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왜 이럴까" 탓하지 마세요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 ③아사자연(我師自然)

등록 2017.09.17 20:09수정 2018.01.2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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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수리바위에서 본 풍경. 예부터 축령산은 골이 깊고 산세가 험해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독수리가 많았다고 한다. ⓒ 이명수


젊었을 때는 도시적인 환경과 사람 만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대자연에 마음이 더 쏠린다. 도시의 외관은 빛나고 화려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요지경 속이다. 너무 탁하고 시끄럽고 각박하고 살벌하다. 세상인심은 또 어떠한가? 참으로 변덕스럽고 박정하다. 여측이심(如厠二心), 즉 뒷간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확연히 다르다. 이해득실의 저울질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돈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의 삶은 녹록지 않다. "돈이 말을 하면 진실은 침묵한다"라는 서양 격언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진리에 가깝다. 대다수 서민은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일이 많다. 문학청년 시절,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짬짬이 밤잠을 설치며 습작을 할 때는 등단만 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등단을 하고 한 권, 두 권, 세 권... 열 권이 넘는 책을 내고도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작품을 쓸 때는 항상 중국 진나라 때 무명의 문인 좌사(左思)가 <삼도부>(三都賦)라는 저작을 발표하여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고사처럼 나도 대한민국의 종잇값을 한껏 올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재주가 거기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고 운도 따르지 않았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작품만 써서는 처자식을 생활고에 시달리게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밥벌이 일자리를 찾아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를 전전했다. 고용이 불안정한 업계 환경에서도 나름대로는 성실하게 일했지만, 생활비와 교육비 등을 제하면 늘 빠듯했다.

급여생활자로 살아가며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족의 생계가 걸린 돈벌이를 위해 온갖 모멸감을 꾹 참고 견디어야 하는 순간이 많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긴장과 삶의 불안 속에서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혈압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장기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정말 몸속에서 독소를 뿜어내어 병을 만든다.

내 경우는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가장 많고 제일 고약한 것 같다. 세상에는 방귀 뀐 놈이 성을 내기도 하고, 도둑이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황당한 일도 왕왕 있다. 내 실수가 아닌 것을 가지고 질책을 당할 때면 기분이 참 더러워진다. 또한, 자질구레한 일로 자꾸 싫은 소리를 들을 때는 직장인의 비애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날은 술 한 잔 마시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려고 해보았지만, 몸만 상하고 뒷맛이 개운치가 못했던 때가 더 많았다.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그래서 혼자 속으로 삭이곤 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세상사에 지칠 때는 사람 외적인 것의 위안이 필요하다.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이 없는 조용한 숲속이나 바닷가 같은 자연 속에 파묻히는 것이 효과적이다. 대자연의 품속에서 흙을 밟고 걸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 보면 적잖은 위안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야외로 나간다. 회색빛 도심에서 벗어나 확 트인 자연 속에 있으면 우선 눈부터 시원해지면서 덩달아 마음마저 시원해진 느낌을 받는다. 바람에 실려 오는 싱그러운 풀냄새,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들, 꽃 사이로 날아다니는 벌 나비, 변화무쌍한 구름, 천변만화하는 산의 모습,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물 위에 반짝이는 햇살,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 이 모든 것들은 공해에 찌들고 세상사에 지친 몸과 마음에 안정을 준다. 자연 속에 있으면 "아, 좋다! 아, 살 것 같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터진다. 바로 자연이 주는 효과이고 치유력이다.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날씨가 아무리 변화무쌍하다 해도 24절기는 어김이 없다. 때가 되면 알아서 기온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서 말 없는 가운데 제 할 일을 빈틈없이 해놓는다. 자연은 가장 정직하고 부지런하다.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거나 눈속임하는 법이 없다.

나는 창조니 진화니 하는 생명의 근원설(根源說)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흙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다가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한 존재이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이 가장 깊게 공부해야 할 위대한 책이며 최고의 스승이다.

대자연의 넉넉한 품속에서 성찰의 시간을 갖고, 깊은 위안과 삶의 활력을 찾으면서 야생화를 비롯한 자연 생물에 관심이 생겼다. 이름을 모르는 꽃을 보면 그 이름이 궁금하여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에게 묻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아는 사람이 적었다. 20세기 대표 지성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현상을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사실 꽃 이름을 안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서를 무척이나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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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제비나비와 벌개미취 벌개미취의 꿀을 빠는 산제비나비, 참 기품이 있다. 산제비나비를 보면 <봄날은 간다>라는 가요가 떠오른다.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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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현호색 야생화를 보려면 몸을 한껏 낮추어야 한다. 모든 꽃들은 피었다가 지며, 꽃이 핀 기간은 허무하리만치 짧다. 그래서 아름답고도 슬픈 것이다. 인생 역시 꽃처럼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 이명수


야생화와 자연 생물을 더 쉽게 공부할 방법을 궁리하다가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했다. 사진을 찍어서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면 회원 중의 누군가가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야생화와 나무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꽃과 나비, 자연 생물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것은 아주 재미있고 유쾌한 취미라고 생각한다. 이름도 모르고 꽃을 보는 것과 이름을 알고 꽃을 보는 것은 확연하게 다르다. 길을 걷다가 모르는 사람을 보면 그냥 스치고 지나가지만, 아는 사람을 보면 인사를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는 나에게 와서 의미가 된다.

