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에서 최후의 만찬, 잔소리꾼 수녀가 떠났다

[김종술 금강에 산다] 성가소비녀회 최다니엘 수녀 138일 동행기

등록 2017.08.15 20:45수정 2017.08.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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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조라떼’ 페인트를 풀어 놓은 듯 녹색 강물을 와인 잔에 담았다. ⓒ 김종술


수녀와의 특별한 동행이 끝났다. 14일 성가소비녀회 최효미 다니엘 수녀(35)가 금강을 떠났다. 하늘은 울었다. 아침부터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내 눈은 붉어졌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4개월간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 4월, 한 통의 쪽지가 왔다. 악성글이면 어쩌나 걱정하며 쪽지를 열었는데, 예상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이렇다.

'한 달간 동행하고 싶다.'
 
어안이 벙벙했다. 늘 혼자 취재했던 터라 부담스러웠다. 혹시나 해코지라도 당할까 두려웠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끝내, 답장을 못했다. 다음날 전화가 걸려왔다.

"수도복 안 됩니다. 사복 입으세요. 강변에서 밥도 해먹고 잠도 자야합니다. 씻는 건 고사하고 화장실도 없어요. 뱀에 물릴 수도 있으니 자신 없으면 포기하는 게 좋습니다."

대차게 쏘아붙였다. 솔직히 내 딴에는 '오지 말라'는 거절의 뜻을 돌려 말한 거다. 하지만 수녀는 눈치(?)가 없었다. 겁박이 씨알도 안 먹혔다. 결국 수녀의 동행을 허락했다.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4대강 사업뿐 아니라 모든 아픔과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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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은 물고기를 쥐여줬다.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물고기를 바라보던 수녀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 김종술


수도복이 아니라 사복을 입고 수녀가 왔다. 며칠 뒤, 공주터미널 부근에 원룸도 얻었단다. 차곡차곡 특별한 동행을 준비하는 수녀를 보고 덜컥 겁이났다. 늘 혼자였는데, 이제부턴 누군가와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감시자가 생겼다는 찝찝한 기분도 들었다.


특별한 동행은 낯설고 어색했다. 옆에 누군가가 있으니 모든 게 불편했다. 밥 먹을 때 수저 하나 더 놓고, 잠잘 때 텐트 한 개 더 치면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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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녹조가 가득한 강물에 최다니엘 수녀가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들어갔다. ⓒ 김종술


수녀도 쉽지는 않았을 거다. 언젠가부터 하루 종일 물을 먹지 않았다. 화장실에 안 가려고 취한 특단의 조치였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시커먼 펄밭이 된 금강에서 허우적대며 악다구니를 쓰기도 했다. 짓궂은 요구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구더기가 들끓는 죽은 물고기를 맨 손으로 만지라고 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녹조강에 밀어넣기도 수차례였다. 그때마다 난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거봐요. 내가 포기하라고 했잖아요."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의 눈으로 강을 보고 새의 눈으로 강을 살피세요."
"동물들 놀라게 툭하면 소리부터 지르면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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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펄밭을 뒤지면서 실지렁이와 붉은 깔따구를 찾고 있는 최다니엘 수녀. ⓒ 김종술


수녀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짓궂은 요구를 묵묵히 해냈다. 구역질 나는 시커먼 펄을 헤집고 실지렁이와 붉은 깔따구를 찾아냈다. 처음엔 만지지도 못했다. 시나브로 단단해졌다. 하지만 진한 녹색빛 강에서 물고기 사체를 건져 올리면서 끝내 울음보가 터졌다. 이 모습을 찍어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쐈다. 인터넷에 뜨자 수많은 네티즌들의 응원 댓글이 달렸다.

슬픔의 눈물만 흘린 게 아니다. 고통에 쓴 눈물도 지었다. 강변에서 뜯은 민들레를 고추장에 버무려 한 끼를 해결했을 때다. 제대로 씻지 않는 민들레 밥을 먹은 수녀가 복통을 호소했다. 배를 움켜쥐고 식은땀까지 흘렸다. 현장 동행을 중단하고 병원에 가보라며 등떠밀어 집으로 보냈다. 나중에야 면구스러워 병원에 가지 못했다는 걸 알고 뒤돌아 숨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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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취재를 해온 지난 9년 늘 혼자였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수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 김종술


"기자님 저 3개월가량 (동행)연장하려는데 어떠세요?"

약속한 날을 앞두고 수녀가 물었다. 특별한 동행 한 달, 수녀와 함께해 든든했다. 모진 잔소리를 다 받아주고 곁에서 힘이 되어줬다. 솔직히 혼자서 금강을 기록하며 외로웠다. 속에선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입밖으론 쓴소리가 나왔다.  

"왜요? 더 볼 것도 없는데, 그냥 돌아가세요."(김종술)
"이제서야 하나 둘 죽은 물고기, 금강의 아픔이 보여요."(최효미 다니엘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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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지 한창이나 지난 물고기는 썩어서 흐느적거렸다. 죽은 물고기를 손에 든 수녀는 끝내 울음보를 터트렸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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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조라떼’ 페인트를 풀어 놓은 듯 녹색 강물을 와인 잔에 담았다. ⓒ 김종술


수녀는 사람들을 금강으로 데려왔다. 1년에 고작 2~3차례 4대강 사업에 망가진 현장을 찾아오던 사람들이 <오마이뉴스>에 나온 수녀와의 동행기를 읽고 자주 찾아왔다. 성가소비녀회 총장 수녀도 금강을 찾았다. 전국 곳곳에서 수녀들이 현장에 오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그때마다 수녀들은 금강을 위해 기도해줬다. 그래서일까? 여기저기 언론들의 취재가 늘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4대강 수문이 개방되기까지 했다. 기자에겐 축복이었다. 

"나 없어도 약 꼭 챙겨 드세요. 귀찮더라도 밥 꼭 챙겨 드시고요."

14일 오전, 수녀가 떠나며 한 말이다. 4개월간의 특별한 동행이 이날부로 끝이났다. 수녀와 참 많은 시간을 강에서 보냈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던 투명 카약을 금강에 띄웠다.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기자가 덜컥 드론을 산 것도 수녀를 믿었기 때문이다. 조작법을 배울 때 곁에서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 알려주고 가이드 역할을 해줬다. 평상시에는 허드렛일까지 나서서 해주며 도움을 줬다. 되돌아보니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더 많은 나날이었다.

그래서다. 떠나는 날 수녀에게 따뜻한 밥한끼를 해줬다. 금강에 차린 최후의 만찬이다.  3,800원짜리 피조개를 사서 아침부터 무치고 낙지도 한 마리 사서 갖은 재료를 넣고 볶았다. 밥에는 아끼던 검은콩과 옥수수도 넣었다. 수녀가 처음 온 날 그때와 마찬가지로 강변에서 밥을 먹었다. 누룽지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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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삽질에도 살아남은 금강의 마지막 하중도에 위안 삼아 가끔씩 들렸다. ⓒ 김종술


"수녀님들과 함께 또 올게요."

내겐 잔소리꾼이었던 수녀가 떠나며 한 말이다. 한편으론 홀가분한데 자꾸 눈물이 흐른다.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영원한 작별이 아니기에 '안녕'이라는 말도 안 했다.

다시 혼자가 됐다.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공주보로 향했다. 때마침 수문개방 방송이 하늘에 울려퍼졌다.

"지금부터 공주보 수문을 조작하여 개방할 예정입니다. 하류에 있는 행락객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대로 4대강 수문이 영원히 열렸으면 좋겠다.
#4대강 사업 #성가소비녀회 #최효미 다니엘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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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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