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충이 뭐야?" 묻는 아이, 깜짝 놀라 봤더니

[다다와 함께 읽는 그림책] 정인하 글그림 <밥. 춤>

등록 2017.08.14 18:10수정 2017.08.1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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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충? 엄마, 밥충이 뭐야?"
"그게 뭐야...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이 그림책 제목이 밥충이잖아."
"아닌데, 잘 봐... '밥. 춤'이야."
"아, 그렇네."

깜짝 놀랐다. 아직 읽고 쓰는 게 서툰 일곱 살 둘째 입에서 '밥충'이라는 말이 나와서.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그러는 건가 싶어 자세히 물어보려고 고무장갑을 벗어던지려던 차였다. 둘째가 이만큼 성큼 다가와 "이거 읽어줘" 한다. "나는 한글을 모르잖아" 아주 당당하게 말하며. 내가 "네가 읽을 수 있잖아" 말하기도 전에.


ⓒ 고래뱃속

나는 웃는 얼굴로 책을 받아 들었다. 왜냐? 이 그림책 <밥. 춤>(정인하 지음, 고래뱃속)은 글밥이 아주 적기 때문이다. 하하하. 게다가 등장인물의 표정과 동작이 어찌나 흥겨운지 읽고 나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져서다.

사라락 사라락, 어디선가 날아오는 양복 재킷 한 벌. 한 손에는 다리미가 들렸다. "누구일까?" 내 질문에 아이가 "세탁소 아줌마"하고 받아친다. 책 읽기가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둘째.

"그럼 파 한 단을 들고 훠이훠이... 춤을 추는 이 분은?" 대답이 없다. "왜, 모르겠어?" 말없이 내 입만 바라보는 둘째. 당연하다. 허리춤에 전대를 찬 상인을 본 적 없으니까. 

"이 분은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이야, 시장 상인들은 이렇게 허리에 지갑을 차. 나중에 엄마가 시장 가면 다시 알려줄게." 

이번에는 등에 '퀵퀵'이란 글자가 적힌 조끼를 입은 아저씨가 휘리릭 하고 날아다닌다. 이 아저씨는 누굴까? "또 모르겠어." 당연하다. 집에서는 퀵배달 아저씨를 만날 일이 없으니까.


"이 분은 물건을 빨리 배달해주시는 퀵배달 아저씨야. 주로 사무실에서 급한 서류나 부피가 작은 물건들을 오토바이를 타고 빨리 배달해주시는 일을 해."
"엄마, 근데 왜 남자 머리가 길어? 이것 봐."
"어머 얘, 남자도 머리 긴 사람 많아." 

다음, "차라락 착착 차라락 착착, 이 아저씨는 누굴까?" "아 청소부 아저씨." 어라? 이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네, 이 아저씨 머리도 파마를 한 것 같은 데, 뭐지?" 뒷장을 재빠르게 넘겨 본다. 휙휙휙. 아하! 등장인물에 이런 비밀이 숨어 있었구나.

최혜진이 쓴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는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림책으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싶은 한국 부모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는 최씨의 질문에, 프랑스 그림책 작가 조엘 졸리베가 하는 말, 

"이 질문은 오히려 아이들이 던져야 할 것 같은데요? '제 부모님이 그림책 속 이미지를 이해 못해요. 조언을 해주세요' 이렇게요. (웃음)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그림 읽는데 재능이 있어요. 다만 집중력이 좀 필요할 뿐이죠. 그저 그림에 눈을 둘 시간을 주기만 하면 돼요. 멈추어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내가 딱 이 사례에 등장하는 '그림책 속 이미지를 이해 못하는' 부모가 될 줄이야. 눈썰미 좋은 둘째 덕에 '흥'만 있는 줄 알았던 그림책을 다시 보게 됐다. 고정된 성역할에 갇혀 있는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춤을 추듯 일하는 시장 상인들. 그림책 <밥, 춤>의 한 장면. ⓒ 고래뱃속


리듬에 맞춰 수타면을 '팡!' 때리는 중국집 주방 노동자나, '뽀드득 뽀드득' 구두를 수선하고 닦는 구두 수선 노동자, 뚜구두구 둥둥 연장 소리 내며 일하는 건설 노동자나, 어깨를 들썩이며 물건을 나르는 택배 노동자, 고층 빌딩 유리창을 청소하는 사람이 전부 남자일 필요는 없겠지.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남녀'라는 틀에 구애 받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걸 <밥. 춤>은 아주 단순한 글과 그림으로 말하고 있던 거였다.

다만 그림책 속에서 만나는 이들의 밥벌이가 실제로는 결코 쉬운 일도, 춤이 절로 나오는 흥겹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설명은 아이들에게 필요할 듯하다.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계속되는 요즘, 뜨거운 햇빛 아래 일하는 노동자들을 보면 아찔할 정도니까. 우리의 편안함은 반드시 누군가의 수고로움을 동반하는 것일 테니, 아이들에게 그분들의 수고로움을 한번쯤 알려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끝으로 책의 마지막,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에 환호하는 아이 그림을 보며 "이 사람은 누굴까?" 했더니 둘째가 말하길, "엄만 그것도 몰라? 엄마잖아" 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살짝 아쉬웠다. 기왕 남녀간의 고정된 성역할을 깨고 싶었다면 '엄마 대신 아빠여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베이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밥.춤

정인하 지음,
고래뱃속(아지북스), 2017


#밥, 춤 #정인하 #고래뱃속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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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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