야생화 앞에 서면 먼저 낮추는 법을 알게 한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유심히 보아야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이 보인다. 꽃마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매력을 지녔다. 이름을 불러 주고 가만히 바라보면 놀랍게도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내 목소리가 들리고, 꽃이 말을 걸어온다.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아라
그래야 말도
꽃같이 하리라
사람아

꽃이 속삭여 주는 황금찬 시인의 '꽃의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도 눈높이를 맞추고 꽃처럼 화사한 미소로 향기를 전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꽃 뿐만 아니라 숲 속의 모든 자연물이 말 없는 가운데 말을 걸어온다. 무엇이 그대를 힘들게 하느냐고?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고 아등바등 사느냐고? 세상에 바쁠 것은 하나도 없는데, 사람의 마음이 공연히 조바심을 치며 바쁨을 만드는 것이라고 숲을 지나온 바람이 말한다. 천국과 지옥은 그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고 흐르는 물이 말한다. 쉬엄쉬엄 주변도 돌아보면서 천천히 가라고 산이 말한다.

숲의 가장 큰 특징은 조화와 상생의 어울림이다. 아름드리 나무와 잡목, 잡초 등이 어우러져 숲을 이룬다. 그 숲에 기대어 다양한 곤충과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들 또한 숲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숲이 모든 생물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물과 공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숲을 이루는 식물의 증산작용으로 공중으로 올라간 수증기가 응축되어 비가 내리고, 식물들의 광합성 작용으로 공기 중의 산소가 만들어진다. 숲속에 들어가면 정신이 맑아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도 삼림이 방출하는 피톤치드 덕택이다.

이렇듯 자연은 모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충실히 만들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뗀다. 생색을 내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다. 한없이 겸손하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대자연 속에 서면 인간은 참으로 작고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 잘났다고 우쭐거리는 인간들이 많다. 그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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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생을 탓하지 마라! "내 인생은 왜 이럴까?"라고 탓하지 마세요. 인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왜 이럴까?"라고 늘 자기 자신한테 트집을 잡는데 문제가 있다. 어느 책에서 읽고 마음에 담아둔 말인데, 문득 떠올라 써보았다. ⓒ 이명수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무릇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의미로 자연과 인생의 순리를 말해 준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은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정화하면서 만물에 생명을 준다. 흘러가는 물은 먼저 가려고 앞을 다투지 않기에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고 하였다. 다툼을 피해갈 수 있는 삶은 지혜로우며, 물처럼 담담하게 흘러야 강을 이루고 바다에 이르게 된다.

자연을 닮고자 했던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에게 한 기자가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라고 물었다. 가우디는 창밖의 풍경을 가리키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연과 함께 살아가도록 했으며 같이 생활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곧 나의 스승은 자연이다"라고 대답했다. 책에서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무릎을 쳤다. 참으로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고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큼직하게 '아사자연(我師自然)'이라고 썼다. 그 후 산에서 노닐 때 이따금 써보는 말이다. '나의 스승은 자연'이라고 붓으로 쓰는 동안에도 자연은 내게 많은 말을 전해준다.

대자연은 언제나 사람 마음을 벅차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위로가 되고 많은 가르침을 준다. 자연에 파묻혀 자연을 만끽할 때면 소동파의 '적벽부' 구절이 절실하게 공감되기도 한다.

"무릇 이 천지 세상에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는 법이니, 만약에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털끝 하나라도 취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그림이 되나니, 취해도 금할 자 없으며, 쓴다 해도 줄어듦이 없다. 이는 조물주의 한없는 보물이므로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것들이다."

소동파의 말마따나 대자연은 조물주의 한없는 보물이다. 산과 들, 꽃과 나무,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 구름, 별과 달은 보고 느끼고 즐기는 사람이 주인이다. 마음만 내면 이태백이 놀았던 그 달에서 나도 한바탕 놀 수 있고, 도연명이 취했던 국화 향기에 나도 빠져들어 시 한 수를 읊조릴 수 있다. 세상에 그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에 있으랴! 때가 되면 더 늦기 전에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 버리고 번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에 깃들어 진실로 소박하게 살고 싶다.
#我師自然 #인문학적 붓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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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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