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로도 죽지 않고 살아난 이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③]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민청련을 탄생시켰다

등록 2017.08.09 14:40수정 2017.09.05 11:53
1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기자 말

1983년 9월 30일에 민청련이 창립된 단초는 사실상 1980년 광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살해된 1979년 10.26정변 이후 12.12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장악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하였다. 5.17쿠데타였다.

이런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찬탈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에 대해 이들은 공수부대와 탱크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대응했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5.18 광주민중항쟁이었다. 광주항쟁은 이후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마르지 않는 진원지가 되었고, 민청련 운동 역시 그 속에서 나왔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 통치


전두환은 5.17쿠데타와 5.18 광주항쟁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설치하고 유신체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이들은 김대중을 체포하고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김대중, 문익환 등 수많은 민주인사를 체포, 고문, 투옥하였다.

a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에 피고로 참석한 문익환 목사, 김대중 씨 모습. ⓒ 오마이뉴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게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민주 성향의 언론인들을 언론사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언론정화'라는 명목으로 933명의 언론인을 직장에서 해직시켰다. '언론대학살'이라 불리는 대참사였다.

또한 신군부는 사회정화라는 미명하에 야만적인 인권유린을 자행했는데, 삼청교육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각종 범죄 전과자 등 불만세력이라 판단되는 6만여 명을 검거해 그 중 4만여 명을 군부대에 수용해 순화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구금, 강제노역, 구타, 기합 등 가혹행위를 가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범죄 전과자 이외에 상당수의 민주노조 간부들까지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군, 검, 경을 동원한 무단통치로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전두환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형식적인 간접선거를 거쳐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전두환은 박정희 유신헌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5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를 거쳐 제정하였다. 이 개정헌법에 따라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설치하여 국회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 거수기나 다름없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을 가결하여 835명의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고, 개악된 언론기본법, 노동관계법 및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반공법을 폐지하고 더욱 강화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이나 저항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장기집권의 토대를 굳혀갔다.

전두환 정권의 공작정치와 3S정책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는 1983년까지는 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군부독재에 협력하거나 침묵했다. 야당의 창당에도 정권이 직접 개입했다. 즉 중앙정보부가 민한당과 국민당 두 야당의 창당을 배후에서 주도함으로써 그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는 전두환 정권을 미화하고 추종하는 어용 신문으로 전락했다.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만 바꾼 정보기관은 대법원을 통해 관할 법원에 시국사건에 대한 안기부의 방침을 시달했다. 학내시위주동자에 대해서는 형량까지 지침을 내려 '직접 조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동 통제도 유신체제 때보다 더욱 강화했다. 그들은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산별노조를 폐지하고 기업별 노조체제를 강요하여 국가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한편 전두환 정권은 강압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회문화정책을 진행했다. 일명 '3S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이었다. 광주학살의 만행 위에 집권한 정권의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 1981년 5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이라는 대규모 관제 놀이행사였다.

a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 행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1981년 9월,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키고, 이어 11월에는 1986년 아시안게임 유치까지 성사시켜 전국적으로 스포츠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 3월에는 전두환의 강력한 지원 속에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프로야구 출범은 국민적 프로야구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또 이 당시 학생 교복 폐지, 두발 자유화, 야간통행금지 해제, 영화검열 완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물질주의적이고 향락적인 오락문화 확산을 통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려 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혹독한 탄압 – 녹화사업과 조작간첩사건

전두환 정권은 한편으로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더욱 치밀하고 혹독한 탄압을 자행했다. 녹화사업이 그 대표적 사례다. 녹화사업은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진행됐는데, 군대에 강제 입영시킨 학생운동가들을 보안사로 불러 감금하고, 고문과 위협으로 학생운동 경력을 자백하게 한 다음 학원프락치로 활용하는 사업이었다.

녹화사업은 처음에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내시위를 이끌었던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점차 대상을 넓혀 나가 재학생 중에서 시위를 주도할 문제 학생으로 지목되거나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학생들을 강제 입영시켜 녹화사업의 대상으로 삼았다.

녹화사업의 대상이 된 학생들은 갖은 고문과 협박 등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동료를 배신하도록 강요받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래서 강제 징집된 병사들 중에서 정성희(연대 81학번), 이윤성(성대 81학번), 김두황(고대 80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등 6명이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a

'녹화사업'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6명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한 민청련이 만든 전단지와 성명서. ⓒ 민청련동지회


그 밖에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가들을 대거 검거 구속한 무림·학림사건이라든지,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의 학습모임을 정부전복집단으로 용공조작한 '부림사건', 아람이라는 아이의 돌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를 씌운 '아람회 사건' 등도 공작에 의한 민주화운동 탄압의 예이다. 이 사건들은 2000년대 들어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1980년대 초 발표한 수십 건의 간첩단 사건 중에도 상당수가 이런 탄압의 일환으로 조작된 사건임이 나중에 밝혀졌다.

대학생들의 저항

전두환 집권 3년 동안 정권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저항세력은 대학생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5.17쿠데타로 문을 닫은 전국의 대학들은 1980년 9월 3일부터 오랜 휴교를 끝내고 2학기를 시작했지만 대학가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70년대 긴급조치 9호 시절의 감시체제가 다시 되살아났고, 사복경찰이 대학 안에 상주했다. 유신 시대 말기에 시행되었던 문제 학생에 대한 교수책임제도 부활했다.

a

당시 서울대학교에서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내려다보는 도서관 난관에서 기습적으로 시위를 벌이곤 했다. 관계기관의 압력으로 학생들이 모이는 광장 잔디는 가시가 있는 장미로 대체됐다. ⓒ 민청련동지회


그러나 이러한 감시체제와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1980년 9월 2학기 벽두부터 학생들의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사복경찰들이 학교 도처에 상주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시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기습적으로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체포, 구속, 제적당했다. 그러나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투쟁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리고 1980년 김의기(서강대), 1981년 김태훈(서울대) 학생처럼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투신자살하는 극한투쟁으로 이어졌다.

5월 광주항쟁은 비록 일시적으로 패배했지만 이후 민주화투쟁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됐다. 학생들은 학내 서클들이 중심이 되어 전투적인 학생운동 세력을 양성하고 단련했다. 이렇게 성장한 학생운동가들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과정에 대한 반성 속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했다. 전통적인 우방으로 여겼던 미국이 독재정권을 후원하고 학살을 방조하였다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학생운동 안에 반미의 기운이 싹텄다. 1982년 3월에 일어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그러한 학생운동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면서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성장한 학생운동은 1982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대규모 연합시위를 시도하고, 교내 시위와 더불어 도심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도 벌일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몇 개 대학에 국한되었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여자대학에서도 교내 시위를 벌였다. 1983년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학생들의 투쟁은 더욱 확대되고, 전투적으로 변화해갔다.

1980년 5월 17일부터 1983년 말까지 3년 반 동안 반정부시위로 제적된 학생이 1363명에 달했다. 학교 밖으로 쫓겨난 이들 학생운동가들이 바로 민청련 창립의 주역이 됐던 것이다.
#민청련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녹화사업
댓글1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3. 3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여론조사로 본 4.10 총선 판세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