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은 빠진, 오로지 승리자의 역사

[서평] <대한민국 이야기>를 중심으로 본 뉴라이트 역사관

등록 2017.10.10 11:17수정 2017.10.1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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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끝에 사퇴한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는 뉴라이트 역사관이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적폐로 꼽히는 국정 역사교과서 속 뉴라이트 역사관이 박근혜 정부를 촛불항쟁으로 몰아내고 들어선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뉴라이트라는 집단은 몰락한 상태다. 홍진표 시대정신(구 뉴라이트재단) 상임이사가 지난해 '새로운 뉴라이트는 가능한가?'란 글에서 "뉴라이트를 내걸고 여전히 활동 중인 단체는 사실상 없었다. 이 정도라면 뉴라이트 운동은 침체나 잠복 수준이 아니라 사라져 버렸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생활보수'를 자처한 박성진 후보자는 뉴라이트 운동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역사관이 한국사회 곳곳에서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런 의미에서 뉴라이트 운동이 몰락한 오늘날에도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피는 일은 여전히 의미 있다. 이 글은 뉴라이트 역사관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이영훈 서울대학교 교수가 쓴 <대한민국 이야기>를 중심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핀다.

개별 인간을 중심에 둔 '문명사' 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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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 기파랑

'일본 식민통치가 근대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대중에게 안겨준 충격이 워낙 커서 '뉴라이트 역사관' 하면 식민지근대화론을 주로 떠올린다. 하지만 뉴라이트 역사관은 일제 식민통치 시기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포괄하고 있다.

이영훈은 <대한민국 이야기>에 대해 "이 책은 탈민족과 문명사의 관점에서 지난 20세기의 한국사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것"(21쪽)이라며 문명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민족은 20세기의 한국사를 조명하는 중요한 시각이긴 합니다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체적인 역사의 단위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개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이고 도덕적 이기심이고 협동능력입니다. 그러한 본성의 인간들이 상호 경쟁하면서 또 상호 협동하면서 건설해 가는 생산과 시장과 신뢰와 법치와 국가의 역사가 진정한 역사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문명사라고 자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이야기> 20~21쪽


이영훈이 바라본 20세기 한국사는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이다. 그는 서유럽에 기원을 둔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가 들어와 전통문명과 상호작용하면서 나름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 전통 문명과 외래 문명이 충돌하고 접합하는 과정이 곧 20세기 한국사라고 덧붙인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이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다. 이영훈에 따르면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영구병합하기 위해 조선 사회와 경제를 일본과 동화하려 했고, 이를 위해 수탈을 자행해 민심을 잃기보다는 일본의 법과 제도와 문화를 일본에 이식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근대적 경제 성장이 일어났다. 저자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실린 김낙년 동국대학교 교수와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의 연구를 인용해 1910~1940년 조선 경제는 연평균 3.7% 성장했고, 1912년~1939년 사이 조선인 평균 소득도 증대했다고 주장한다.

이영훈은 이 대목에서 '기존의 식민지수탈론 주장대로라면 경제는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점점 쭈그러들어야 하지만, 재화와 소득의 흐름은 연간 3.7% 속도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식민지 수탈론은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고 강조하고 있다.

근대적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사유재산제도 확립이었다. 일제는 1912년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자유의 원칙'에 입각한 조선민사령을 공포했는데 이는 오늘날 한국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는 재산제도를 정비한 다음 조선과 일본을 단일 시장으로 통합하고, 수많은 공장을 세우는 등 조선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일제가 남긴 인적 자본도 근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영훈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하급직 관리, 은행원, 회사원, 의사, 법률가 등으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쌓은 테크노크라트형 인물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떠받친 세력"(177쪽)이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점포와 공장, 회사를 운영한 상인과 기업가들이 중요한 인적 자본이었다. 이영훈은 "국제적으로 큰 시장에서 훈련받은 기업가 능력이 다소나마 축적되어 있었기에 신생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겁니다"(179쪽)라고 강조한다.

