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둥산은 왜 맹동산과 명동산이 됐을까

[낙동정맥 종주와 함께 삶의 즐거운 변화를 꾀하다 19]

등록 2017.08.22 11:38수정 2017.08.2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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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 버스가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 영양군 석보면 양구리에 도착합니다. 옛날에는 너른 풀밭에서 양을 많이 길렀다고 하여 양구리입니다. 양구리에서 완만한 시멘트 포장길을 걸어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 고갯길 이름은 '울치'입니다. '울다' 할 때의 '울'에 고개를 뜻하는 '치'를 붙여서 '울치'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울치'는 '울면서 넘는 고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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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마루금이 소 방목장을 지나갑니다.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납니다. ⓒ 배석근


고개 이름에 어떤 사연이 들어 있을까요. 고개 너머 동쪽에 있는 영해는 지금은 영덕군에 속한 하나의 면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조까지만 해도 영해부('부'는 지금의 '시'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였을 만큼 큰 지역이었습니다. 영양은 영해부에 속한 작은 현이었습니다.

서러운 '을'이 울며 넘던 고개 '울치'

그런데 영해부 관리들의 횡포와 수탈이 아주 심했었나 봅니다. 영양현에 대한 멸시와 천대도 참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상급 기관 영해부가 하급 기관 영양현에 대해 심한 '갑질'을 했던 것입니다.

영양에서 거둔 세곡을 등짐을 지거나 달구지에 싣고 험한 고갯길을 넘어 멀리 바닷가 영해부까지 싣고 갈 때 영양 사람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목숨과도 같은 곡식을 빼앗기는 억울함,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고통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양에서 영해로 넘어가는 이 고개를 울면서 넘는 고개란 뜻에서 '울치'라고 불렀습니다. 선인들의 신산한 삶의 모습이 고개 이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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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영양현과 영해부를 이어 주던 고개 울치입니다. 영해부 관리들의 수탈과 괄시로 고통 받던 영양현 사람들이 울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울치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 배석근


*낙동정맥 19구간 종주
날짜 / 2017년 8월 12일 (토)
위치 / 경상북도 영양군, 영덕군
날씨 / 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었고 그중에는 먹구름도 있어 후두두 빗방울을 떨구기도 했습니다. 기온은 25~29도였고, 바람이 좀 불어 주었습니다.
산행 거리 / 18.6㎞
소요 시간 / 6시간 20분
산행 코스(남진) / 양구리 → 울치 → 풍력발전소 → 맹동산 → 봉화산 → 봉수대 → 명동산 포도산 → 삼의리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양구리에서 울치 고갯길을 1km쯤 걸어 올라가 고개 정상에 이릅니다. 여기서부터 낙동정맥 종주가 시작됩니다. 산행을 시작하고 나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니 당집이 나타납니다. 지난 구간에서도 당집을 하나 만났는데, 오늘 만난 당집은 좀 더 크고 담장까지 두르고 있습니다.

당집 안이 궁금한 저는 가까이 다가가 문을 열어 봅니다. 삐걱~ 문이 열리고 컴컴한 당집 내부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 술잔과 촛대가 놓여 있습니다. 제단 밑에는 제를 지낼 때 썼던 향로와 그릇들이 한쪽에 있습니다. 제단 위 벽에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크게 남녀 두 사람을 그려 넣고 그 옆에 한 사람씩을 작게 그려 넣었습니다. 크게 그린 인물상 남녀는 아마도 부부가 아닐까 싶은데 풍채가 좋고 고귀한 자태가 느껴집니다. 인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고 그 관계를 풀어 가는 이야기가 있을 듯하지만 더는 알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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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치 고갯마루에서 낙동정맥 마루금에 접속한 뒤 산등성이 하나를 넘자 당집이 나타납니다. 당집치고는 제법 큰 편이고 담장까지 둘렀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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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집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봅니다. 제단 아래 위에 여러 가지 제구들이 놓여 있고, 제단 위 벽에는 인물을 그린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그림 속에 이야기 하나쯤은 들어 있을 것 같습니다. ⓒ 배석근


당집 안 초상화 주인공은?

뭔가 시커먼 게 툭 튀어 올라 흠칫 놀랍니다.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 오르는 놈은 귀뚜라미입니다. 잘 먹었는지 몸집이 통통하고 뛰는 높이와 거리도 상당합니다. 이리저리 튀다가 나한테도 달라붙을까 봐 얼른 문을 닫고 다시 산길을 걸어갑니다.

