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원혜영 등 낙선한 의원들이 차렸던 고깃집

헌책방에서 발견한 책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

등록 2017.09.15 19:54수정 2017.09.1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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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를 만나러 수원에 갔습니다. 화성 행궁을 걷고 나오는데 헌책방이 눈에 보였습니다. 평소에도 헌책방 다니는 일을 좋아했던 터라 바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저런 책을 보다가 신기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표지에는 하얀 모자를 쓰고 재료를 들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의원님들 장사 잘돼요?>라는 이름의 책을 200원에 구입하고 집에 돌아와서 읽었습니다.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의 화로, 겨울의 부채라는 뜻입니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정치인들이 차린 음식점 이름입니다. 여름의 화로, 겨울의 부채처럼 지금은 쓸모가 없지만 머지않아 꼭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의원님들 장사 잘돼요?>는 하로동선에서 일했던 정치인들의 에세이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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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 ⓒ 정음문화사


15대 총선 당시, 김원웅ㆍ노무현ㆍ원혜영ㆍ유인태ㆍ이철 의원은 지역주의와 다른 외로운 길을 걸었습니다. 결과는 낙선이었습니다. 낙선했지만 서로 뭉치고 지낼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유인태 의원이 우스개로 음식점을 차릴까 농담을 했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낙선 의원들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하고 식당 경영에 나섰습니다. 낙선의원 이외에 제정구ㆍ김홍신 의원이 추가로 참여했습니다. 김원웅 전 의원은 대표를 맡고, 다른 의원들은 요일마다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하로동선 사람들은 엄청난 개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천받기 쉬운 정당 다 피해서, 일부러 힘든 길을 걸은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폐지시키고 '초등학교'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 김원웅 의원,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 의원, 지역주의와 싸우느라 평생을 보낸 노무현 전 대통령,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받았던 이철ㆍ유인태 의원, 다산 정약용 연구자 박석무 의원, 풀무원 식품 창업자 원혜영 의원.

'월요일엔 박석무, 화요일엔 노무현이 술을 따르고, 수요일엔 홍기훈ㆍ김홍신이 고기를 자르는 그런 식이다. 당번들의 성격에 따라 손님맞이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노무현은 우선 정중하게 큰 절을 하여 손님들을 놀라게 하고, 제정구는 손님이 주문한 음식 쟁반을 손수 들고 다니고, 홍기훈은 수줍음이 많아 새색시 같다. 김홍신은 여성 손님들에게 인기 만점이어서 어성 테이블에 앉으면 일어날 수가 없다.' - 본문에서


다행히도 하로동선은 출발 즉시 성공적인 궤도를 탔다고 합니다. 한보청문회를 보면서 답답한 정치에 속이 탄 국민들은 왕년의 청문회 스타들과 고기를 먹으며 한을 달랬습니다. 

책에서, 박석무 의원은 하로동선이라는 이름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쓸모가 없지만 가을바람만 불면 난로가 필요하고 봄바람만 불면 부채가 필요하니, 때가 되면 여러분들은 재기할 것이라고 격려한 국민들 덕분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로동선의 구성원들은 훗날 길을 갈라 헤어졌습니다. 이후 원혜영ㆍ노무현 의원은 민주당으로, 제정구ㆍ김원웅ㆍ김홍신 의원은 한나라당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끝까지 지역주의에 맞선 끝에 대통령이 되었고, 유인태 의원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그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비록 나중에는 길을 달리 하게 되었어도, 지역주의에 맞서 장렬한 낙선을 당한 사람들이 그 의지를 지키기 위해 뭉쳐 노력했던 점은 고평가할 일입니다.

제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한 것은 하로동선의 창업으로부터 20년 후인 2017년입니다. 20년 동안 다양한 정당과 사회단체가 만들어지고 사라졌습니다. 탈당한 사람들이 만들었던 정당, 당명을 빼앗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 특정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정당 등등 수십 개의 정당이 명멸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20년 동안,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낙선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한 정당은 더더욱 적었습니다. 대부분의 정당이 선거를 기점으로 우후죽순 만들어졌다가 가치도 원칙도 세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하로동선처럼 식당을 운영해서라도 의지를 잇겠다고 모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원내 정당은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입니다. 바른정당은 지난 촛불 정국 때 개혁 보수를 정립하겠다는 기치 하에 새누리당 탈당파가 만든 정당입니다. 지금 바른정당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혜훈 대표가 사퇴하고, 자유한국당과의 통합론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앞서 바른정당이 자유한국당에 흡수통합되도록 하는 것이 당의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국민의당은 2016년 총선을 기점으로 민주당 탈당파 의원들과 '새정치' 안철수 대표가 손을 잡고 만든 정당입니다. 안철수 대표는 대선 제보조작 사건이 터지고 잠행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을 깨고 당 대표에 출마, 당선되었습니다.

현재 안철수 대표는 '극중주의'라는 이념 하에 정부 여당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9월 11일 김이수 헌법재판소 소장 임명 동의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었는데, 국민의당의 반대표가 큰 공헌을 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은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두 정당이 제대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나아가 한국 정치사에 자취를 남기려면 자신들의 원칙과 가치를 지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로동선의 사람들처럼, 우직한 방법으로 국민들이 원하는 참신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겨울의 화로, 여름의 부채로 요긴하게 쓰일 때를 맞이할 것입니다.

20년 전, 하로동선을 방문한 한 나이 많은 손님은 "정치하듯이 식당을 운영한다면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식당 운영하듯이 정치를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이 고객(지지자)의 요구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믿을 수 있고 또 오게 만드는 음식(정책과 후보)을 내놓으면 사람이 몰린다는 뜻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이 이 점을 유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

김원웅 외,
정음문화사, 1997


#하로동선 #노무현 #원혜영 #박석무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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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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