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와 CGV 점령한 '세금도둑'의 뻔뻔함

[뉴미디어기획] 시민사회가 ‘4차산업혁명’에 속지 말아야 할 이유⑦

등록 2017.09.23 20:21수정 2017.09.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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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철도 티켓 발권하는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월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해 공항철도 탑승을 위해 표를 발권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2017년 새해 초, 자판기 한 대가 유력 정치인의 꿈과 미래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사건이 터진 장소는 그가 10년간의 외국 생활을 접고 막 도착한 공항이었다. '도착 즉시 사망(DOA)'이라는 표현이 이처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화제의 인물이 돌아오는 만큼, 공항에는 열렬한 지지자들과 무수한 카메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인사를 호위병처럼 따르던 사진기자들은 그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켜 줄 은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짓궂은 운명이 이들에게 저승사자 역을 맡겨 놓았다는 사실을.

출국장으로 나온 명사는 호기롭게 공항철도 자동발권기로 다가갔으나, 이게 화근이었다. 그 순간 포착된 장면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가 현금 투입구에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포개어 들이대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지폐를 한 장씩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두 장을 겹쳐서 재시도해 본 것인데, 그렇다고 한 장도 거부한 자판기가 두 장을 한꺼번에 받아줄 리도 없었다.

공항철도 발권기는 인원수를 먼저 입력하고 금액이 화면에 뜨면 그때 돈을 넣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모르던 그는 돈 먼저 집어넣으려고 했다. 물론, 이 정치인이 기계 사용법에 서투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유권자는 그렇게 가혹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실 문제는 그가 오래전부터 모호하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보여왔다는 데 있었다. 그로 인해 그가 공항에서 연출한 '친서민 행보'가 위선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문제의 지폐 두 장은 그의 얄팍한 비늘을 벗겨내는 상징적 사건이 되어 버렸다.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외친 아이처럼, 만 원짜리 두 장은 '기름 벗겨진 장어'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만일 그가 과거부터 신뢰를 쌓아왔다면, 지폐 두 장이 아니라 돈을 다발로 들어댔어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2만 원의 주인에게 무수한 조롱과 비웃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 희극적 장면이 당사자 한 명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판기의 습격

앞의 글 "빅데이터의 저주가 당신을 노린다"에서 썼듯, 한국의 지하철역에서 표를 팔던 역무원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그 역할은 자동 발권기가 맡게 되었다. 이 변화는 무엇을 뜻할까? 단지 표를 팔던 '사람'이 표를 파는 '기계'로 대체된 것뿐일까?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지하철이든, 사람이 표를 파는 한 누구든 쉽게 표를 살 수 있다. 그 나라의 언어를 몰라도 상관없다. 원하는 매수만큼 손가락만 펴 보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자판기가 하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동 매표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불편함을 인식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기계는 당혹 그 자체다. 낯선 외국에 갔을 때만이 아니다.

같은 나라에서조차 발매기들은 지역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예컨대 뉴욕 지하철에서 익숙하게 표를 사던 사람도 워싱턴 디시의 지하철 매표기 앞에서는 허둥대기 마련이고, 시카고의 '엘(L)' 지상철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던 승객도 보스턴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발권기 앞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에서 자랐고, 첨단기술에도 익숙한 편인데도, 지하철역에 디지털 발매기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생경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표를 사려면, 화면에 뜬 자음과 모음 버튼을 눌러 목적지를 찾아야 했다. 이 때문에 타지에서 온 여행자나 연세가 높은 승객들이 기계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고, 가끔 이들이 표를 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앞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과연 매표소 직원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을까? 기계는 고작 표를 팔 뿐이지만 (그나마 고장이 안 났을 경우), 매표소에 앉은 직원은 지하철 방향이나 내려야 할 역을 묻는 승객들에게 답해 주기도 하고, 큰돈을 잔돈으로 바꿔주기도 하고, 안내방송으로 사람을 찾아 주기도 했다.

여기에, 승차권이 작동하지 않는 사소한 사고로부터 승객의 목숨이 위태로운 급박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연락과 해결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표도 팔았다. 버튼을 눌렀다가, 또 취소 버튼을 누르고, 기계가 토해내는 돈을 펴서 다시 집어넣을 것도 없이, '~역 두 장이오' 말 한마디로 표를 살 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 사람이 기계로 바뀌는 것은 누가 원해서 하는 일인가? 승객들이 사람보다 기계 앞에서 줄을 서는 것을 더 신나게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인건비를 아끼고 싶어하는 기업과, 이들과 이해관계를 나누는 제조업체를 위해서인가?
자판기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과거에 지하철 매표소는 '사람 목숨 구하는 일'을 상시로 했었다. 사고가 발생한 뒤 조치하거나, 범죄에 노출된 승객을 도울 때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매표소는 최소 2, 3명의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해 줌으로써 직원과 가족들의 밥줄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자리에는 화면 달린 기계 몇 대가 놓여있을 뿐이다. 이 발권기에 '알파고' 손자의 증손자쯤 되는 최첨단 인공지능을 이식한다고 사람이 하던 일을 대신할 수 있을까? 예컨대 부모 손을 놓친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가 가족이나 경찰에 인계하거나, 연기 가득한 기차의 유리창을 깨고 승객을 구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최근 한국의 아파트에서 '스마트 보안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경비원을 해고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런 일을 추진하던 주민 대표가 나와 '경비 절감을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말할 때, 나는 폭소를 터뜨린다. 본래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돈이 드는 법이다. 이런 주민 대표들을 모아 한꺼번에 '스마트 시스템'으로 대체하면 비용 절감도 되고 바보 같은 소리도 덜 듣게 될까?