어제 이곳 영양에는 비가 100mm나 내려 산과 들을 흠뻑 적셨습니다. 비가 내린 여름날이면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며 피어나는 놈들이 버섯입니다. 오랜 가뭄 속에 숨을 죽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버섯 포자가 비를 만나면서 요란스럽게 부풀어 오르며 여기저기서 솟아납니다.

버섯은 모양도 가지가지여서 버섯 전시회를 보는 느낌입니다. 갓을 쓰고 있는 놈은 아주 흔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놈도 있습니다. 나무에 조개껍데기처럼 붙어 있는가 하면 털실처럼 척척 늘어지는 놈, 초콜릿을 씌운 '초코송이' 과자처럼 생긴 놈도 있습니다. 색깔은 또 어떤가요. 노란 놈, 허연 놈, 붉은빛을 띤 놈, 거무튀튀한 놈…. 게다가 크기도 제각각이어서 콩알처럼 작은놈에서부터 세숫대야만큼 큰놈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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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위에 민달팽이가 올라가 있습니다. 달팽이가 먹는 버섯은 대개 사람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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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은 모양도, 빛깔도, 크기도 참 제각각입니다. 요놈은 '초코송이' 과자를 닮았지만 먹으면 안 되는 독버섯입니다. ⓒ 배석근


어떤 버섯에는 민달팽이가 올라가 있기도 합니다. 얼핏 들은 얘기로는 달팽이가 먹는 버섯은 사람도 먹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워낙 독버섯이 많으니 버섯은 그저 구경하는 것으로만 만족합니다. 한 놈 한 놈 눈길을 주면서 가니 산길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비 온 뒤에 펼쳐지는 버섯 잔치

낙동정맥 산길은 풍력발전단지로 들어섭니다. 풍력발전기가 빽빽하게 들어선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풍력발전단지라고 합니다.

윙윙~. 풍력발전기 바로 아래서 듣는 날개 회전 소리는 엄청나게 위력적이어서 몸을 짓누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람의 세기나 각도, 거리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소리가 들리지만 대체로 기분이 나쁜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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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풍력발전단지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발전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지만 주민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 배석근


친환경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세우는 풍력발전단지가 요즘은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발전기를 세우기 위해 산을 깎아야 하니 환경이 훼손되어 동식물의 터전을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산사태의 위험도 따르게 됩니다. 풍력발전기에서 나는 여러 가지 소음도 주민들을 괴롭히는 공해가 된다고 합니다.

쉬운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풍력발전이 친환경적이어서 이상적인 발전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에서는 여러가지 우려 지점도 있는 듯합니다.

민 반발에 부딪힌 풍력발전

어쨌든 동해에서 불어와 낙동정맥을 넘어가는 이곳 바람이 시원하기는 합니다. 저 위에서 발전기를 돌리고 남은 자투리 바람을 저도 좀 맞으면서 땀을 식혀 봅니다.

풍력발전단지 중간쯤에서 맹동산(762m)을 만납니다. 작긴 하지만 모처럼 정상석이 있습니다. 오늘 산길은 풍력발전단지 사이로 난 도로가 상당 구간을 차지하고 오르내림도 그리 심하지 않아 편안하게 한 구간을 해치우는 느낌입니다. 다만 맑은 물에 먹물을 한 바가지 부은 듯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 언제 비가 내릴지 조마조마하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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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랭지 배추밭을 지나갑니다. 어린 배추는 가으내 무럭무럭 자라나 김장철에 우리 앞에 나타날 겁니다. ⓒ 배석근


맹동산을 지나고 봉화산 팻말이 달린 봉우리를 지나자 실제로 봉수대가 나타납니다. 저건 아니다 싶을 만큼 고증 없이 실망스럽게 복원해 놓은 봉수대가 아니라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는 봉수대입니다. 처음에는 정교하게 돌을 맞추어 쌓았을 봉수대는 오랜 세월이 지나며 비바람을 이기지 못해 돌덩이가 들쭉날쭉 엉성한 모습이지만 원형이 잘 남아 있어 오히려 정감이 갑니다. 봉수대 위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불을 피워 연기나 불빛으로 위급한 상황을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전달하며 한양까지 닿게 하는 시스템이 봉수입니다. 우리가 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한 지점인 부산 다대포에서 한양까지 12시간 만에 신호가 전달되도록 설계됐다고 합니다.

