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일반학교와 대안학교

기억 속의 통영동중과 간디학교... 간디학교는 나에게 대안이 되어주었다

등록 2017.08.06 17:50수정 2017.08.0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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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만난 수학교사의 언어폭력

"새끼, 늘섐이 아이고 늘꼬랑창이네, 늘꼬랑창."

내 이름은 늘꼬랑창, 아니 늘샘이다. 열세 살, 중학교 1학년 때 잠시 다닌 입시학원의 수학교사는 내 이름 늘샘을, 늘꼬랑창으로 바꿔 버렸다. 수업시간에 교탁에 서서 '늘꼬랑창('시궁창'을 뜻하는 전라, 경상도 방언)'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그는 반어적인 비유를 이용한 자신의 말장난이 기발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충격을 받고 구겨진 내 표정을 살핀 그는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나는 그 순간의 모멸감을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내 이름을 좋아했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나의 부모는 세 살인 나를 업고 천왕봉을 올랐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는 작은 샘물 '천왕샘'이 있는데, '늘샘'의 샘 자는 거기서 따온 것이라 했다. 이름처럼 살기는 어렵다지만, 나는 샘물처럼 활기차게 흐르듯 살고 싶었다.

나는 그때 그 교사에게 비난받을 어떤 잘못을 했을까? 소위 학생의 본분에 어긋난 불량한 행동을 했거나, 반인륜적이거나, 정말 더러운 꼬랑창 같은 행동을 했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그날따라 수학 시험 성적이 평소보다 더 안 좋았거나, 칠판에 있는 문제를 못 풀었거나, 물어본 질문에 대답을 못 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공부를 못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학생들이 교사에게 욕설을 듣고, 소위 '사랑의 매'라고 불리는 구타를 당하는 이유였다. 2011년 초중등교육법이 개정되며 소위 '체벌금지법'이 시행되었다. 마침내 학교에서 구타는 사라졌을까. 인간성이 막장인 선생 자격 없는 교사들은 마침내 사라졌을까. 대한민국의 교육은 나아지고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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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룡국민학교, 1993년 두룡국민학교, 1993년, 도남동 소풍 ⓒ 최늘샘


내가 다닌 일반학교에서의 폭력 경험


내가 일반학교를 다닌 건 국민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7년 동안이다. 그 7년 동안 나이와 상관없이 학교에는 언제나 구타와 욕설이 있었다. 통영국민학교 2학년 때의 교사는 교탁에서 교실 문을 지나 복도에 갈 때까지 동급생의 뺨을 때렸다. 오른쪽 왼쪽 번갈아 가며 날리는 어른의 커다란 스윙에 아이는 온몸이 휘청 휘청거렸고 뺨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50명의 아이들은 숨죽여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 학생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아이를 그렇게 때릴 수가 있을까. 그렇게 심하게 맞는 아이들은 대부분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통영동중학교의 교사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매가 있었다. 음악교사는 길쭉한 텔레비전 안테나로 학생들의 허벅지 안쪽을 찰싹찰싹 때렸다. 당구채, 마대 자루, 지휘봉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건 평범한 축이었다.

국민학교 때 손바닥, 발바닥을 때리던 30센치 자는 너무 약해 보이는 매였는지 중학교 남자 교사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내려간 점수, 틀린 문제 개수에 따라 맞는 매는 전교 1, 2등 모범생들도 피해갈 수 없는 보편적인 매였다. 동중 수학교사는 종종 손잡이가 있는 플라스틱컵으로 때렸는데, 팔 안쪽의 뼈를 컵 모서리로 때리면 금세 시퍼런 멍이 들었다.

