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포 먹다 불도그에 쫓긴 동생... 누나가 미안해

[단짠단짠 그림요리] 쥐포튀김

등록 2017.09.23 21:10수정 2017.09.2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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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과 마당 한가운데 있는 사철나무 아래로 기어들어 왔다. 이 나무는 다른 식구들 몰래 과자를 먹을 때 찾는 나만의 비밀장소다. 나무 위에 올라가면 동그란 잎으로 둘러싸인,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과자도 훨씬 맛있어진다. 이 사실을 엄마가 안다면 "여자애가 드세게 뭐 하는 짓이냐"며 혼을 내겠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특별히 오늘은 동생과 함께하기로 했다. 엄마가 외출하기 전에 쥐포튀김을 해놓았다. 이렇게 맛있는 걸 밋밋하게 방안에서 먹을 순 없다. 게다가 '집안에서 얌전히 먹으라'며 찬물을 끼얹을 어른도 없다. 기세등등하게 마당으로 나와서야 나무를 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양손에 튀김을 쥐고 있어서다. 아쉬운 대로 나무 아래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튀김을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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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포튀김 ⓒ 심혜진


초등학교 2학년인 남동생은 나와 세 살 터울이다. 극성스런 나와 달리 동생은 여리고 섬세하다. 이런 동생을 골려 먹을 때도 있지만 다양한 놀 거리를 제공해주는 사람 또한 나였다. 이번에도 동생은 무슨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양 즐거워했다. 이 공간을 발견한 것이 얼마나 은밀하고 대단한 일인지, 순진한 동생에게 맘껏 으스대며 쥐포튀김을 한입 물었다.

그때였다. 대문 아래 빈 곳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까 대문 닫는 걸 깜박한 것이 생각났다. 자책할 새도 없이 두툼한 발 네 개가 성큼 대문턱을 넘어섰다. 낮은 회양목에 가려 몸통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알겠다. 저건 우리 동네에 딱 한 마리밖에 없는, 검은 대문 집의 불도그였다.

검은 대문 집에는 노인 내외가 살았다. 그들은 이웃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다. 불도그는 늘 높은 담 안에서 줄에 묶여 있다가 행인을 향해 컹컹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금방이라도 담벼락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사나워서 다들 그 집 앞을 지나가기를 꺼렸다. 그 개가 동네 떠돌이 개를 물어 죽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검은 대문 안쪽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그 개의 두툼한 발과 검은 코는 동네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발 네 개가 회양목을 돌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불도그는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개가 내 입 주변에 코를 바짝 대고 킁킁거렸다. 쥐포튀김 냄새를 맡고 있는 듯했다. '개는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최대한 입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냥 가만히 있어"라고 동생에게 말했다.


그 순간, 불도그가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도그가 내게 정신이 팔린 사이, 겁에 질린 동생이 그만 나무 아래를 빠져나간 것이다. 동생은 집 뒤쪽으로 도망쳤고 불도그는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나는 잽싸게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반쯤 열어 놓고 동생을 기다렸다. 집을 한 바퀴 돌아 동생이 나타났다. 동생은 지금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동생에게 "얼른 이리 들어와!"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불도그가 쫓아오는 걸 보고는 열었던 문을 나도 모르게 닫아버렸다. 동생과 불도그가 차례로 사라졌다. '이번엔 꼭 동생을 들어오게 해야지!' 두 번째 바퀴를 돌고 나온 동생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새파래졌고 표정도 훨씬 복잡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세 바퀴를 돈 동생은 지쳐 보였고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네 바퀴째, 동생은 아예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동생을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동생을 따라 나가려 했지만 그럴수록 피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던, 불도그의 충혈된 눈이 자꾸 생각났다. 나는 현관문을 꼭 닫아걸고 중얼중얼 동생을 위한 주술만 외웠다.

잠시 후 대문으로 동생이 들어왔다. 얼굴이 울면서 말했다. 공터를 한 바퀴 돌았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단다. 눈앞이 아찔하던 그 순간, 불도그는 동생의 입 주변을 몇 번 킁킁대더니 저만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신나게 한 판 잘 놀았으니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쿨하게.

물린 데가 없어 다행이었다. 긴장이 풀리고서야 먹다 남은 쥐포튀김을 아직도 손에 쥐고 있단 걸 알았다. 마당 한쪽 퇴비장에 휙 던져 버리려다 이 냄새를 맡고 불도그가 다시 찾아올까 봐 땅에 파묻었다. 나는 동생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말하지 말라고 했다. 동생은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그날 저녁, 엄마가 현관문 손잡이가 온통 기름투성이인 걸 발견하곤 누가 이랬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차례 문손잡이를 붙들고 열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차라리 동생과 함께 개에게 쫓기는 꿈이었다면 덜 비참했을까? 그 나무 아래에서 뭔가를 먹은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단짠단짠 그림요리 #쥐포튀김 #불도그 #요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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