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산악회서 벗어나니 나만의 '정상'이 보이네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 ②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

등록 2017.09.09 19:44수정 2018.01.28 00:18
3
원고료주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운무에 휩싸인 소나무이른 아침 깊은 산속은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운무에 휩싸인 나무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전해준다. ⓒ 이명수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산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온몸에 땀이 나고 숨이 차고 힘들어서 될 수 있으면 산을 멀리했다.

산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산속에서 노니는 건 순전히 동생 덕분이다. 50세가 넘도록 독신을 고수하는 동생은 달린 식구가 없기 때문인지 무척 자유롭게 산다. 특급호텔 주방에서 오랫동안 요리사로 근무해 갖가지 요리를 척척 만들어 내는데, 음식 솜씨가 좋다.

십수 년 전 호텔을 그만두고 상명대학교 앞에 양식집을 개업했다. 날마다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제발 손님이 그만 왔으면 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장사가 아주 잘 되는 그 가게를 2년 만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뜬금없이 도자기를 배운다고 지방으로 내려가 3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남양주 축령산자연휴양림 들머리에 '통나무산방'이란 음식점을 차렸다.  

인가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도로변에 자리 잡은 유럽풍의 통나무집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제법 운치가 있다. 둥글둥글한 통나무 원목의 굴곡을 최대한 살려 기둥을 세우고 벽을 차곡차곡 쌓았기 때문에 실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테리어 효과가 있다. 거기에 출입구 양쪽 벽에서부터 곳곳에 도자기 진열장을 만들어 수백 점의 도자기를 진열해 놓아서 마치 도자기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통나무집과 도자기는 썩 잘 어울린다. 동생은 통나무집 옆 빈터에 도자기 굽는 가마와 공방을 설치해 한가할 때는 도자기를 빚는다.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통나무산방으로 간다. 차를 기다리고 갈아타는 것까지 따지면 3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 시간은 책 읽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책을 읽다 보면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통나무산방에는 항상 술과 음식이 있고 잠을 잘 방도 있으니, 나에게는 최상의 주말 별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느긋하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고, 달빛에 젖어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정취를 한껏 느낀다.

통나무산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깨어나면 몸이 가뿐하고 기분이 상쾌하다. 오염이 안 된 공기 탓일 수도 있고, 자연 속에서 한껏 여유로워진 내 마음 탓일 수도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느긋하게 산에 갈 준비를 한다. 산에서 붓글씨를 쓰는 취미가 생긴 후로 붓과 먹물은 항상 배낭 속에 챙긴다. 손님 식탁 위에 까는 모조지 전지를 10여 장 둘둘 말아 손에 들고 통나무산방을 나선다.

산에서 노니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a

산속에 핀 달맞이꽃산길에 핀 달맞이꽃-축령산에서 서리산 쪽으로 가는 길목에 피어 있다. 꽃을 보고 있노라면, 이창희의 시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꽃은 참 예쁘다/풀꽃도 예프다/이 꽃 저 꽃/저 꽃 이 꽃/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 이명수


고지가 높은 산기슭 마을의 이른 아침은 안개가 낀 날이 많다. 배낭을 메고 자욱한 안개 속을 걸어 산을 오른다. 축령산자연휴양림 시설물을 벗어날 때까지 계속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이마에서부터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런 고통이 싫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산에 오르는 것을 싫어했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산에 왜 오르는가? 다시 내려올 것을 왜 힘들게 사서 고생하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산행의 매력에 빠져들고 보니 내 경험의 폭이 좁아 생각도 짧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산행은 분명 힘들고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일이지만, 그것은 능동적으로 선택한 고행이다. 따지고 보면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지치도록 축구나 농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땡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공을 차는 사람에게 "당신은 축구를 왜 힘들게 하시오?"라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산행도 육체와 정신 건강에 좋은 운동이자 취미이다.

혼자서 터벅터벅 적막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우리의 삶도 등산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마다 등에 배낭을 짊어지고 한 발 한 발 산을 오른다. 험한 비탈길도 있고 천 길 낭떠러지도 있다. 숲속에서 멧돼지 떼를 볼 때도 있고 맹독을 품은 독사가 숨어 있기도 하다. 산속은 평온하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늘 주의가 필요하다.

산을 찾는 마음이 다 같을 수는 없고 산을 오르는 목적 또한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편안한 산길을 걷는 것을 즐기고, 어떤 사람은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암벽 등반을 즐긴다. 주말이면 산악회 버스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무리를 지어 왁자지껄 산을 오른다. 뜻이 통하는 사람끼리 만나 흥겹고 유쾌하게 산행을 하는 것을 탓할 바는 아니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추태가 된다. 값비싼 등산복으로 치장하고 싸구려처럼 행동하는 등산인들도 적지 않다.

a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축령산 전망대에서 쓴 遊山如讀書. '산에서 노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 이명수


