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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힌츠페터에게 김사복은 동지... 마지막 인터뷰 슬퍼"

[inter:view] 한국 방문한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택시운전사> 보고 잠 못 잤다"

17.08.14 18:16최종업데이트17.08.1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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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부인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씨.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해 "직접 겪진 않았지만 남편의 얘길 들으면서도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고 말했다. ⓒ 쇼박스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광주의 진실'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광주항쟁에 대해 위와 같이 말하곤 했다. 군부 독재 세력의 폭압 앞에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가고, 언론이 통제 당했을 때 희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등장했다.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리는 고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외신 중 가장 발 빠르게 1980년 그날의 광주에 진입해 목숨을 걸고 현장을 기록했고, 세상에 알렸다.

고인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후 지난 13일 문재인 대통령은 고인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돌아온 답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남편은 말하곤 했다. 앞으로도 젊은이들이 민주주의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였다.

남편은 고인이 됐지만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씨에게도 한국은 특별한 나라였다. 그는 지난 8일 입국하자마자 <택시운전사>를 봤다. "장면 하나하나들이 생생하게 스쳐지나가서 잠을 잘 수 없었다"며 첫 관람평을 전했다. 그를 직접 만났다.

김사복에 대한 기억

영화 속 캐릭터지만 김사복(송강호 분)과 위르겐 힌츠페터는 모두 실존 인물이다. 서울에서 광주, 광주에서 김포의 여정을 함께 한 두 사람은 암흑에 가려진 진실을 캐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생전 위르겐 힌츠페터와 김사복에 대한 기억부터 이야길 풀어갔다.

- 이미 영화를 보셨다고 들었다. 잠도 못 이뤘다는데 어떤 장면들이 마음에 남았나.
"가장 슬펐던 건 영화가 끝난 뒤 남편의 마지막 인터뷰가 나올 때였다. 힌츠페터 씨가 머뭇머뭇하는 모습을 보이잖나. (취재진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당신이 겪었던 아픔, 남의 나라지만 그걸 너무도 생생히 겪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 힘들어 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감정이 힌츠페터 표정에 들어있었다. 영화 장면 중 꼽는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죽음, 특히 젊은이들이 머리에 총을 맞는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 고인은 평소 김사복 선생을 찾으려 노력했는데 결국 못 만났다. 많이 상심하셨는지, 또 김사복 선생에 대한 얘길 평소에 어떻게 하셨는지.
"김사복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기회가 돼서 그의 이름이 대화중에 나올 때가 있었다. 일 때문에 만났고 손님과 택시 기사로 만난 사이지만 그에 대해 표현하기를 '아주 낙천적인 친구'라고 했다. 단순히 목적지까지 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광주에서 젊은이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보면서 '네가 하려는 일을 도와줄게!'라고 말했다더라. 사명감을 가졌고, 동지라는 마음으로 자기를 잘 도와줬다고 들었다.

김사복이란 인물을 얘기할 땐 늘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살아는 있을지 궁금해 했다. 무엇보다도 김사복씨를 신뢰했다. 힌츠페터씨가 평소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중시했는데 그 택시운전사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도와준 거라고 그런 확신이 있었다.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 영화에선 각종 어려움을 겪으며 겨우 촬영한 필름을 갖고 광주를 빠져나온다. 실제는 어땠을까.
"그건 단순히 영화적 상상이고 실제로는 광주에서 서울로 오게 된 것에 대해선 거의 얘길 안 했다. 영화엔 자동차 추격전도 있고 차가 뒤집어지고 그러는데 상세한 얘긴 듣지 못했다. 다만 광주에 가기 전 외신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영자 신문이 있었는데 '외신기자는 자유롭게 한국을 나갈 수 있다'는 규정이 적혀 있었다. 힌츠페터는 만약을 대비에 그걸 오려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별 문제 없이 광주를 빠져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그 설명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5·18 취재 당시의 위르겐 힌츠페터와,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연기한 영화 <택시 운전사> 속 힌츠페터. ⓒ 위르겐 힌츠페터/쇼박스


광주에 대한 사랑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씨는 네 차례 광주를 방문했다. 남편과 5·18 추도식 때 함께 참석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숙연해지는 남편을 바라보며 남몰래 울기도 했다. 남편이 사망 직전 남긴 '죽으면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기억해 지난 2016년 5월경, 남편의 머리카락과 손톱, 유품을 보낸 바 있다. 고인의 유품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모셔졌다.

- 처음 영화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 또 이렇게 한국에 다시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영화를 만든다는 얘길 처음에 들었을 때부터 긍정적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특히 젊은이들이 얼마나 목숨 바쳐 투쟁했는지 알아야 하는데 지금 어린 세대는 학교 역사 시간에 배우는 정도지 않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건 실질적으로 느끼고 현실적으로 역사를 배우는 것과 같다. 교육적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독일과 한국은 분단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 북한은 예전의 동독처럼 언론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영화로 이런 얘길 남긴다는 건 이후 세대까지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뜻이기에 우린 좋아했다. 또 아까 들어보니 이 영화가 일주일 만에 600만 명을 넘었다더라. 이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다.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뜻이겠지."