폭력은 학생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싸움 1등을 우리는 '통'이라고 불렀다. 두룡국민학교 5학년 통은 중훈이였다. 중훈이는 키가 제일 컸고 소문에 의하면 한 학년을 꿇었다고 했다.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싸움 4등 민석이와 6등 기정이가 붙었다. 당연히 민석이가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기정이와 친한 중훈이가 싸움 소식을 듣고 달려와 민석이를 쥐어 팼고,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있는 민석이를 기정이가 발뒤꿈치로 찧기 시작했다. 분이 얼마나 쌓였던지 기정이의 발길질은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정의롭지 않은 싸움이었다. 저학년들은 숨을 죽이고 피해갔고 나를 포함한 동급생들 누구도 싸움을 말리지 못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폭력의 대상이 될지도 몰랐다. 중훈이, 기정이와는 친하게 지내는 게 상책이었다. 열한 살 방관자였던 나는 그렇게 비겁함을 배웠다.

그때의 수치심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먼지 범벅, 피범벅이 된 민석이는 그러나 울지 않고 일어나 코피를 닦으며 저벅저벅 교실로 돌아갔다. 민석이는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수돗가에서 물배를 채울 때가 많았다.

중학생이 되고 주먹이 커지자 폭력의 수준과 소문도 따라 커졌다. 통영동중은 같은 재단인 통영상업고등학교와 운동장을 같이 썼다. 선배들과 상고생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매점을 겨우 이용할 수 있었고, 작은 운동장은 그나마 사용할 수도 없었다. 상고 학생들이 몇 대 몇으로 싸웠는데 유리창문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깨진 창문 틀로 목을 긁어버렸다는 잔인한 소문이 전해졌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실제로 앰뷸런스가 오기도 했다. 

새로운 학교, 대안학교·간디학교

성적 경쟁과 폭력이 난무하던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갈 때쯤 부모님이 간디학교를 추천했다. 지리산에 있는 대안학교였으므로 바로 결정할 수는 없었고 겨울방학 때 열리는 4박 5일 동안의 예비학교에 참가했다.

교사들 중 누구도 욕설을 하거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학생들은 학년이 섞여 있었지만 나이를 구분 짓지 않았고 모두가 친구 같았다. 지리산 겨울바람은 차가웠지만 간식으로 나온 고구마와 미숫가루는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따듯하고 달콤했다. 5일 동안 만난 그 새로운 학교의 분위기에 이끌려, 중학교 자퇴를 결심했다.

대안학교에는 '일반학교'에서 내가 싫어하는 많은 것들이 없었다. 매, 폭력, 권위, 조회, 두발제한, 교복, 성적, 경쟁, 시험이 없는 학교였다. 농사짓기, 옷만들기, 집짓기, 산행, 철학 수업은 국영수 따위보다 중요한 수업이었다. '대안학교가 말하는 대안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대안학교를 졸업하면 대안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삶은 다양하고, 대안은 한 가지 정해진 모습일 수 없다. 대안학교도 엄청나게 많아졌고 지향하는 가치도 저마다 다르다. 대안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은 자녀가 특별한 경험도 하고, 또한 좋은 대학도 가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학생들의 바람이나 고민도 마찬가지다. 일반학교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대안학교도 결국은 우리 사회 속에 있고 학생들은 학창시절 몇 년 동안 조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누가 '간디학교 생활이 어땠냐'고 물어보면 대답한다. "선생님들이랑 학생들이랑 다 같이 친구처럼 식구처럼 지냈고요. 자연 속에서 다양한 수업을 했고, 하고 싶은 걸 하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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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학교, 2000년 간디학교, 2000년, 운동장 ⓒ 최늘샘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물으며 금시계를 풀고는 뺨을 때리는 영화 <친구>의 교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반추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 현수는 외쳤다. "대한민국 학교 전부 X 까라 그래!" 교무실 앞에 진열된 무슨 무슨 트로피들일랑 다 깨부숴 버리고, 현수는 학교를 떠난다. '모두가 다 다니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는 절망감으로 인해, 소리 지르는 그의 눈에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물이 맺혀있었다.

내가 다닌 1990년대 일반학교의 폭력성은 1980년대의 학교를 다룬 두 영화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일반학교를 자퇴하고 갈 수 있는 새로운 학교가 있었다. 학생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 교사들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간디학교는 나에게 대안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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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학교, 2000년 간디학교, 2000년 ⓒ 최늘샘


#대안교육 #대안학교 #간디학교 #교육 #체벌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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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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