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형식적인 재난 대피 훈련, 굳이 해야 하나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112] 아이들에게 '재난'은 멀고, '입시'는 가깝다.

등록 2017.08.25 10:23수정 2017.08.2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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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공 대피훈련을 한 23일, 대전 둔원초등학교 학생들이 공습 경보소리가 울리자 책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신속하게 지하 강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3일 오후 2시 정각,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국에 공습경보가 발령됐다. 아침 조회 시간에 이미 아이들에게 비상 대피 훈련을 한다고 공지된 터다. 매뉴얼대로라면, 진행 중이었던 5교시 수업을 잠시 멈추고, 학급별로 질서 정연하게 운동장 스탠드로 뛰어나가 대기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동작은 굼뜨기가 이를 데 없다. 수업을 하지 않아 좋긴 한데,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 에어컨 돌아가는 시원한 교실을 떠나 밖으로 나가려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거다. 창밖을 힐끔 내다보며 다른 반 아이들이 나가는 걸 보고 뒤따라가자며 그새 요령을 피운다.

아침까지만 해도 가랑비가 내려 선선하더니만, 낮엔 습기까지 잔뜩 머금은 찜통더위가 이어졌다. 콘크리트 스탠드마저 달궈져 앉는 건 고사하고 서 있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공습경보가 해제되는 20분 동안,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아이들도 있고,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공책을 챙겨 나와 숙제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정작 공습경보에 경각심을 갖는 아이는 거의 없다. 시사적인 일에 별 관심이 없다보니, 담임교사가 미리 훈련의 목적 등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왜 밖으로 나가야하는지조차 모를 아이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뻔히 안내방송을 듣고도 이번에도 지진 대비 훈련이냐며 묻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형식적으로 시늉만 하는 훈련인데, 수업시간까지 빼서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한 아이의 질문에 순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사이렌을 들으며 자랐다고 할 정도로 숱한 민방공 훈련을 받았지만, 매번 형식적이었다는 기억밖에 없어서다. 지금과 다른 게 있다면, 그땐 이따금 콘크리트로 된 지하 벙커 같은 곳에 몸을 숨겼다는 것 정도다.

지금의 아이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들 역시 훈련이라 해봐야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나 운동장으로 나가 시간만 때우다 들어오는 것 외에는 해본 게 없다며 키득거렸다. '운동장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인식 말고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고 이구동성 말했다.


"어차피 시늉만 하는 훈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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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공 대피훈련을 한 23일, 대전 둔원초등학교 학생들이 공습 경보가 울리자 지하 강당으로 대피해 안내 방송에 따라 책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낮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이들은 '실제 상황'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고 했다. 사실 담임교사인 나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아이들의 '일리 있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능력도 없다. 당장 한 아이는 적의 공습이 시작되면, 운동장보다 건물 안이 더 안전할 것이라면서 다짜고짜 밖으로 나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따지듯 묻기도 했다.

얼추 20년 가까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지만, 학교마다 다양한 실제 재난 상황을 가정한 매뉴얼이 갖춰져 있는지도 의문이다. 고백하건대, 양떼 몰듯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서둘러 나가게 한 것 말고는 다른 행동을 취해본 적인 단 한 번도 없다. 이번처럼 공습경보가 울리든, 지진이나 화재가 발생하든 매번 똑같았다.

"이곳으로 미사일이 날아오는 상황까지 갈 것도 없어요. 당장 지금 학교 건물에 지진이나 화재가 난다고 해도 우리들 중 살아남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걸요."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다'며 코웃음 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그도 여태껏 재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수업시간에 배운 기억이 없다면서, 전국에 사이렌을 울려대며 호들갑떨 게 아니라 교육과정에 넣어야 한다며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나아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면 직방이라고 덧붙였다.

'돈보다 생명과 안전'이라는 세월호 참사의 교훈을 맨 먼저 깨닫고 실천해야할 곳이 학교일 텐데도, 안전에 관한 한 가장 더디 변하는 것 같다. 참사 직후 교무실에 '안전교육부'와 같은 부서가 생겨날 만큼 안전에 대한 관심이 비등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실제 상황'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교육은 이론 위주였고, 훈련은 늘 형식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국가적인 재난 훈련이라도 공부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인식이 뿌리 깊다. 누구 말마따나, 아이들에게 '재난'은 멀고 '입시'는 가깝다. 듣자니까, 전국적으로 동시 실시된 이번 훈련에 입시를 앞둔 고3들까지 참여시킨 고등학교는 거의 없다고 하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심지어 일부 학교에서는 대피 훈련은커녕 안내방송조차 틀지 않았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할 바에야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겨선지 몰라도, 아이들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느낄 기회조차 박탈당한 셈이다. 수능 듣기평가 때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도 멈추게 하는 나라에서, 애초 '안전' 따위는 '입시'에 상대가 되지 못한다.

재난, 제대로 대비하려면

결국 아이들은 시나브로 '똑똑한 바보'가 돼버렸다. 그 어렵다는 미적분 문제는 술술 풀어내도, 정작 재난에 맞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내는 기초적인 생존법은 알지 못한다. 적의 공습이든, 지진이든, 실제 재난이 닥치면 그들의 삶은 바람 앞에 촛불일 수밖에 없다.

공습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20분 동안 운동장에서 그들과 나눈 대화가 이를 증명한다. 지진이 나면 아이들은 너나없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는 것만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왜 그래야 하는지의 이유와,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길이 없고, 그저 귀찮은 일이 되고 만다.

물론, 몇몇 아이들은 질문에 똑 부러지게 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실제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런 지식조차 별무소용일 듯싶다. 적어도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생활하는 학교에서는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개인별로 대피 요령을 익히도록 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체가 동시에 대처하는 구체적인 매뉴얼이 절실하다. 예컨대, 학년별, 학급별로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동선이 정해져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대피 순서까지도 마련되어야 한다. 대피할 곳에는 교실에서처럼 학년, 반 등이 표시되어 있고, 시시각각 상황을 전하는 연락망 등도 필요하다.

실제 상황에 대비하여, 학급 내에서는 교실 앞뒤 문을 즉각 개방하는 학생과, 각종 기자재의 전기 플러그를 뽑는 학생 등도 구체적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하다못해 교실마다 구비되어 있는 소화기 당번도 정해서 동선과 정확한 사용법 등을 숙지시킬 필요가 있다. 모든 교실에 소화기만 비치되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안전이 담보되지는 않는다.

"요즘 아파트의 집집마다 비상용 완강기가 마련돼 있는데, 훈련 한 번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요. 분명 있긴 할 텐데, 가정용 소화기도 어디에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고요. 그러고 보면, 시설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재난에 대한 인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안전 불감증'에 대한 한 아이의 고백은 기성세대를 향해 잔뜩 날이 서 있다. 정부는 전가의 보도처럼 부족한 시민의식만 나무랄 게 아니라, 아이들이 그렇듯 '무뎌진' 채로 어른이 되기 전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듯싶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을진대, 진짜 '적폐'란 이런 게 아닐는지.
#재난 대피 훈련 #안전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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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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