- 고인께서 만약 이 영화를 봤다면 어떤 말을 하셨을까.
"나 저렇게 택시 충돌은 경험 안 했는데? 할 거 같다(웃음). 지난 과거에 대한 묘사, 특히 광주를 잘 담은 것 같다. 민주화 투쟁에 대한 열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의미를 높게 살 것 같다.

송강호 배우가 감정 연기를 너무 잘했다. 딸과 관계가 나오고 가족에 대한 설정이 있다. 상업영화니까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 남편을 연기한 토마스 크레취만도 훌륭했다. 굉장히 남편과 닮아 있더라. 그가 영화에서 표현한 대로 남편은 평소 정적인 사람이었다.

영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기쁘다. 난 남편의 경험을 듣고 상상하는 것에 그치지만 남편은 목격자니까 영화를 봤다면 그때의 긴장감과 아픔이 다 기억났을 거다. 그것 때문에 힘들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광주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는데 그건 항쟁 희생자에 대한 어떤 끈끈함 때문이다. 죽어서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열망으로 그런 유언과 같은 말을 남긴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 초반, 광주 잠입에 성공한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가 학생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 쇼박스


광주 정신 훼손? "어째서..."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씨와 위르겐 힌츠페터는 지난 2002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일종의 황혼 부부다. 본래 어릴 적 동창으로 서로의 존재만 알고 있다가 환자로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에 힌츠페터가 입원하면서 보다 친밀해졌다. 정식으로 데이트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인은 광주 이야기를 종종했다고 한다. 베트남 전 등 분쟁 지역을 두루 경험했지만 광주의 경험이 힌츠페터 삶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브람슈테트씨는 잘 알고 있었다.

- 당시 항쟁 현장에 대해 특별히 더 설명하고 남긴 말들이 있는지.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굉장히 많이 얘기했다. 그만큼 광주는 그의 기자 생활 중 가장 큰 사건이었다. 누굴 만나도 그 얘길 하더라. 여러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아까 말했듯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항쟁이라지만 독재자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믿기 어려웠지만 사실이었다.

- 연애 초반부터 그런 얘길 했다면 여성 입장에선 로맨틱하지 않을 텐데. 자연인으로서 고인은 어떤 사람이었나.
"굉장히 정직한 사람이고, 절대 남을 나쁘게 이해하지 않고 긍정적인 걸 부각시키려고 했다. 신념이 강했고, 그걸 이뤄내는 사람이었다. 회사 내에서도 상사들이 인정하더라.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맡기면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광주도 기자로서 확신이 있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외신보다) 일찍 간 거다. 어떤 지시가 내려온 게 아니라 스스로의 확신 때문이었다."

- 광주에 대한 첫 느낌이 어땠는지.
"광주 그 묘역을 같이 갔다. 희생된 분들이 잠들어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 슬펐다. 남편과 갈 때마다 헌화를 했는데 감정에 복받치는 그의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그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광주의 목격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도 광주에 오면 그 기분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 한편에선 이 민주화 항쟁과 그 정신을 폭동이라며 훼손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일부 사람이 있겠지만 힌츠페터 씨가 직접 보고 전하지 않았나. 그 눈에 보인 항쟁은 폭동이 아닌 광주 시민들의 심장으로부터 나온 울분이었다. 군대가 와서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그러니까 권력으로 짓누르려는 게 다 보였다. 시민들은 거기에 저항하다 죽었다. 이걸 어떻게 폭동이라 표현하는가! 힌츠페터씨가 목숨 걸고 촬영한 이유도 그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광주 시민들은 군사독재에 지쳤고, 속에 울분이 가득 차서 저항했다. 정말 양보해서 만약에 그들이 폭도였다면 부녀자들이 어떻게 그 현장에 나와서 기꺼이 시위대에게 밥과 음료를 주고 그랬겠나."

인터뷰 말미 최근 김사복 선생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분이 있다는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아직 확인된 바 없고 여러 자료를 검증하며 확인과정 중이지만 브람슈테트씨는 이 말에 눈시울이 젖었다. "(진짜 김사복의 아들이라면) 기꺼이 만나고 싶다"며 그는 "힌츠페터 씨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도 김사복 얘길 했는데 뭘 하고 있을지, 살아있을지 매우 궁금해했다"고 전했다.

"간절하게 궁금해 했다. 기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겠지만 단 며칠 동안 함께 했던 사람을 특별히 기억한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이 좋았다는 거다. 힘든 역사적 순간을 함께 보냈기에 오래 기억나는 거죠."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씨는 오는 16일 독일로 돌아간다. 남편의 생전 소망이었던 진짜 김사복씨, 혹은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인터뷰 내내 진한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 쇼박스



택시운전사 광주항쟁 위르겐 힌츠페터 푸른 눈의 목격자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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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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