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의 민낯은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

[강남공화국의 민낯10] 서울올림픽과 강남 개발

등록 2017.09.01 20:45수정 2017.09.0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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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8일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이 참석한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장 정상천은 1988년 하계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겠다고 발표했다.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을 반납해야만 했던 기억이 생생했던 당시 상황에서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통령 박정희에게 올림픽 유치 신청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카드였다. 무엇보다 유신독재에 염증을 느끼고 돌아선 민심을 호도하는데 더없이 좋은 구실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남한이 북한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체제선전에 안성맞춤인 이벤트였다.

문제는 당시 정치상황이 올림픽 유치 선언으로 수습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신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 종말을 알리는 부마항쟁이 그해 10월 15일 촉발되었다. 박정희는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그리고 10월 26일 유신체제의 끝을 알리는 총성이 궁정동 안가에 울려 퍼졌고, 올림픽 유치 활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올림픽이 유치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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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종합운동장 잠실종합운동장은 잠실매립지구 330,000㎡(10만평)의 부지에 1977년 12월 20일 공사를 시작하여 실내체육관, 실내수영장, 야구장이 준공된데 이어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주경기장이 1984년 9월 29일 완공되었다. ⓒ 서울역사편찬원<시민을위한서울역사2000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올림픽 유치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1980년 7월 14일 대한체육회(KOC) 회장에 조상호가 취임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올림픽 유치론자였던 조상호는 유치 신청 마감(1980. 11. 30)을 앞두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유치 신청에 가장 큰 장애는 신청도시인 서울시의 사정이 올림픽을 치를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올림픽을 치르려면 2조 원이 넘는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당시 서울시의 주택보급율은 60% 정도였고, 지하철 2호선 공사는 착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출퇴근 시간이면 교통체증으로 서울 도심은 몸살을 앓았고, 생활하수와 공단폐수의 유입으로 한강은 악취가 풍겼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서울시로서는 올림픽 유치에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신청 마감을 사흘 앞둔 1980년 11월 27일 서울시는 "당면한 경제적 재정적 여건을 감안할 때 올림픽이 개최될 시기까지는 필요한 제반시설이 도저히 구비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유치할 수 없음"을 KOC와 문교부에 통보하였다.


상황은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는 KOC의 주장과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개최가 어렵다는 서울시의 입장으로 갈렸다. 이런 가운데 1980년 11월 29일 문교부 장관 이규호는 KOC와 서울시의 입장을 정리한 행정보고서를 작성하여 대통령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전임 박정희 대통령이 결심한 사안을 특별한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 서울특별시, <제24회 서울올림픽백서>, 283쪽

전두환의 이말 한마디로 서울시는 1988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키로 결정했다. KOC와 서울시는 12월 2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 제출과 함께 치열한 유치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서울시는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52 대 27로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치고 개최지로 선정됐다.

88올림픽을 서울시가 유치하게 되자 1986년 아시안게임의 서울 개최가 기정사실화됐다. 1981년 11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 총회에서 북한의 평양과 이라크의 바그다드가 유치를 포기하면서 표결 없이 서울시가 개최지로 확정됐다.

경기장 건설과 도심정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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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공원과 몽촌토성 몽촌토성이 위치한 송파구 방이동 소재 50만 평의 부지에 조성된 올림픽공원에는 자전거경기장, 펜싱경기장, 체조경기장, 테니스경기장, 수영경기장 등이 지어졌다. ⓒ 문화재청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게 되자 대회를 치를 경기장 건설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잠실종합운동장의 경우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잠실매립지구 33만㎡(10만평)의 부지에 1977년 12월 20일 기공식을 갖고 한창 공사 중이었다. 1979년 4월 18일 실내체육관이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실내수영장(1980. 12. 30), 야구장(1982. 7. 15)이 순차적으로 준공되었다.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주경기장은 착공 8년만인 1984년 9월 29일 완공되었다. 잠실종합운동장 건설비는 1025억 원으로 서울시 예산 806억 원과 국고보조금 219억 원으로 충당되었다.

몽촌토성이 위치한 송파구 방이동 소재 50만 평의 부지에는 올림픽공원이 조성되었다. 1986년 6월 30일 완공된 올림픽공원에는 자전거경기장, 펜싱경기장, 체조경기장, 테니스경기장, 수영경기장 등 5개의 경기장이 지어졌다. 또한 몽촌토성이 복원된 것을 비롯하여 한국체육대학 캠퍼스가 조성되었고 올림픽회관, 평화의문 등의 부대시설이 건설되었다. 올림픽공원을 짓는데 투입된 예산은 1581억 원으로 서울시가 617억7천만 원, 올림픽조직위원회가 963억7천만 원을 부담하였다.

경기장 건설과 함께 한강종합개발 사업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한강은 생활하수와 공장 폐수의 유입으로 악취가 진동하고 강 군데군데에 크고 작은 진흙더미가 쌓여 잡초가 무성했다. 한강종합개발 사업은 "서울지역 내 한강 골재와 고수부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1982년 9월 28일 여의도 둔치에서 기공식과 함께 착공되었다. 한강종합개발 사업의 주요 내용은 저수로의 정비, 분류하수관로 건설, 하수처리장 건설, 콘크리트 호안 건설, 수중보(신곡수중보, 잠실수중보) 건설, 한강시민공원 조성 등이었다.

4198억 원이 투입된 한강종합개발 사업은 1986년 9월 10일 완공되었다. 한강의 수질 개선을 위해 54.6km에 달하는 대형분류 하수관로가 설치되고 중랑천, 안양천, 홍제천, 탄천에 하수처리장이 건설되었다. 한강변 둔치에는 체육공원 9개소(약 210만평)가 만들어졌고, 77개의 지하보도와 자동차 진입로가 설치되었다. 한강의 남쪽연안으로는 김포공항에서 올림픽경기장을 잇는 올림픽대로가 건설되었다.

