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라면 인생, 왜 자꾸만 라면이 당길까

라면과의 '첫 만남' 이후... 세 단어로 요약되는 라면 인생

등록 2017.09.13 09:52수정 2017.09.1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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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가 넘은 조금은 야심한 시각, 예고에 없었던 촐촐함이 뇌수를 자극한다. 저녁을 좀 이르게 먹은 탓일까. 그걸 못 참고 집에 뭐 먹을 게 없나 냉장고와 선반을 기웃거린다. 불현듯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하는 게 있었으니 이름하여 라면이다. 라면 수프의 강렬한 맛은 이미 뇌리에 각인됐고 배고픔이 찾아올 때면 그 맛이 슬쩍 떠올라 침샘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2015년 한국에서 팔린 라면 판매량은 36억 개(세계라면협회 자료). 라면 봉지 하나 정도는 집에 상비하고 있을 터라 라면이 밤에 절로 떠올려지는 건 이심전심일 것이다. 선반의 라면 봉지를 집고 가만 돌이켜보니 24년(지금 나이가 만 24살이니) 삶 중 라면과 함께한 시간이 어언 20년이다. 기억의 힘을 빌리자면 4살 무렵에 라면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것도 맛나게.

누군가는 '난 30년인데 넌 고작 20년 가지고 주름잡는 거냐'고 핀잔하시는 분도 있겠다. 이 땅에 라면이 처음으로 출시된 게 1963년이었으니 라면 인생 40년, 50년인 분도 제법 있을 것이다. 굳이 세월을 들먹여 라면과 함께한 삶을 과시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내 라면 인생을 간략하게라도 돌아보고 싶었다.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봉지 라면을 쥐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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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셔먹는 라면 ⓒ 고동완


무심코 전이된 라면

나에게 라면은 무의식으로 전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만4살 때면 1997년이다. 대전 친척 집에 살 때였다. 친척 누나는 어느 날, 라면을 끓였고 라면은 나의 식습관을 뒤바꿀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난 뭘 먹든지 간에 꾹 물기만 하고 잘 삼키려 하질 않았다. 밥을 먹더라도 구강에 힘을 줘 단물만 쏙 먹고 끈끈해진 밥 덩어리는 삼키길 주저했다. 라면은 이 버릇을 단숨에 고쳤다.

코끝을 자극하는 후각의 강렬함, 침이 뚝뚝 나오게 만드는 빨간 국물, 이것에 차지게 얹어놓은 면발까지. 4살이었지만 젓가락을 옮기지 않고선 못 배길 광경이었다. 면발을 입안에 집어넣자 식도로 넘어가려는 걸 쳐내려는 행동은 벌이지 않았다. 국물을 들이킬 때는 강렬한 게 목을 타고 넘어오는 걸 느낀 것 같으면서도 이내 입안과 입 주변에 생긴 얼얼함을 즐겼던 것 같다.


이리하여 라면과의 첫 만남은 내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친척 집에 파고든 라면의 보편성과 굳건했던 식습관을 허물어버린 라면 특유의 강렬함이 성사시켰다. 이후에도 '첫 만남'은 계속됐다. 면과 스프, 건더기로 라면의 구성품은 줄곧 동일한데 이걸 가지고 만들어낸 결과물은 흐르는 인생과 함께, 난생처음 보는 것들로 내내 변주됐던 것이다.

라면과의 첫 만남에서 가장 크게 충격파가 일어난 건 라면의 '과자화'였다. 2001년 만8살, 초등학생이었을 때다. 문구점에서 친구가 나오는데 손에 라면 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봉지의 형태는 반듯하지 않고 쭈글쭈글했다. 궁금해서 봉지를 열어보니 으깨진 면에 수프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부서진 면을 집어 먹었다.

자주 찾는 '부숴 먹기'

맛은 맵고 단조로운데 중독성이 은근 있었다. 건조된 면이 씹는 질감을 과자로 만들었고 거기에 수프가 더해져 독창적(?)인 맛이 만들어졌다. 그 맛을 생각하니 다시 군침이 도는데, 이 친구는 라면을 끓이는 전통적인 조리법을 따르지 않고 부순 면에 수프를 버무려 과자로 만들었다. 가스도, 물도 필요가 없는 진정으로 간편한 조리였다.

사실 부숴 먹는 라면의 시초는 99년 출시된 '뿌셔뿌셔'였다. 만7살일 때 떡볶이 맛, 불고기 맛, 바비큐 맛을 섭렵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메론 맛, 딸기 맛은 먹을 게 못 됐다. 다만 당시에는 라면이 아니라 뿌셔뿌셔 말마따나 과자로 출시된 걸 먹었기 때문에 끓여서 조리하는 라면을 부숴 먹는다는 발상은 미처 하질 못했다. 그러한 인식의 저변을 넓혀준 게 아까의 사건이다.

여하튼 너무나도 간편한 새 조리술이 각인된 이상 어찌 마다하겠는가. 라면 봉지에 적힌 조리법을 가뿐히 무시하고 어린 나이에 잘만 부숴 먹었다. 끓여 먹으면 으레 필요한 그릇과 숟가락의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조리랍시고 면을 부술 힘과 그 힘을 전할 몸이 있으면 됐다. 때론 귀찮음이 더해져 지금도 잘만 부숴 먹는다. 그럼에도 사소한 거지만 부수는데 주의할 게 있다.