지난 6월 인터넷 게시판을 달군 사진 한 장이 있다. 대전의 한 아파트가 경비원 14명을 한꺼번에 해고하기로 하자, 주민이 항의하는 대자보를 붙인 것이다.

"14명을 해고하면 연간 3억을 절약할 수 있다지만, 고화질 CCTV와 차단기 등의 설치 및 유지 비용도 들 것이고, 출근·등굣길의 경비아저씨 교통정리 등 아이들 안전등교도 포기해야 하고, 눈 많이 온 날 눈 청소나 주변 정리도 해줄 분이 주는 겁니다."

이 글귀 하나가 클라우스 슈바프가 쓴 <4차산업혁명> 한 권보다 우리가 처한 기술적 현실을 더 예리하게 진단한다(영국 <가디언>지의 서평은 슈바프의 책을 "겉멋만 부린, 멍청한 소리로 가득한 책"으로 평하기도 했으니, 별로 놀랄 일은 아닐 터이다). 게다가 대자보에서 이어지는 내용은 로버트 고든이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에서 제시한 '경제성장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핵심까지도 짚어낸다.

"최저임금을 인상해서 경비 아저씨 같은 분 가정을 더 안정화 시키자고 했더니 (오히려) 해고하자니 이게 ㅇㅇㅇ아파트 주민이 할 일입니까? … 있는 사람들이 만 오천 원 더 내서 소득계층이 낮은 분을 도우랬더니 기계 설치하고 사람 해고?… 그동안 수고하신 경비분들도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기술이 아니라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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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8일 오전 열린 서울 마포구 맥도날드 상암DMC점 오픈 행사에서 조주연 사장이 메뉴를 주문할 수 있는 디지털키오스크를 시연하고 있다. ⓒ 연합뉴스


고든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토대로 미국 경제 성장의 종말을 선언한다. 첨단기술이라는 비행기 엔진이 용을 써서 최대 출력을 낸다고 해도,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면 속도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역풍'이 바로 저임금, 빈부격차, 높은 의료비, 천문학적 등록금 같은 사회문제다. 이는 한국사회 역시 겪고 있는 문제들로, 지난 두 정부에서 더욱 악화 일로를 걸었다.

생각해 보라. 기업들이 아무리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귀신같이 활용해서 소비자 구미에 맞는 제품을 최신 로봇으로 생산한다 해도, 소비자가 물건을 살 소득이 없으면 경제는 성장할 수 없다. 재고가 쌓이면 기업들도 생산을 중단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문을 닫아야 하며, 이제 그 첨단 기술이 갈 곳은 쓰레기통밖에 없게 된다.

앞에서 자판기가 판매원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게다가 자판기는 경제성장의 적이기도 하다. 기계가 궁극적으로 하지 못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비'다. 아르바이트생이 월급을 받으면 친구들을 불러내어 삼겹살집에서 한턱 '쏘고', 노래방에도 가지만, 자판기는 불 꺼진 업소에 그냥 서 있을 뿐이다.

최근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리자 고용을 줄이고 기계를 늘리는 얌체 기업들이 늘고 있다. 이제 지하철, 기차역, 버스터미널뿐 아니라 극장과 패스트푸드 업계에도 자동 판매기나 무인 주문대가 들어서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 롯데리아가 전국 1300개 매장 가운데 500개 가까운 매장에 무인 시스템을 도입했고, 맥도날드는 전체 매장의 절반이 넘는 250여 매장에 무인 결제시스템을 도입한 상태이다.

씨비에스(CBS)의 8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용산 씨지브이(CGV) 영화관은 최근 스크린을 11개에서 20개로 대폭 늘리면서, 매표소 직원은 추가 고용하지 않고 무인 판매기만 추가로 설치했다고 한다. 롯데시네마 역시, 2010년부터 무인단말기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창구의 직원을 줄여가고 있다. 하지만 기계가 불편하고 고장이 잦다 보니, 창구로 사람들이 몰려 직원들이 이중으로 고통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기업들의 이런 행태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기업의 윤리나 사회적 책임은 둘째 치더라도, 극장과 패스트푸드의 주된 고객이 누구인지를 잊은 한심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햄버거 체인에서 일하는 청소년들이 극장의 주요 관객층이고, 극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들이 햄버거 체인의 주요 고객들이란 사실을 깨닫기 그리 어려울까?

넉넉한 최저임금은 소비의 마중물이고, 소비는 경제에 피를 돌게 만드는 심장이다. 직원들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고 기계를 들이면, 나중에 기계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감자튀김을 팔 생각일까? 이렇게 눈앞의 이익만 좇는 근시안적 경영판단을 하니 기업들의 수명이 계속 줄어드는 것이다.

게다가 자판기는 소득세를 내지 않는 '세금도둑'이기도 하다. 세금은 앞서 말한 빈곤, 빈부차, 의료, 교육 등 '역풍'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재원이다. 이 '탈세범'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다음 글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4차산업혁명 #자판기 #무인판매기 #경비원 해고 #최저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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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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