한강종합개발 사업으로 수질 개선과 함께 경관이 정비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확보되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 사업으로 인해 한강은 자연하천의 기능과 모습을 잃어버린 거대한 콘크리트 수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한강종합개발 사업이 완료되자 유람선을 띄우고 마치 대한민국이 지상 낙원인양 선전하였다. 한강종합개발 사업이 한창이던 1983년 사회정화위원회는 '국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취시키자'는 의도 하에 KBS와 함께 건전가요를 수록한 옴니버스 앨범을 제작하였다. '즐거운 우리들의 노래'라는 부제를 달고 그해 여름 발매된 건전가요 모음집 타이틀곡은 가수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이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참가하는 외국인들을 의식한 도시미관정비사업도 병행되었다. 서울 도심의 태평로, 종로, 을지로, 마포로, 한강로 등 주요 간선도로변 42개 지구와 도심지역(종로구, 중구) 53개 지구 등 모두 95개 지구(43만7,455㎡)가 재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었다. 또한 김포공항 근처인 양천구 목동과 신정동 일대 140만평을 재개발하면서 대대적인 철거가 진행되었다.

문화재의 정비와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한성백제 유적인 몽촌토성, 석촌동고분, 방이동고분과 암사동 신석기 유적이 발굴 정비되었다.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헐어버린 경희궁이 재건되었고, 종묘와 사직단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그밖에도 선수촌과 기자촌이 건설되었고, 잠실종합운동장 인근에 아시아공원이 만들어졌다. 가락동 구획정리사업과 농수산물도매시장이 건설되었고, 용산전자상가가 신축되어 종로3가의 전자상가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교통난의 해소를 위해 지하철 3·4호선이 착공되는 한편, 가로 주차장 확충과 도시환경 정비사업이 추진되면서 서울은 공사판으로 변했다.

86·88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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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3호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문화재의 정비와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한성백제 유정인 석촌동고분, 방이동고분, 몽촌토성 등의 유적이 발굴 정비되었다. 송파구 석촌동 소재 3호분 뒤로 공사 중인 롯데월드타워 모습이 보인다. 2014년 9월 6일 촬영. ⓒ 전상봉


전두환 정권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였다. 광주학살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일에서부터 노동자와 도시빈민을 탄압하는데 이르기까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전가의 보도였다. 시인 김용택이 1985년 10월 부정기간행물로 복간된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팔유팔파'라는 시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얘야 팔유팔파오림픽이 열리며는 우리덜은 뭐시그리 좋다냐 소값이나 쌀값이나 객지에서노동일 허는 니동생 임금이라도 올라간다냐 그러고 우리덜은 귀경시켜준다냐 글씨요 어무니 그때까장 우리가 여기서 복통 농사짓고 살며는 객광오광시럽지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오림픽 성금은 낼거요 그러먼 뭣이 그리저리도 좋을까잉. 그나저나 팔유팔파오림픽이 열리며는 그 누구의 말대로 거시기뭣이냐 민족사의 왼갖질곡과 시련을 극복하여 그 종지부를 꽉 찍을까 그럴까 우리하늘이 저쪽끝에서 저쪽끝까지 훤하게 갤까." - 김용택, '팔유팔파', <창작과비평> 통권 57호, 152~153쪽

한마디로 1980년대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하여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이라는 환상이 주입되던 시대였다. 전두환 정권은 86·88이라는 희망 고문과 함께 3S정책(screen, sport, sex)이라는 우민화 정책을 병행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칼라TV 방송을 시행하고, 중고교생 두발 자유화와 교복 자율화,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출범시켰고,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을 완화하여 국민들이 현실을 외면하도록 조장하였다.

이런 가운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이유로 노점이 철거되고, 달동네가 뜯겨지면서 도시빈민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대한민국의 관문인 김포공항과 올림픽대로가 지나는 국회대로 주변의 판자촌이 철거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사격 경기가 열리는 태릉 국제사격장 인근의 빈민가를 비롯하여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과 오정동 일대도 철거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배경이 된 노원구 상계동 천막촌 철거는 성화 봉송로 주변의 환경정비가 이유였다.

서양인들의 눈을 의식해 개고기 판매가 금지되어 대로변에서 보신탕집이 자취를 감추었다. 뒷골목으로 밀려난 보신탕집에서는 보신탕 대신 사철탕, 영양탕, 보양탕이라는 낯선 이름의 메뉴로 개고기가 팔리기 시작했다.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부랑자, 노숙인,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난데없이 잡혀가 수용시설에 갇혔고,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장애인 올림픽이 개최되는 블랙코미디가 연출되었다.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면 위압적이라 하여 수도권 부대 병사들의 휴가와 외박이 제한되었고, 방위병(현재의 공익근무요원)은 군복대신 평상복을 입고 출퇴근해야 했다. 서울 시내를 통행해야 하는 군용 차량의 경우 얼룩무늬 위장색 위에 파란색이나 황토색으로 다시 위장을 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 이런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다음과 같은 낯 뜨거운 자화자찬이 가능했던 것이다.

"올림픽 때 서울을 찾은 대부분의 외국인들의 공통된 서울에 대한 인상이 매우 깨끗하다, 꽃이 많고 아름답다, 한강이 아름답고 인상적이다라는 것이었으며 서울은 티끌하나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라는 격찬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 서울특별시,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백서>, 1394쪽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하에서 사람들은 1980년 광주학살의 고통으로 아파해야 했고, 민중들의 삶은 곤고하고 고달팠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이 통제된 상황에서 치러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잠시 한 때 고통을 잊게 해준 모르핀이었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88서울올림픽 #86서울아시안게임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공원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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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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