대량 토지 수탈은 없어... 쌀도 '수탈' 아닌 '수출'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영훈은 식민지수탈론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지를 대거 국유지로 수탈했다는 주장에 대해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 당시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 심사에 공정했고, 분쟁을 거쳐 남은 국유지는 총 484만 정보 가운데 12.7만 정보에 불과했다'고 반박한다.

쌀도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수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쌀값이 30% 정도 높았기 때문에 농민과 지주는 쌀 수출을 통해 더 많은 소득을 얻었고, 수출 소득으로 공산품을 수입하거나 아예 기계, 원료를 수입해 방직공장을 차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수출을 통해 전체 경제가 성장했다는 주장이다.

이영훈은 모자라는 식량은 만주에서 조나 콩 등을 사 와서 충당했기 때문에 식량 섭취도 반드시 줄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다만, 일제 식민통치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해서 일제 식민통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영훈은 "진정한 의미의 수탈과 차별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94쪽)이라며 '인간의 본성은 자유다.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성립은 문명사의 대전환 결실"

이영훈은 해방 이후 현대사도 예의 문명사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가 바라본 현대사는 어두운 면도 있지만, 대체로 자랑스러운 역사다.

이영훈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세워졌고, 개인의 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성립은 문명사의 대전환으로 맺어진 결실"(231쪽)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관련해 소련 붕괴 이후 나온 비밀문서에 기초해 김일성과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이 사회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그들의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전쟁입니다"(283쪽)라고 옹호하고 있다.

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언급하긴 하지만, 무게중심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소련 비판에 놓여있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의 현대사를 살펴본 이영훈은 다음과 같이 20세기 한국사를 요약한다.

"필부필부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로 역사의 기초를 바꾸어 놓으면 지난 20세기는 한반도에서 국가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심각한 변화와 발전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해졌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해졌습니다." - <대한민국 이야기> 318쪽

군함도, 10분 만에 등뼈 굽는 중노동에 시달려

이영훈의 책은 동의할 만한 대목도 더러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이영훈 자신이 '개인'이 역사의 실체적인 단위이고, "인간 생명의 본질은 자유"(81쪽)라고 하면서도 정작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개인'들의 시각, 그들이 겪었던 '자유'의 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그의 스승이자 역시 식민지근대화론자인 안병직 서울대학교 교수와의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두 사람은 강제동원된 식민지 조선인들이 임금을 받았는지, 강제동원 규모가 얼마였는지에 대해서는 각각 1쪽이 넘게 다루면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8줄 정도만 할애하고 있다.

내용도 '농촌에서 목가적으로 살던 농민은 훈련 없이 탄광이나 토건업 등의 험한 일에 동원했다', '단체생활에 필요한 규율도 없어서 가혹한 노무관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시기라 식사가 충분하지 못했다' 등으로 피상적이다.(<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208~218쪽)

단순히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힘들고 위험한 일을 식민지 조선인들이 맡았고, 전시라서 식사가 부족하기도 했겠지만 민족차별 속에서 필요한 물자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언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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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함도>는 일제 식민통치 당시 강제징용 문제를 다루고 있다. ⓒ CJ엔터테인먼트


노기 카오리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일명 군함도로 불렸던 하시마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일본인 갱부들은 천장이 높아 채탄하기 쉽고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일한 반면 조선인은 주로 가장 위험하고 고된 막장으로 들어갔다. 높이가 50~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비좁은 막장에서 곡괭이를 들고 계속 누운 채로 탄을 캐야 했다. 10분도 안 돼 하반신이 저려오고 등뼈가 점점 변형될 만큼 고된 중노동이었다.

…(중략)…갱 안에는 가스 냄새도 심했다. 숨쉬기 힘들었고 산소 부족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또 하시마의 탄은 꼭 밀가루처럼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흩날리는 탄가루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질병에 노출되었다. 게다가 갱 안의 온도는 마치 열대처럼 뜨거웠다. 쌀부대 같은 옷이 지급되었지만 갱에서는 어떤 것도 입지 못할 만큼 무더웠다.