산행하면서 봉수대를 만나면 선인들 삶의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고 긴박한 상황에 대처하는 그들의 거친 호흡이 느껴져 역사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단점이 많은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정보 전달이 쌍방향이 아니라 국경에서 한양으로 일방적입니다. 정보 내용도 단순합니다. 적이 나타났다, 싸우고 있다, 그 정도이지 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어떻게 막아 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는 날은 무용지물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쓸모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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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원형이 잘 남아 있는 봉수대를 만났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 비바람에 돌덩이는 들쭉날쭉 엉성하지만 선인들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져 더욱 정감이 갑니다. ⓒ 배석근


봉수 대신 역참을 발전시켰더라면...

몽골제국이 중국을 정벌한 뒤 이슬람제국을 쳐부수고 동유럽까지 전선을 확대시킬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엄청나게 빠른 통신수단인 역참제도가 있었습니다. 30km마다 역참을 설치하여 말을 갈아타면서 달리면 하루에 352km까지도 갔다고 하니 부산 다대포에서 한양 정도 거리는 하루 반이면 충분한 속도였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치밀한 전략을 세웠더라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을 당하더라도 좀 더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조선조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그리 약한 나라가 아니었는데, 왜 파발마를 이용하는 역참제도를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입니다.

봉수대를 지나 산줄기를 따라 한 시간쯤 남쪽으로 내려오니 명동산(812m)이 나타납니다. 아까 만난 산은 맹동산, 이번에는 명동산. 서로 가까운 곳에 있고 이름도 비슷하고 높이도 비슷하고… 뭔가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 맹동산과 명동산은 둘 다 '민둥산'이 변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풍력발전단지가 설 만큼 바람이 많은 지역에 더욱이 봉우리로 솟아 있으니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큰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고 풀이나 작은 나무만 있을 뿐이어서 민둥산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민둥산이 좀 더 발음하기 쉽게 맨둥산이 됐다가, 다시 맹동산이나 명동산으로 변했는데 한자어로 바뀌면서 그리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져 있고 서로 멀지 않은 두 개의 봉우리가 하나는 맹동산, 다른 하나는 명동산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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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꽃 잔대를 만났습니다. 잔대는 금강초롱과 가까운 친척이지만 빛깔이나 생김새가 금강초롱에 비해 수수한 편입니다. ⓒ 배석근


맹동산과 명동산, 그 뿌리는 민둥산

이 과정에서 아마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 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면서 이 봉우리가 맹동산이다, 아니다 저 봉우리가 맹동산이다,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툼을 벌이다가 그러면 하나는 맹동산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명동산으로 하자, 이렇게 의견을 모으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이곳 지방 사람들 발음으로는 똑같이 '맹동산'이니까요.

낙동정맥을 종주하며 오늘도 제 삶을 바꿔 갈 결심 한 가지를 합니다. 오늘 결심은 아내와 가사를 분담하는 의미에서 저녁 설거지를 내가 하자는 것입니다. 가족이 집에서 식사하는 저녁에는 설거짓거리가 수북이 쌓입니다. 어린이집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아내는 거기서도 설거지를 할 텐데 집에 와서 저녁을 준비하고 또 설거지까지 해야 한다는 게 무척 재미없고 짜증 나고 지겹기까지 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설거지만이라도 제가 맡아서 한다면 아내의 저녁 시간에 조금은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사실은 빨래 널고 개기, 재활용 배출, 화장실 청소 등 가사에서 이미 상당 부분의 제 몫이 있고, 오늘 한 가지를 더 추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수고를 더하고, 아내가 수고를 조금 덜면서 딱 그만큼의 빈 곳을 아내가 행복으로 채울 수 있다면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심 19 / 가사를 아내와 나눠서 한다는 생각에서 이제 저녁 설거지는 내가 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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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리는 흔하게 보는 꽃이지만 마타리가 피어나면 숲이 환해지고, 보는 이 마음까지도 환하게 밝아집니다. ⓒ 배석근


마지막 봉우리 포도산을 지난 뒤 삼의리를 향해 가파른 길을 내려갑니다. 서두르면 무릎이 상하고, 그러다 넘어지면 크게 다칠지 모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지난 몇 구간 산행에서는 겨우 꼴찌를 면했는데, 오늘은 꼴찌입니다. 그래도 버스 출발 시각을 20분쯤 남기고 들어왔으니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갈 길을 저의 두 발로 무사히 걸었다는 것, 그 자체가 가슴 터질 듯한 행복입니다.
#낙동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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