을 마련하게 됐다.

장애 여성의 입을 트는 시간도 만들었다. 옥순씨는 주위 사람들을 통해 장애여성의 연락처를 얻었다. 그리고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다.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한 달에 한 번 만나 자신이 겪은 차별, 사회가 제멋대로 건 빗장을 털어놓는 시간이었다.

장애여성들은 모임에 나오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모임에서 "그 몸으로 어딜 나다니냐"며 호통치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밖에 나가 다칠까 하는 걱정이 아니다. 장애를 드러내며 바깥세상과 접속하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집에 손님이 오면 가장 먼저 장애인자식을 골방에 숨겼다. 친인척의 결혼식이 있어도 참석할 수 없었다. 집에서 빨래, 설거지, 청소 모두 이들의 몫이기도 했다.

"장애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반성했어요. 가정이 처참한 현장이기도 했으니까. 장애여성들이 자신을 '폐기물'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차별과 편견이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빗장을 여는 사람들 모임을 통해 옥순씨는 차별과 편견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접했다. 휠체어를 타고 회사 면접을 본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보라"는 면접관, 시각 장애인인 걸 알면서 "글 읽을 줄 아냐"고 묻던 사람. 수화 통역자가 없어 성폭력을 당한 청각장애여성이 간통죄로 몰린 사건. 모두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에 벌어진 일이다.

쇠사슬로 몸을 묶어야 겨우 들리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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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박옥순씨가 7월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자진 노역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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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박옥순씨가 7월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자진 노역을 앞두고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장애인차별금지법(장차법)이 절실했다. 옥순씨를 비롯한 장애인권활동가들 사이에서 2001년 본격적으로 장차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헌법과 법률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한다 했지만, 모든 사람에서 배제된 채 당연하듯 차별받아온 장애인.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적 장치가 필요했다.

차별은 안 되지, 그래 법이 필요하겠다,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적극적이지 않던 사람들과 사회적 분위기. 이들이 열어야 할 빗장이었다. 그렇게 법률이 제정되는 데까지 2225일이 걸렸다. 백만인 서명운동, 토론회, 간담회, 공청회, 기자회견, 1인 시위. 집중집회와 농성을 이어간 날이다. 전국 84개 지역에서 정오부터 1시까지 동시 1인 시위를 한 적도 있다. 옥순씨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에서 이 모든 호소와 싸움, 투쟁을 함께했다.

"장차법을 요구하며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이라는 것을 했어요. 집 밖에 나오면 대중교통으로 움직일 수 있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를 도입해달라는 거예요. 아주 당연한 요구를 장애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장애인들은 버스에 자기 몸과 휠체어를 쇠사슬로 묶었다. 지하철 철로에 전동휠체어를 동여맸다. 장애인이 지하철에 타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보여주기 위해 백 명의 장애인이 모여 함께 지하철을 탔다. 부탁과 호소가 아닌 날 것 그대로 몸으로 보여줘야 했다.

2225일 싸움은 그렇게 이어졌다. 2001년부터 장차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007년 3월까지 외쳤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애인의 의무교육을 외치고 이동권을 호소하고 차별에 저항한 세월이다.

1989년 장애인신문사 기자부터 2017년 전장연 사무총장까지, 옥순씨는 장애를 떠안고 살았다. 옥순씨 역시 림프 부종을 앓고 있다.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어 매일 무사하기만을 바란다.

그 사이 저상버스가 생기고 장애인콜택시가 등장했다. 활동보조인 제도가 생겼고 장애를 사유로 차별할 수 없도록 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옥순씨는 2017년 7월. 노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교통법상 도로교통방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또 다른 법률은 이들의 농성과 집회에 엄중한 잣대를 들이민다.

"삭발부터 단식까지 안 해본 거 없이 세월이 지났어요.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어요. 몸과 머리로 다 싸워본 세월이에요. 그런데 여전히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처럼 외칠게 남아있네요."

30여 년, 옥순씨가 달려온 걸음과 외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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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활동가 박옥순씨가 7월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자진 노역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마친 후 남편과 입맞춤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장애인 #노역 #박옥순 #전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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