물통을 챙겨갔으나 항상 목이 말라 금방 바닥이 났다. 일본인 갱부가 "조센진은 갱 내에 흐르는 물이나 마셔라"라고 막말을 내뱉으면서 물통을 훔쳐가기도 했다. 그러나 갱 안 사방에 흐르는 지하수는 갱부들의 배설물로 언제나 오염되어 있었다. 갱 안에는 화장실이 없어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56~58쪽

이토록 가혹한 환경에서 일했던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몇 명이 강제동원당했는지가 그리 중요한 문제였을까. 하물며 민족차별에 대한 설명 없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피상적으로만 다루는 역사서술이 정말 강제동원당한 식민지 조선인 개인을 중심에 둔 서술일까. 거듭 생각해봐도 이영훈의 역사서술이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는 역사 서술인 것 같지는 않다.

한국전쟁 학살 희생자 시각은 없어

해방 이후 현대사를 다룬 부분에서도 '개인'들의 고통, 그들이 경험한 '자유'의 침해가 잘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국군은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중에 우익 청년단에게 끌려가 학살당한 문일상씨의 딸 문강자씨는 아버지가 사라진 후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할머니가 항상 밥을 이렇게 담아서 아랫목에다 이불에 덮어놓고 그랬습니다. 언제라도 아버지가 오면 배고프기 전에 밥 먹인다고요. 십 년을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4.19가 일어날 때까지요. 할머니가 밥을 담아서 아랫목에다가 두고, 할머니는 밥을 안 잡숫는 겁니다. 내 아들 밥그릇이 여기 있는데 내가 혼자 못 먹는다면서요."-<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94~95쪽

"우리 할머니, 엄마는 구경 한번 안 하고 사셨어요. 평생 바깥나들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지요. 마음이 항상 무겁고, 사람 보는 거를 못한다, 하늘을 못 본다 하는 거라요. 할머니가 그래요. 하늘을 내가 어째 봐⋯" -<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98쪽

학살 피해자인 문일상씨를 비롯해 평생 하늘을 못 보고 살았다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바라본 한국전쟁이 과연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전쟁"일까.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으니 한국 국군, 경찰이 저지른 학살은 사소한 일인가.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전쟁을 전후해 국군, 경찰, 우익 세력이 저지른 학살 규모가 인민군 혹은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학살의 진상이 모두 규명되지 않았으며 피해자인 유족들이 오랫동안 '빨갱이'로 몰려 탄압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국전쟁은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전쟁"이라는 이영훈의 주장은 공허하다.

패배자는 '개인'에서 배제한 역사

나는 '민족'을 역사의 단위로 보던 관행에서 벗어나 '개인'을 역사의 단위로 보자는 이영훈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기존 식민지수탈론이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이후 경제와의 부정적 연속성만을 강조하는 문제가 있었고, 뉴라이트가 '민족'을 너무나 당연하게 역사의 단위로 생각해온 역사학계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온 것도 사실이다.

강제동원을 다룬 부분에서는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배제하려다 보니 식민지 조선인이 받았던 민족차별을 간과하면서 오히려 강제동원당한 '개인'의 시각으로 보지 못한 문제도 있었지만, 이는 '개인'을 역사의 단위로 보는 관점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문제는 '민족'에 문제를 제기하며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가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개인'과 그들이 겪었던 '자유'의 침해를 중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이영훈 교수의 역사 서술에는 "필부필부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고통,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은 학살 피해자들의 눈물은 역사에서 정당한 위치를 배정받지 못한다. 그들의 고난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성립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하고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희생된 개인을 배제하거나 주변에 형식적으로만 배치함으로써 이영훈 교수가 만들어 낸 역사는 오로지 승리자의 역사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살아남아 해방 후 건국을 주도한 우파 정치세력이 중심에 선 역사, 그들이 주인공으로 북한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세우고, 지켜낸 역사가 곧 이영훈 교수가 바라본 "대한민국 이야기"다.

그래서 이영훈 교수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입맛이 쓰다. 말로는 '개인'과 '자유'를 옹호하며 민족주의를 비판하지만, 이영훈 교수의 역사서술이야말로 승리자만을 위한 역사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개인'을 배제하고,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이영훈 지음,
기파랑(기파랑에크리), 2007


#식민지근대화론 #군함도 #한국전쟁 #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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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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