면을 부수려고 봉지에 손을 얹고 힘을 가할 때 전방위여선 안 된다. 우선 라면 양쪽에 손을 대고 힘을 줘 두 동강을 낸 다음, 다시 4등분, 8등분 하는 식으로 부숴 나가야 한다. 무작정 손에 힘을 팍 싣고 전방위로 부숴나갔다간 라면 봉지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그러면 수프를 집어넣고 봉지를 흔들 때 터진 곳에서 온갖 것들이 뿜어져 나오는 참사를 겪는다.

라면, 어떻게 먹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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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여먹는 라면 ⓒ 고동완


몇 번 터지는 걸 경험하면 터득할 팁 아닌 팁을 적었다. 이제 얘기하고 싶은 건 라면과 이것이 36억 개 팔려나가는 이 땅에서의 내 라면 섭취 경로다. 이것은 나의 삶의 일부이고 라면을 평소 먹어왔던 누군가의 거울이지 않을까 싶다. 잠깐, 36억 개라니 많은 건 알겠는데 감이 잘 안 온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2015년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에 따르면 한국인이 한해 먹는 라면 개수는 76개에 달한다. 라면의 총소비량을 1인으로 환산한 결과다. 한 달 6개는 먹는 셈이다. 1인당 라면 소비량 1위가 한국이다. 2위는 베트남(55개), 3위는 인도네시아(53개)였다. 라면의 본고장 일본은 43개였다.

당장 지난 주만 라면을 네 번(그 중 부숴 먹은 것 포함) 먹었다. 1주일 삼시 세끼로 환산하면 21끼이지만 같은 메뉴를 세 번 이상 먹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다. 한 번은 끓인 걸로, 또 두 번은 뜨거운 물에 부어서, 다른 한 번은 부숴 먹었다. 날것을 먹어도, 끓인 뒤 갖은 형태로 조리를 해도 입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 라면인지라 먹는 빈도가 높아진다.

끓인 채로 먹은 건 법학관 지하에 있는 학교 식당에서였다. 대표 메뉴는 제육볶음과 치킨가스, 그리고 라면이었다. 이중 택일해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어떤 걸 고를까 고민하다 제육볶음과 치킨가스를 연상했는데 입맛이 다셔지질 않았다. 라면을 떠올리자 이상하리만큼 뇌리에 강렬한 무언가가 맴돌더니 침샘을 자극했다. 결국, 택한 건 라면이었다. 이것도 중독이라면 중독일 터.

세 단어로 축약되는 내 라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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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 앞 쌓여진 라면. 매점 하나에 라면이 저리 유통된다. ⓒ 고동완


가격이 착한 것도 라면을 고르는 데 무시 못 할 요인이었을 것이다. 다른 가격대 메뉴가 3천 원대인데 비해 라면은 1700원이다. 공깃밥 500원을 얹으면 2200원으로 식사를 충분히 할 수 있다. 물론 오로지 돈 때문에 라면을 고른다는 걸로 일반화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관계 또한 부인할 수가 없다. 당장 제육볶음과 라면이 같은 가격이라면 어느 걸 고르겠나. 맛의 강렬함에다 저렴한 가격이 더해져 라면이 여기저기 파고드는 것일 테다.

토요일 늦은 저녁, 학교 식당은 문을 닫았고 대용으로 매점에 들러 먹을 걸 찾다가 고른 건 컵라면이었다. 아무래도 돈을 차곡차곡 모아야 하는 청년의 입장에서 가성비를 안 따질 수 없다. 샌드위치를 집자니 뭘 마실 걸 사야 하는데 같이 사면 4천 원은 금세 지나간다. 옆으로 눈을 돌리니 컵라면 진열대가 보인다. 300ml 우유와 컵라면을 집고 계산을 하니 2500원이다. 저녁 끼니를 해결하러 온 내 뒤에 다른 두 명도 한결같이 컵라면을 집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서 꾸려진 게 내 라면 인생이 아닌가 싶다. 그 인생엔 간편함과 가성비, 중독이란 세 단어로 축약될 수 있다. 출출함을 달래려 라면을 찾는 경우도 잦겠지만 축약된 단어들과 거리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위에서 신호가 오면 이왕 집에 있는 걸 찾기 마련이고 집엔 가성비 출중한 라면이 여러 개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과거 먹었던 라면의 선명한 기억이 입맛을 자극하는 순간, 내 라면 인생은 세 단어에서 기인한 것이고 여기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다시 일깨워주는 셈이 된다.

이렇듯 라면 인생은 단순하면서도 반복의 여정이다. 반복되는 라면 인생처럼 한국이 가진 '라면 섭취량 1위' 타이틀도 2~3위와 격차가 제법 있는 상황에서 반복될 것만 같은데 좋아할 일인건지는 잘 모르겠다. 라면의 보급으로 식탁에 메뉴가 더 얹어진 건 장점이면 장점이겠지만 라면의 섭취 경로를 보다 보면 기뻐할 일은 영 아닌 것 같아서다.
#라면 #사회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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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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