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생 치킨배달원

등록 2017.09.22 17:26수정 2017.09.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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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가출을 했다. 이어진 방황으로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별다른 준비 없이 한 중퇴였기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당시 유행하던 '스타크래프트2'라는 게임에 빠져 도서관을 간다며 피시방으로 출근하기 일쑤였다. 검정고시 학원에서는 한 살 형과 주먹다짐까지 하기도 했으니, 술·담배까지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군대 전역하고는 치킨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십대 때 체육관 관장님이 "공부 안 하면 짜장면 배달이나 하고, 그러다 사고 나서 다른 사람들한테 신선한 장기 배달까지하게 되는 거야"라는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넉넉한 시급을 포기할 순 없었다. 눈비가 오는 날에는 목숨을 걸고 배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삼십 분 이상의 노동과 위험수당으로 만들어진 '치맥'에 대부분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수고하세요"라는 말 뿐이었다. "조심히 가세요"라는 한마디 듣는 날에는 퇴근 때까지 힘이 났다.

사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그 덕에 부모님과 선생님을 설득할 수도 있었다. 학교를 그만둔 이유도 노무현 대통령을 보며 "나도 고졸 출신 인권 변호사가 될 거야!"라며 사법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막상 수험공부를 해보니 내 길이 아니라고 확신이 들었다. 진로를 바꿔 경찰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다행히 영어에 소질이 있었던지, 영어특기자 전형으로 경찰을 희망하는 청소년들이 대부분 가고 싶어하는 학교에 열아홉 살에 입학할 수 있었다.

돈 욕심이 있어서인지, 치킨배달과 함께 대기업에서 알바도 시작했다. 총수가 구속되거나 말거나 매출액·영업이익 1위를 지키는 그 기업이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어와 영어로 내·외국인들에게 홍보와 안내를 담당하는 일을 한다. 치킨배달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강도의 노동에도 사람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한다. 밥 한 끼를 위해 외부에서도 찾아오는 식당에서 무료로 식사를 하고, 두 시간을 근무하면 꼬박꼬박 삼십 분을 쉬며 일한다.

많은 사람들이 낯선 사람을 판단할 때 '지위', '직장', '학력' 등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이내 대접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나만해도 고등학교 중퇴생이라고 소개할 때와 대학을 일 년 일찍 간 사람으로 소개할 때 그 대접의 차이가 전혀 달라졌다. 꼭 '자퇴생' 뒤에 '조기졸업자' 같은 불필요하고, 가식적인 표현을 추가해야할 것만 같았다. 치킨 배달을 한다고 말할 때와 대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고 말할 때도 사람들의 온도차가 달랐다. 종종 "배달은 시급이 쎄요"라는 부연설명을 자연스레 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담배 냄새를 혐오하고 흡연자들을 이해할 수 없던 내가 지금은 애연가가 됐다. 허구한 날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칭했던 내가 진보 정당에 가입하여 선거운동을 했다. 성차별적인 사고를 하고 그런 언어를 즐기던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과거와 내가 달라진 것은 한 가지이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나의 한계를 어렴풋이 짐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야누스를 하나 둘 발견하고, 이방인들의 야누스를 짐작하며 사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서진석 씨는 현재 인권연대 회원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야뉴스 #지위 #자퇴생 #사회운동 #치킨배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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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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