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 워킹맘 "나에겐 아내가 있다"

[서평] 에이미 폴러가 쓴 NO!보다 강한 말 <예스 플리즈>를 읽고

등록 2017.09.25 10:11수정 2017.09.2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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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두 살이다. 이제 인생의 중반을 시작한 셈이다. 아직 삶을 뒤돌아볼 정도로 오래 살지 않았고, 그렇다고 톡톡 튀면서 귀여운 글을 쓰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다. 이제는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 정도로는 나이를 먹었다."

미국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로 유명한 에이미 폴러가 쓴 자서전 <예스 플리즈>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에이미 폴러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서 작가 및 배우로 활동했고,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의 목소리를 연기했으며, 미드 <팍스 앤드 레크리에이션>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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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플리즈 : NO!보다 강한 말> ⓒ 책덕

에이미는 <예스 플리즈>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연기와 코미디를 업으로 하며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삶을 가감 없이 다 드러낸다. 어린 시절, 즉흥 연기, 가족 이야기, 이혼 이야기, 방송 이야기 등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을 풀어놓으면서도, 어떻게 편견에 맞서 살아가야 하는지 몸소 보여 준다.

나는 서문을 읽자마자, 이 언니한테 반했다!(실제로도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나이 마흔이면 '불혹(不惑)'이라지 않나. 40대가 되면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살아갈 줄 알았다.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으로 말이다.

하지만 40대가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작은 일에 흔들리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겁을 먹는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구한테 들킬까 그럴싸하게 나를 포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이미는 달랐다.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담담하다 못해 당차게 털어놓는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흥연기를 사랑하고 웃기는 걸 지상 최대 과제로 삼는 에이미는 하는 말마다 위트가 넘쳐서, 생각지도 못한 지점을 푹~ 찌르고 들어온다.

책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미 책을 써 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네 살짜리 아이가 엄마에게 출산에 관해 묻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라고 하질 않나(출산의 고통을 잊고 둘째를 낳는 이들을 보라. 책쓰기 감각은 무뎌지고 고통은 잊어버렸을 테니 물어 봤자지), 지치고 두려울 때 머릿속에서 "넌 해내지 못할 거야"라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오면 뇌를 꺼내 서랍 속에 넣어 버리라고 하질 않나(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엉뚱하고 기발한 표현에 웃다가 정신 차려 보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알짜배기 조언들이 가슴을 파고든다. 항상 웃음을 전파하는 코미디언답게 일상 속에서도 초긍정 모드겠지 싶었다. 책 제목만 봐도 <예스 플리즈> 아닌가.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모든 일을 평화롭게 해결한다는 의미려니 짐작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빗나갔다. 에이미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 보자.

""예스"라고 말한다고 해서 "노"라고 말할 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플리즈"라고 말한다고 해서 허락을 기다린다는 뜻도 아니다. "예스 플리즈"는 강력하고 단호한 말이다. 응답인 동시에 요청이다. (...) 나는 아이들이 "예스 플리즈"라고 말할 때가 좋다. 무례한 사람이 바글바글한 이 세상에서 좋은 예절은 우주를 여는 비밀 열쇠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너도 나도 전부 화가 나 있다. 툭하면 서로에게 칼날을 세운다. 코미디언보다 더 웃기는 정치인들 덕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헛웃음이 나오고, 주요 이슈마다 따라붙는 여혐과 남혐 논쟁으로 한숨이 나오고, 갈수록 강도가 심해지는 십대 청소년들의 폭력 사건 등으로 한탄이 끊일 날이 없다.

어디 국내뿐이랴.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도 심상치 않고,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테러와 전쟁 소식에,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 재해까지.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다. 어른이든 아이든, 남자든 여자든, 엄마든 아빠든, 어디에서 살든, 나답게 살아가기가 힘들다.

웃으며 "예스 플리즈"라고 말했다가는 우습게 보일 것 같다. 인상부터 쓰고 강하게 "노!"라고 외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진리라도 되는 듯. 무례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무례하게 굴어야 한다!

하지만 에이미는 이런 혼돈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친절해지는 거란다. 어떤 일이든 혼자 할 수 없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연대'의 정서가 흐르는 게 당연하다 싶다.

'엄마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라는 목차만 봐도 그렇다. "여성 코미디언은 웃기지 않다"라는 편견이 팽배한 미국 방송계에서 '여자'라는 존재로 버틴다는 게, 에이미도 쉽지 않았다. 거기다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워킹맘이라면 "대체 그 모든 걸 어떻게 다 해내느냐"라는 존경인지 비난일지 모르는 질문에 시달려야 한다. 아이들 곁에 있지 못한 자책감을 느끼는 척 연기하면서.

이 총체적 난국을 에이미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에이미는 아이를 키우면서 방송 일을 제대로 해내는 비결로, "나에게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엄마에게는 아내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즉, 남편이나 가족, 친구나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워킹맘을 돕는 모든 이가 바로 '엄마의 아내'인 셈이다. 에이미는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방송국에서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를 둔 전업주부 중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이 많다. 집에서 번역하며 육아와 살림도 병행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거다. 새벽같이 일어나 식사 준비하고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설거지나 집안 청소를 하면 어느새 점심.

좀 쉬어 볼까 하면 아이가 돌아올 시간. 그러다 곧 저녁 준비를 해야 하고 다시 뒷정리를 한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밤늦게 공부나 번역을 시작해 새벽에 잠든다. 그러고 해가 뜨면 다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잠시라도 멍 때리며 쉴 틈이 없다. 매일 이렇게 지내다 보면 체력도 떨어지고 신경도 예민해진다. 그래도 자신의 정신력 부족을 탓하며 혼자 다 감당하려 한다. 그동안 예비 번역맘들에게 슈퍼맘이 되려고 애쓰지 말고 가족의 도움을 받으라고 말하곤 했다. 이제는 에이미의 말을 빌려 "어서 아내를 하나 만들라"고 말해 주고 싶다.

우리 모두 에이미처럼 인정하자. 삶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걸. 노키즈존, 꼰대, 아재, 맘충, 일베, 메갈... 이런 편견덩어리 표현으로 단정 짓고 선을 그으면서 나이, 성별, 직업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고 배척해야 할 존재가 되고 있다.

에이미는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다 못해 "로봇이 우리를 다 죽일 거야"라고 걱정하지만, 혼돈의 시대가 계속되다 보면 인간 스스로 자멸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성선설을 믿지 않지만, '친절함이 이 시대의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에이미의 말을 한번 믿어 보고 싶다. 도전의 기회가 왔을 때는 주저 없이 "예스"를 외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땐 진심을 담아 "플리즈"를 외쳐 보자.

예스 플리즈 - NO!보다 강한 말

에이미 폴러 지음, 김민희 옮김,
책덕, 2017


#에이미폴러 #예스플리즈 #책덕 #S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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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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