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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의지, 그는 코코넛 뗏목을 들고 절벽으로 향했다

[김유경의 영화만평] 인간 정신의 승리... "나는 살아있다"고 외친 영화 <빠삐용>

17.08.18 14:08최종업데이트17.08.1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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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연, 스티브 맥퀸 & 더스틴 호프만이 나온 포스터. ⓒ ㈜에이앤비 픽쳐스


영화 <빠삐용>은 앙리 샤리에르의 자서전을 원전으로 한 1973년 작품이다. 스티브 맥퀸(앙리 샤리에르 역)과 더스틴 호프만(루이 드가 역)이 주연이다. 빠삐용은 나비라는 뜻이므로, 영화는 나비 문신을 지녀 빠삐용이라 불리는 샤리에르(포주 살해 혐의, 종신형)를 중심으로 전개됨을 예고한다. 드가(국채 위조범, 종신형) 캐릭터를 활용해 빠삐용 캐릭터를 부각하는 연출이다.

나비는 날지 못하면 죽는다. 날갯짓은 본성이어서 주검일 때 멈춘다. 영화에서 날갯짓은 빠삐용의 탈옥 시도다. 빠삐용은 탈옥을 네 차례 꾀한다. 프랑스령 기아나 형무소에서의 탈주(실패), 독방 2년을 마치고 다시 탈주(실패), 2차 탈주 중에 머물게 된 콜롬비아 원주민촌의 안락함을 마다하고 길로 나섰다가 검문에 걸림(실패), 악마섬에서의 탈주(성공) 등이다.

호된 징벌을 몇 번이든 감내하면서 재차 탈옥을 꿈꾸는 빠삐용의 갈망은 무엇인가. 비인간적 폭압이 상존하는 감옥 시설을 벗어나 보겠다는 차원의 단순한 욕망은 아니다. 그랬다면 벌레까지 먹어야 하는 지하 독방 생활 중에 코코넛 제공자 드가를 발설하지 않으려 "유혹을 견디는 것이 인격의 참다운 척도"라는 말을 곱씹으며 굳이 메모지를 삼키지는 않았으리라.

유죄 판결, "인생을 낭비한 죄" ⓒ ㈜에이앤비 픽쳐스


또 있다. 독방에 갇힌 빠삐용이 몽환 중에 "인생을 낭비한 죄"를 인정하는 반성의 사고다. 그것은 빠삐용이 추구하는 탈옥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 변화와 내통함을 넌지시 짚어 준다. 악마의 섬에서 벗어나자 코코넛 뗏목에 떠가며 "야, 이놈들아, 난 여전히 살아 있다."고 세상에 천명하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 너머를 응시한 자가 취할 수 있는 감격이다.

"난 여전히 살아 있다"는 외침에는 수감 생활 내내 인간 정신을 유지한 극기가 내재한다. 그것은 죄수를 국가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감옥 체제의 야만적 공권력에 시달렸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음을 강조한 "여전히"로써 가늠할 수 있다.

드가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보며 ⓒ ㈜에이앤비 픽쳐스


반면에, 지리적 특성으로 간수가 필요 없는 감옥인 악마의 섬에서 재회한 드가는 가시적 억압이 사라진 방임된 일상에 안주한다. 이빨이 빠지고 다리를 저는 형편없는 몰골로 다시 탈옥을 꿈꾸며 벼랑 끝에서 끈기 있게 조류를 살피는 빠삐용의 불굴성과 대비되는 선택이다.

코코넛 뗏목에 의지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빠삐용에게 드가는 빠삐용이 죽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빠삐용의 관점에서 보면, 드가의 섬 생활은 체제의 의도에 길들여진 인간 정신의 죽음이다. 인간 정신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소통하는 시간을 살며 지금보다 나은 발전적 변화를 꾀할 때 지속할 수 있다. 생리적 차원 너머를 응시하며 생명 활동을 계속할 때 인간의 삶으로 편입되므로 그렇다.

탈옥을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빠삐용 ⓒ ㈜에이앤비 픽쳐스


그렇게 볼 때, 죽음의 위기를 삶의 기회로 바꾼 빠삐용의 탈옥은 인간 정신의 승리다. 그게 영화 <빠삐용>이 띄우는 자유의 의미다. 영화는 자유를 쟁취하는 빠삐용의 탈옥에서 끝난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편에서 보면, 탈옥 못지않게 중요한 게 남아 있다. 인간 정신이 현실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가 하는, 그래서 더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삶의 질을 개선하는 일이다.

지금 여기 사회에는 형식상의 탈옥이 아니라 실제로 탈옥을 육화해 귀감이 되는 인물들이 있다. 출옥 후에 고문 등의 수감 후유증을 극기하며 인간 정신을 벼리는 삶을 살다가 마친 고 김근태 의원과 리영희 교수, 그리고 신영복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벼랑 끝에 앉아 조류를 살피는 빠삐용 ⓒ ㈜에이앤비 픽쳐스


물론 수감 중이거나 수감과 진배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상황이 나아지도록 부단히 애쓰는 인간 정신들 또한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평균 연령이 90.5세인 위안부 할머니들, 한상진 민노총 위원장을 위시한 양심수들, 파업 손배소의 덫에 걸린 노동자들, 미수습자 인양을 학수고대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생리적 활동조차 힘겨운 가습기 피해자들 등등 최근 기사들만 훑어도 그 정도다.

<빠삐용>에서 상호 보완 관계로 시작된 개털 빠삐용과 범털 드가의 우정은, 삶의 태도에 따라 운명이 갈리면서 끊긴다. 넓은 의미에서 우정이나 사랑은 '더불어 삶'의 태도를 유지할 때 지속할 수 있다. <빠삐용>은 "난 여전히 살아 있다"는 울림을 통해 공명을 일구는 명화다. 순간순간 내가 구하는 자유가 무엇을 향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빠삐용 더스틴 호프만 스티브 맥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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