나는 홀로 산행이 익숙하다. 서울에서는 아내와 함께 북한산을 자주 찾지만, 통나무산방에 들어가면 혼자서 산행을 한다. 여러 해 전 산악회를 따라 덕유산 등반을 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산행과는 달랐다. 나는 바위틈에 핀 꽃도 보고, 사진도 찍고, 새들의 노래에 화답도 해가면서 그야말로 느릿느릿 게으르게 자연과 눈 맞춤하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 산악회 사람들은 계획에 따라 무리 지어 움직이며 끼리끼리 소란스러웠다. 듣기에 거북한 음담패설을 하면서 낄낄거리는 남녀도 있었다. 그런 것이 싫어 야생화나 자연경관에 잠시 한눈을 팔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무리에서 멀어졌다. 무리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숨 가쁘게 따르는 동안 몸도 지치고 마음도 불편해졌다. 산악회는 나와 맞지 않았다. 산에서 나는 혼자일 때 가장 자유롭고 얻는 것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한 번 산악회를 따라간 덕유산 등반에서 건진 것이 있다면, 삿갓재 대피소에서 본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라는 글귀이다. 약간 곡선으로 굽어진 나무판자에 적힌 예서체 글씨는 멋이 넘쳤다. "산에서 노니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라는 뜻이다. 이 글귀의 출처를 찾아보니 여러 사람이 검색됐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을 비롯하여 조선의 퇴계 이황, 어유봉 등의 시문에 이 글귀가 발견된다. 그날 이후 '遊山如讀書'는 내가 산에서 즐겨 쓰는 글귀 중의 하나가 됐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산이 있다

a

다람쥐 모델혼자 걷는 산길, 눈이 즐거우라고 다람쥐 한 마리가 꺾인 나뭇가지에 앉아 멋지게 포즈를 취해준다. ⓒ 이명수


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책에는 아주 심오한 철리(哲理)가 담겨 있다. 대충 보면 보이지 않지만, 유심히 보면 대자연의 오묘한 아름다움과 신비가 곳곳에 숨 쉬고 있다. 철 따라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고, 명상과 성찰의 시간을 통해 대자연을 읽고 해석하다 보면 어떤 깨달음이 생긴다. 산봉우리는 땀 흘리고 노력해야 오를 수 있기에 도전과 인내는 필수이다.

산행과 인생은 지름길이 없다. 한 걸음씩 꾸준히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 발밑에 있다. 산정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하게 된다. 가슴 벅찬 그 감동의 파동이 바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원기'라는 호연지기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등동산이소로(登東山而小魯), 등태산이소천하(登泰山而小天下)'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공자가 동산에 올라 보니 노나라가 좁은 줄 알고, 태산에 올라 보니 천하가 좁은 줄 알았다는 뜻이다.

산정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아주 멀리까지 보인다. 탁 트여 시원스러운 경치는 마음을 넓게 만든다. 일상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는 산을 오르는 동안 흘렸던 땀 속에 이미 빠져나갔고, 마음을 괴롭혔던 걱정과 근심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첩첩 겹쳐 큰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산들은 큰 산이나 작은 산이나 모두 봉우리가 있다. 인생도 그러하지만, 누구나 다 정상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방관하고 체념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산 정상에 오를 수 없다. 꾸준히 오르면 못 오를 산은 없지만, 산언저리에서 산이 높다고 불평불만만 잔뜩 쏟아내는 사람이 참 많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고, 극복해야 할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시시한 인생을 살다 갈 수밖에 없다.

a

숲을 지나는 바람이 전하는 말서리산을 오를 때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서리산 정상에서 그 느낌을 붓으로 쓰다. ⓒ 이명수


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다들 정상에 오르려 하지만, 반드시 적잖은 땀과 노력을 요구하다. 고통과 난관과 장애의 극복이 있기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도 오래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정상은 춥고 고독한 자리이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듯이 정상에 이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하산할 때는 등에 진 무겁던 배낭이 한결 가벼워진 것처럼 마음속을 채운 온갖 욕심도 최대한 가볍게 털어내면서 조심스럽게 내려와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산 하나를 품고 산다. 땀 흘려 이뤄야 할 꿈과 희망이 그것이다. 우뚝 높은 산을 품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완만한 뒷동산을 품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산의 높낮이와 형태는 각양각색이겠지만 저마다의 산에는 봉우리가 있다. 그런데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오른 사람이 있는 반면에 뒷동산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도 많다.

인생이란 산의 높낮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내 가슴에 품은 산이 뒷동산이라면 거기에 충실해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정상까지 밟아 오르면서 의미를 찾고 만들어야 한다. 뒷동산에도 필 꽃은 피고, 노래할 새는 노래하고,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도 있고, 시원한 그늘과 향기로운 바람이 있는 것이다. 내가 품은 산에 있는 것들의 소중한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한가!

내가 선택한 인생의 산을 묵묵히 오르면서 곳곳에 숨겨진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일 것이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AD

AD

인기기사

  1. 1 서울랜드서 1시간만에 사망한 아들... 엄마는 반백이 됐다
  2. 2 "롯데 쌀 과자, 후쿠시마 쌀 쓴 것 아니냐"... 진실은?
  3. 3 문 대통령 때리는 중앙일보 기사의 '수상한 일본인'
  4. 4 "사랑니 치료하러 갔는데 치아 20개 넘게 갈아버렸다"
  5. 5 "한국인의 얼굴과 일본인의 창자... 이런 사람이 '토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